00343 39. 간몬 해협 전투 =========================================================================
일본 사신단을 떠나보낸 다음 이민호의 표정을 살피던 민영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일본인들과 대화하기 답답하시죠?”
“응. 어찌 그리 한결같이 다들 제멋대로인지 모르겠어. 제발 제대로 대화가 되면 좋겠어.”
이민호와 제대로 말이 통했던 일본인은 자수성가한 토도 다카토라밖에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어느 나라든 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자들은 남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화가 잘 안 통했다.
“노야께서 몸소 마중 나와 주시다니요. 정말 영광입니다!”
명나라 병사들이 들어오는 남쪽 성문 쪽으로 이민호가 향했다. 말에 탄 채로 성에 들어오던 제독 유정이 얼른 말에서 내려 이민호에게 군례를 올렸다.
“대첩을 올린 유 제독께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주애공 노야! 드디어 큐슈 전체를 정복했습니다. 마지막 전투 때는 제가 선봉으로 직접 성문에 올라가서 왜장 열 명을 베었습니다. 왜병을 상대할 때는 역시 남병이 최고입니다. 물론 노야께서 빌려주신 기병대대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만, 북병은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유정이 마치 혼자서, 혹은 남병만으로 큐슈 전체를 점령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러나 조선군이 성벽을 무너뜨리고 기리시탄 의용병들이 산성을 포위해주지 않았더라면 쉽게 이기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임진왜란 때 제독 이여송은 오직 북병만 군대로 치더니 유정은 반대로 북병을 심하게 깎아내렸다. 상황에 따라 남병과 북병을 적절히 활용해야 할 장수들이 출신 군종에 따라 지나치게 편파적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황제폐하를 대신해서 유 제독을 치하하는 바요. 그런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소.”
“전투는 벌써 끝났는데 10만이나 되는 포로를 데려오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왜인 포로들은 아직 절반도 도착하지 않았다. 성벽 앞에 도착한 왜인들은 털썩 주저앉아 눈치만 살폈다. 가족과 친지 몇 명쯤은 기본으로 잃은 사람들이라 허망한 표정으로 하늘만 쳐다봤다.
“저 왜인 포로들을 어찌 할 셈이오? 북경으로 데리고 가면 좋겠지만 운송편이 여의치 않을 것 같소.”
“주애공 노야께서 황제폐하께 올릴 주문에서 확인만 해주시면 노야께서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습니다.”
조선국 도원수 이항복이 뒤늦게 성문에 도착했다. 며칠 일찍 와도 될 일을 이민호가 무서워 일부러 본진과 함께 온 것 같았다. 이항복은 이동 중에 포로들의 신원을 분류하는 일을 한 척했다.
“보고 드립니다. 끝까지 저항하던 사쓰마 왜병 2만은 대부분 전사했고 일부 붙잡힌 자들은 점령한 산성 아래에서 모두 참수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쟁 때 성에서 끝까지 저항할 경우 다들 그렇게 포로를 참수한다고 합니다. 군사가 아닌 왜인 포로는 성인 남자가 3만 8천, 성인 여자가 4만 3천입니다. 15세 이하 아이들이 젖먹이부터 해서 3만쯤 됩니다.”
일본에서는 성 수비군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함락될 경우 병사는 물론 민간인도 다 죽였다. 일종의 규칙이었는데 고니시군이 부산포성과 동래성을 함락했을 때 조선 민간인을 죄다 죽였는데 일본에서 하던 습관 그대로였다. 이곳에 끌려온 포로들은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걱정하거나, 혹시나 살아날 수 있을까 궁금해 했다.
“그럼 포로가 11만인데, 저들을 어떻게 할 거요?”
“유 제독께서 나가사키에 노예로 팔자고 했지만 주애공 대인의 허락도 없이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주애공 대인께서 알아서 결정하십시오. 다만 오늘부터 포로를 먹이고 입히는 일은 고산국 군대에 이관하겠습니다.”
차라리 나가사키에 노예로 팔았다면 싸게 구입해서 고산국으로 빼돌렸을 텐데, 이항복이 반대하는 바람에 이곳까지 끌고 오게 되었다. 이항복은 이래저래 이민호에게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히고 말았다.
포로들을 먹이고 씻기고 살 길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민호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이항복을 다시 만나면 거세게 추궁하려고 계획했으나 지금은 말도 꺼내기 어려웠다.
“유 제독! 이 도원수도 들어보시오. 방금 일본 조정에서 파견한 사신이 큐슈를 넘겨주는 대신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했소.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야 좋습니다. 이미 황제폐하의 위엄을 왜 땅에 충분히 과시했습니다. 전쟁비용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으니 이 정도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을 황제폐하께서도 용납하실 겁니다.”
제독 유정이 북경에서 개선 행진하는 장면을 상상하는지 입을 헤벌쭉 벌렸다. 그러나 이항복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저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무래도 거짓말 같습니다.”
큐슈를 점령한 것만으로도 명나라와 조선은 충분히 명분과 실리를 얻을 수 있었다. 두 나라는 만약 더 이상 군비를 지출하지 않고도 새 영토를 얻게 된다면 이민호에게서 적당히 대가를 받고 본국으로 물러날 용의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큐슈는 온전히 고산국만의 영토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비용 정산 문제에 들어가면 서로 유리하게 계산하느라 골치 아파질 것은 이민호도 각오했다.
여기까지는 이민호도 충분히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도원수 대감! 일본이 대군을 몰아 큐슈로 쳐들어온다는 말이오?”
“왜군이 큐슈를 탈환한다면 대군을 동원할 필요도 없습니다. 천군과 조선군이 언제까지나 큐슈에 주둔할 수는 없습니다. 고산국 군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큐슈에 연합군 병력이 가장 적어지는 순간 언제든 탈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쉽게 큐슈를 넘겨준 것 같습니다.”
“도원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소.”
멀리서 원정 온 외국 군대를 물리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군량이 떨어지거나 더 이상 전쟁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후퇴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일본인 다이묘들은 명군과 조선군이 큐슈를 침공했으나 곧 물러설 것으로 파악했다.
일본 다이묘들 입장에서는 다만 고산국이 문제인데 병력이 일만 남짓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산국 군대의 주력이 빠지는 순간 다시 큐슈를 탈환하면 된다는 느긋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다이묘들은 이민호를 잘못 봤다. 일본을 점령해 지배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 기회에 일본인들을 철저히 무릎 꿇릴 생각을 하고 있는 이민호였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이민호는 비올레타와 호위들을 이끌고 근처의 절을 전용한 성당에서 열린 성탄 전야 미사에 참가했다. 비올레타가 천주교 신자이므로 흰색 미사보를 머리에 두르고 입장하자 미사에 참가한 모든 일본인 신도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는 물론이고 대부분 분고 지역 거주자들인 기리시탄 의용병들은 이민호와 비올레타가 미사에 참가하자 몹시 감격했다. 특히 큐슈의 실질적 주인이 된 이민호가 미사에 참가한 것은 기리시탄들이 이제는 더 이상 종교 탄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적 의미가 있었다.
다른 사제가 미사를 진행하는 사이 이민호가 포르투갈 신부를 불렀다. 인사말이 오간 다음 이민호가 신부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다.
“신부님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성당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거짓말을 하셨소.”
“죄송합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지나간 일이니 됐소. 신부님의 종교적 열정도 이해가 가고, 나도 도움을 받았소. 그러나 앞으로 정치에 간섭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게다가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니 신도들을 속이지 마시오. 신도가 많아지더라도 다른 종교를 탄압하지 마시오. 나에게 약속할 수 있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부가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신부는 이민호가 믿는다는 종교 FSM을 초기 기독교 종파의 하나로 잘못 알고 있었다.
“성당을 세워준다는 약속은 내가 하지 않았으나 그 약속을 지켜주겠소. 마카오에 연락했으니 조만간 성당 건설을 도와줄 선교사가 올 거요. 자금도 마련해주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성탄을 축하합니다. 하늘에 영광을!”
“땅에는 평화를.”
얼떨결에 대꾸하는 신부를 남겨두고 성당을 빠져 나왔다. 이미 며칠 전에 성당에 기부금을 냈고, 기리시탄 의용병들도 소집 기간 동안 월봉을 받기로 해서 다들 따뜻한 성탄절을 보내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천주교와 불교는 잘 대해주시면서 신토는 동등하게 대해주시지 않은 것 같아요.”
“신토는 일본 고유의 종교이기도 하지만, 종교보다는 문화에 가까워서 그렇소. 일일이 지원해줄 필요가 없어요.”
“일부 신사에서 전하를 신으로 모시는 것 아세요?”
“컥!”
이민호는 몹시 황당했지만 당대 권력자나 유명한 무장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도 꽤 있었다.
며칠 후 고산국에서 보낸 수송선들이 탄약을 싣고 모지항에 입항했다. 수송 책임자는 뜻밖에 이민호가 큐슈 총독을 맡기려고 부른 정문부였다. 그런데 탄약은 필요량의 절반 이하에 불과했고, 정문부가 전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뭐요? 혜진이 화상을 입었어요?”
“큰 부상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전하. 수송선에 탄약을 적재하는 작업 도중에 폭발사고가 났습니다. 혜진 귀인께서 직접 진화작업을 지휘하러 오셨는데 그때 탄약을 실은 수송선이 유폭하면서 불덩이가 사방으로 튀어 날아왔습니다. 혜진 귀인께서 작은 화상을 입으셨으나 의사 말로는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남지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이민호는 혜진이 보낸 편지를 읽었다. 편지 내용 중에 화상에 대한 언급은 없고 탄약을 적게 보낸 이유를 간단히, 그리고 생산과 운송 계획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편지 내용 중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탄약은 부족한 대로 다른 요새에서 보관하던 것을 먼저 가져왔습니다. 열흘 후에 필요량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혜진 귀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잠깐! 폭발이라뇨? 수송선까지 폭발에 휘말렸다는 뜻이겠구려. 폭발 원인은 밝혀졌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군용부두 야적장에서 밤새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포탄을 쇠톱으로 잘라 꺼낸 화약을 모닥불 피우는데 쓰다가 터졌답니다. 야적장에 쌓인 포탄상자들이 연쇄 폭발하고 수송선 세 척도 화마에 휩싸여 역시나 유폭됐습니다.”
거제도에서 명군이 운반해온 화약이 폭발해 실컷 비웃었는데 이제 보니 고산국도 별 차이가 없었다. 수송선 세 척은 확실히 전소된 것 같았고, 사고 규모에 비해 인명피해는 크지 않을 것으로 이민호는 예상했다.
“미친놈들! 정말 최악이오. 사상자가 많이 생겼소?”
“한밤중에 생긴 사고라서 근무자 숫자가 적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병들 포함 21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됐고 다섯 명이 화상을 입었습니다. 사고를 일으킨 자들 세 명은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경비 서던 인간들이 날씨가 쌀쌀하다는 핑계로 술 한 잔하면서 안주를 끓이다가 그 모양이 된 것이겠지요?”
“맞습니다. 혹시 미리 보고 받으셨습니까? 제대로 야간 순찰 근무를 서지 않은 당직 장교를 체포해 구금했습니다.”
온갖 핑계로 근무 중에 술 마시다가 사고치는 경우야 현대 한국에 있을 때 워낙 흔하게 들어서 이민호가 따로 할 말이 없었다. 후방 지역인 고산국 본토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근무기강이 해이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중요한 순간에 이렇게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알겠소. 먼저 급한 이야기부터 좀 합시다. 아! 숙소는 저쪽이오. 2층에 집무실과 침실을 쓰시오. 하인들에게 일러두었소.”
“예. 감사합니다.”
이민호가 성벽 안쪽에 세워진 2층 벽돌 건물을 가리켰다. 철근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 벽은 벽돌로 쌓은 2층 건물은 멋대가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화재에 강하고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내부는 지금도 공사 중이었다.
정문부가 젊은 하급 관리 몇 명과 하인들에게 짐을 옮기도록 시켰다. 큐슈 총독부 위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이곳은 요새 방어 사령부 또는 무역항 관리사무소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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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