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41화 (290/1,000)

00341  39. 간몬 해협 전투  =========================================================================

바다에서 야마구치까지 이어지는 강이 있고 폭이 충분히 넓었다. 그러나 계절별 유량 변화가 심하고 지금은 갈수기인 겨울이라 전선이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전선에서 야마구치를 공격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선에는 평소에 해병이 1개 소대씩 배치되어 있고, 오늘은 2연대 병력을 전선에 나눠 싣고 왔다. 어제 오늘 전투에서 모리 군이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으므로 2연대를 보내면 도시 하나쯤은 간단히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2연대를 상륙시킬 필요는 없었다.

“전하! 야마구치에서 연기가 치솟습니다.”

“드디어 여진 기병이 도착했군요.”

야마구치는 여진 기병에게 맡기고 고산국 함대는 계속 동쪽으로 항해해 호후 앞바다에 도착했다. 야마구치 남쪽에 위치한 호후(防府)는 나라 시대 스오(周防) 국의 정청인 고쿠후(國府)가 세워진 해안도시였다.

“함장! 모리 군이 전멸한 직후, 병력이 없을 때 주코쿠를 최대한 초토화시켜야 합니다. 주쿠코가 텅 비면 혼슈를 공격할 때도 편하고, 큐슈를 방어할 때도 적에게 군량 보급을 못해주게 됩니다.”

“예, 전하. 헌데 동쪽으로 이동하는 왜인 피난민들이 눈에 자주 띕니다.”

“늦기 전에 도망가는 게 좋겠지요.”

“기함에서 발포 신호가 왔습니다. 전령!”

함장이 부르자 전령들이 함수와 함미에 2문씩 배치된 함포를 향해 뛰어갔다. 곧이어 굉음이 울리며 진동에 배가 떨렸다.

함대는 전선 43척 중에서 간몬 해협에 10척을 남겨둔 33척에, 기관 수송선 25척으로 이뤄져 총 58척이었다. 함포 172문이 불을 뿜자 목조건물이 대다수인 오래된 도시 호후는 금방 불타올랐다. 함포를 몇 번씩 더 발사해 시커먼 연기가 나는 도시를 구경하는데, 잠시 후 언덕에서 여진 기병이 나타났다.

“기함에서 포격 중지 신호입니다!”

“포격 중지!”

좌승함에서 포격을 멈추고 기함을 따라 항구로 들어갔다. 이 시대 기준으로 거대한 편인 전선과 수송선 58척이 정박하기에 충분히 큰 항구가 있었다. 여진 기병들이 도시의 모든 가옥을 불태우거나 무너뜨리며 항구 방향으로 달려왔다.

“국왕전하! 상쾌한 하루입니다.”

“어서 오시오, 오 방어사.”

함경도 방어사 오응태가 좌승함을 방문했다. 어제는 밤이 늦어서 만나지 못했으나 오늘 작전회의를 좀 더 해야 했다. 여진 기병과 조선 기마병, 3연대 기병대대 병사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총함장 이순신과 2연대장 감동이 좌승함 집무실에서 열린 오찬 겸 작전회의에 참가했다.

“으하하! 새벽 일찍부터 1만 넘는 적과 전투를 세 번이나 하고 도시와 마을 수십 개를 불태웠습니다. 하루에 이렇게 많은 전투를 할 수 있다니, 정말 마음에 듭니다. 당장이라도 고산국으로 옮기고 싶습니다.”

“그건 이번 전쟁이 끝나면 결정하시오. 어때요? 여진 기병들이 오 방어사가 내린 명령을 잘 듣소?”

“그럼요! 제가 여진족들에게 전하의 위엄을 조금 많이 팔고 다녔습니다. 저한테 잘못 보이면 동해국에 가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줄 압니다. 그리고 이렇게 싸움을 많이 시켜주는 군주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진족 기병들은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묘하게 고생시킨다는 말로 들리오만.”

“천만에요! 여진족이나 함경도, 평안도 기병이나 제가 국왕전하 말씀만 하면 끔뻑 죽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다음 목표인 이와쿠니와 히로시마에 대해 논의했다. 호후에서 동쪽 150리가 이와쿠니(岩國), 그곳에서 북동쪽 100리 이내에 히로시마가 있었다. 문제는 이와쿠니와 히로시마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어느 쪽을 치든 다른 쪽에서 알아채고 방어태세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는 하기나 아키타카타보다 모리 가문의 새 거성이 위치한 히로시마가 주코쿠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히로시마를 먼저 공격하고 돌아오면서 이와쿠니를 치는 편이 좋겠습니다.”

평소에도 신중한 감동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오응태가 반대 의견을 냈다.

“두 도시 사이에 해안도로가 있어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고산국 함대와 여진 기병이 함께 움직이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하든 중간에 적의 매복이나 방어 같은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오나 전마가 지치면 만사휴의입니다. 새벽부터 계속된 강행군에 말들이 지쳐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2연대장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오늘 여진 기병의 전투는 사실상 끝났습니다. 서역의 한혈마가 하루에 500리를 간다고 합니다만, 보통은 하루 열 시간, 250리가 한계지요. 전투 중에 전력 질주를 많이 했으니 이미 한계가 왔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몇 시진 쉰다면 조금 더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오응태에게 여진 기병을 이끌고 오후 네 시에 이와쿠니에 도착할 수 있겠냐고 물으려던 이민호가 입을 다물었다. 이와쿠니를 초토화시킨 다음에 오후 여섯 시에는 히로시마를 공격하겠다고 말했으면 크게 창피 당할 뻔했다.

말의 최고 속도는 빨랐지만 말의 하루 이동 거리는 의외로 짧았다. 최고 속도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천천히 이동해야 하루 최대 이동 거리가 나올 수 있었다. 더 빠르게, 혹은 더 멀리 움직이면 지친 말들이 죽어나갔다.

“총함장님. 말과 기병을 모두 태우고 가야겠습니다.”

“예, 전하. 수송선이 25척이니 400마리씩 만 마리까지 가능합니다. 나머지는 전선에 태워야겠습니다.”

“오 방어사, 들었소? 여진 기병은 수송선에 태우고 조선 기병은 전선에 나눠 태우시오. 수송선은 여유가 있겠으나, 전선은 마구간 시설이 없는 경우가 있으니 태우기 전에 물어봐야할 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마 400마리씩 태우는 커다란 수송선이 있으니 정말 기상천외한 작전도 가능하겠군요.”

여진 기병을 수송선에 모두 태우고 나머지는 전선에 분산 수용했다. 함대가 다시 출항하기 전에 이민호가 오응태에게 물었다.

“전마가 몇 시간 쉬고 나서 다시 어느 정도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지요? 오 방어사가 보기에 얼마 정도나 달릴 수 있겠소?”

“서너 시간 쉰다면 천천히 100리는 더 달릴 수 있습니다.”

“좋소. 해 지기 전에 이와쿠니와 히로시마까지 공격합시다. 총함장님은 어떻습니까?”

“가까운 지역이니 같이 공격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히로시마는 오타 강 하류가 나눠지면서 삼각주 여러 개가 있습니다. 기병이 강을 건너려면 상류로 한참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히로시마 성에 포격을 가하면서 2연대를 동쪽에 상륙시킵시다. 오 방어사! 히로시마 성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으니 괜히 기병으로 점령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걱정 마십시오. 공성전보다는 시가지를 불태우는 게 훨씬 재미있습니다.”

오응태는 여진족과 거의 비슷한 성격이었다. 이민호가 동해국에 처음 시장을 세울 때 함경도 기병 겨우 10여 기로 적지나 다름없는 여진족 지역을 마음껏 드나들 때부터 알아봤었다. 그러나 바로 그 터무니없는 용기 덕택에 여진족 기병들이 오응태를 믿고 따를 수 있었다.

함대는 오후에 야시로(屋代) 섬 사이의 해협을 지나 이와쿠니 앞바다에 도착했다. 도시가 예상보다 작아서 함포를 쏴서 시가지를 불태운 다음 여진 기병은 도시 북쪽 해안에 상륙시켰다.

여진 기병들은 수송선에서 내릴 때 사흘 치 군량과 말먹이 콩, 그리고 건초를 나눠 받았다. 말 엉덩이에 짐을 가득 싣자 전마가 아니라 짐말처럼 보였다. 준비를 마치자 오응태가 여진 기병을 이끌고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함대는 여진 기병의 이동 속도에 맞춰 이동했다. 여진 기병들은 바닷가 마을들을 불태우며 서서히 히로시마로 전진했다. 양쪽에 육지를 두고 만 깊숙이 들어갈수록 이민호의 불안감이 높아졌다.

- 쿠쿵!

한겨울의 히로시마, 늦은 오후에 58척의 함대에서 함포를 쏘아댔다. 히로시마 성은 바닷가가 아니라 오타(太田) 강 하류의 물길이 복잡하게 얽힌 곳에 세워져 있었다. 성까지의 거리가 멀어 함포를 직사로 갈길 수 없어 이민호는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6km 거리에서 3인치 함포를 발사해 가로 세로 200미터 정도의 사각형 지형을 명중시키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히로시마 성은 완공하고 나서 겨우 몇 달 지나지 않아 공격을 받게 되었고, 공격을 받자마자 바로 불타올랐다.

여진 기병을 중심으로 한 1만여 기가 히로시마 서쪽에 몰아닥칠 때 2연대 병력은 히로시마 동쪽 해안에 상륙했다. 모리 가문의 새로운 근거지가 된 히로시마 성은 포격이 시작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끝장이 나버렸다. 성벽 모서리의 아래쪽 주춧돌이 빠져 나가면서 성벽 한쪽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성 안의 모든 건축물에 포탄이 날아가 명중했고, 일부 건물은 맹렬한 화재를 일으켰다.

예상대로 히로시마에도 방어병력은 거의 없었다. 창병 방진을 중심으로 철포병과 궁병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왜군의 진형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히로시마 성이 불탄 이후 함대가 시가지에 포격을 하는 동안 여진 기병들도 열심히 목조 가옥들을 무너뜨렸다. 주춧돌 위에 세워진 기둥에 밧줄을 걸고 말 몇 마리가 끌어당기면 기와집이라도 쉽게 무너졌다.

여기에 불을 지르면 아주 잘 탔다.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이후 히로시마에 살던 일본인 백성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여진 기병들도 일부러 쫓아가서 죽이지 않을 정도로 민간인 학살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여진 기병은 듣던 것처럼 정말 무섭군요. 전하께서는 저런 잔인한 자들을 백성으로 거둬주실 건가요?”

“그런 문제가 좀 있지만, 문명인으로서 야만인들에게 교화를 베풀어줘야 하지 않겠소?”

좌승함의 관측실에는 이민호 외에 주상아 공주와 비올레타가 올라와서 전투를 구경하고 있었다. 주상아 공주가 힐난하자 이민호는 신념과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화주의는 명나라 사람들이 먼저 주창한 것이니 주상아 공주가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너무 걱정 마시오, 공주. 저들 여진 기병은 고산국이 아니라 동해국, 그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정착시킬 예정이오. 앞으로 명나라와 충돌할 일이 없을 내가 장담할 수 있소.”

“전하께 위험하지만 않으면 상관없어요. 허나 대명 제국은 저들 여진족 때문에 오래지 않아 무너질 거여요. 여진족이 직접 북경을 침공하지 않더라도 저들이 일으키는 소요만으로도 대국이 감당을 못하고 있어요.”

순종적이던 평소 인상과 달리 주상아 공주는 오늘따라 회한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구중궁궐에서 평생을 살아온 여인도 고국의 암울한 미래를 예상할 정도로 명나라는 급속도로 망조가 들었다. 황제가 이렇게 국정이 돌아가도록 조장하는 한 명나라의 운명을 돌이킬 가망이 없었다.

“공주 당신의 부황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아무 일이 없을 것이오. 내가 당신의 고향을 지켜주겠소.”

“감사해요.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부황이 제대로 정치를 했더라도 대명은 조만간 망할 때가 됐을 뿐이니까요. 거대한 국가인 만큼 자체의 무게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고 말겠죠. 제가 억지로 부황을 변명해준 것은 아니에요.”

중국은 통일과 분열을 반복했다. 중국 왕조가 대체로 300년도 못 가는 이유를 단순화시킨다면, 건국 후 세월이 흐르면서 농업생산의 수단인 토지가 일부 계층에 과도하게 집중된 탓이라고 볼 수 있었다.

농지에서 유리된 농민이 많아질수록 사회 안정성을 크게 해치기 마련이었다. 명나라는 지속적으로 여진족의 공격을 받는 중에도 끝까지 버티다가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되면서 허망하게 멸망했다.

명나라 황실이나 고관대작들 입장에서는 외적의 침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세금 좀 더 걷었다고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배신감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힘겹게 살아오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된 농민들의 마지막 선택이 반란이었다. 기득권층과 달리 나라를 지키나마나 이익이 없고 당장 죽게 생겼으니 차라리 나라를 뒤집어엎는 편이 농민들이 생존할 가능성이 높았다.

“전투는 끝났소. 이제 돌아가서 쉽시다. 조만간 관백이 사신을 보낼 것이오.”

주코쿠 지방의 새로운 중심이 된 히로시마는 철저히 파괴됐고 특히 여진 기병들이 초토화 작전에 투입된 서부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마치 원자폭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혹시 전하께서는 이것으로 일본 정벌을 끝내실 생각이신가요?”

“분명히 말하지만, 아니요.”

히로시마의 해안 일대를 불태운 2연대 병력이 다시 전선에 탑승했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 조선 기병, 그리고 3연대 기병대대는 오응태의 지휘를 받아 북쪽으로 떠났다. 앞으로 며칠 동안 동해에 접한 혼슈 북서쪽 해안 도시들이 날벼락을 맞게 될 운명이었다.

고산국 함대는 빠른 속도로 히로시마 만을 빠져 나왔다. 연합군이 떠난 히로시마 땅에는 다른 지역처럼 한자와 일본어로 포고령이 적힌 팻말 몇 개만 남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명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고산국왕이 지휘하는 대명 제국, 조선국, 고산국, 유구국, 섬라국, 동해국 연합군이 조선을 침략했던 모리 가문을 징치했다. 주코쿠 지방에 사는 일본인들은 즉시 전 재산을 갖고 이 지방에서 퇴거하라. 이 포고령을 무시하고 계속 이곳에 거주하는 자들은 필시 목이 베이거나 노예가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 작품 후기 ============================

아슬아슬하게 오전이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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