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36화 (285/1,000)

00336  38. 큐슈 점령  =========================================================================

간몬 해협 요새 안쪽에 세워진 야전병원에 이민호가 방문했다. 병원에 입원한 사상자는 하카타 서쪽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한 여진족 몇 명, 무라카미 수군과 해전을 벌일 때 조총탄이나 일본 화살에 맞은 조선 수군 몇 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야전병원에는 군의와 의사, 간호사가 환자보다 더 많았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것에 대비해 고산국에서 개업한 민간 의사들을 많이 초빙해왔는데 다들 놀고 있었다. 마카오 대학 의학부 학생들이 총상과 자상 환자 치료 실습을 하기 위해 큐슈까지 왔는데 이들도 환자가 부족해 실습은 못하고 지금은 강의실에서 교수에게 수업을 듣고 있었다.

간호사들도 고산국 왕도에 있을 때는 정신없이 바빴으나 여기서는 그 동안 밀린 잠을 자는 식으로 휴식 기회로 활용했다. 하도 바빠서 눈 밑이 검게 변했던 간호사들이 이곳에 와서는 잠을 많이 자서 미인이 되어서 좋다고 난리였다.

“국왕전하! 환자가 부족합니다.”

이민호가 의학도들에게 건의할 것이 있냐고 물었더니 실망했다는 듯이 하는 소리가 저랬다. 그렇다고 의학도들의 교육을 위해 환자를 억지로 늘릴 수는 없었다.

“왜인들 중에 부상자 외에 다른 병에 걸린 환자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치료해주면 국왕전하께서 자비롭다는 소문이 큐슈 전역에 퍼질 것입니다.”

“솔직히 환자가 필요하다고 말해.”

“그야 그렇습니다만. 저희들이 왜인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치료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의사와 간호사, 의학생들이 돌아다니면 신변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대들을 호위해줄 정도로 병력이 남아도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왜인 치료용 병원을 이곳에 개설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본에 소수 있는 한의사들의 치료 방법과도 많이 다르잖아. 게다가 의사들 중에 서양인들이 많이 섞여 있어서 도깨비 취급 받기 딱 좋을 거다. 환자들 중에서 사망자가 나오기 마련이야. 그 뒤부터는 그 병원에서 왜인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한다는 으스스한 소문이 나겠지.”

“흐익!”

조선 도깨비와 달리 일본 도깨비는 인간들을 해치는 요괴에 더 가까웠다. 용모가 다른 서양인이 포함된 의사들이 칼과 가위를 들고 환자들을 대하면 일본인들이 어떤 상상을 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대규모 전투가 여러 번 발생했다는데 어째서 포로가 많이 없는 것입니까?”

“포로 환자라도 살피게? 포로는 주로 큐슈 북서부에서 잡혔고, 그쪽에 포로수용소가 있다. 동부에서 활동하는 여진족들은 포로를 잡지 않거나, 종으로 쓰거든. 나고야 쪽 야전병원에 지원 간 의사들도 놀기는 마찬가지니까 기대할 필요없다.”

이민호는 오응태에게 기병들이 개인적인 전과를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지시했다. 조선에서 명나라 북병 소속의 여진족 기병, 소위 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왜인 백성의 목을 쳐서 머리를 반질반질하게 깎아 사무라이처럼 위장해서 수급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여진족은 조선이나 명나라 군인들에 비해 잔인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익이 있을 때 이야기지, 평범한 왜인 농부들이 빈털터리라고 판단하면 못 본 척 지나가는 경우도 흔했다.

물론 기분에 따라 비무장한 왜인들을 쳐 죽이고 다니는 여진족도 있었다. 그러나 전염병 발생을 우려해 작전 지역 내에서 발생한 시체를 땅에 묻으라는 명령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귀찮아서 왜인들을 살려두었다. 여진족 기병마다 밥해주고 말을 돌볼 왜인을 하나씩 챙기고 나서는 더 이상 포로도 잡지 않았다.

“전하! 산으로 피난을 떠난 왜인들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라 식량입니다. 산마다 왜인들이 가득 숨어 있으나 그들이 휴대한 식량은 금방 떨어질 것입니다.”

마카오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포르투갈인 전도사가 명확한 조선말로 이민호에게 건의했다. 마카오에 고산국 학생들이 많아 요즘은 포르투갈 인들이 거꾸로 조선말을 배우는 추세였다. 가급적 외국어를 제대로 배우라고 마카오에 대학을 세워놓았더니 기대했던 것과 반대로 마카오의 고산국화가 가속화되어 버렸다.

“지금도 병참선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데 왜인들 식량까지 해결하라는 건가요?”

“전쟁 중에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을 굶겨죽이면 전하의 평판이 많이 떨어져 큐슈를 지배할 때 문제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세계 어딜 가나 그렇듯이 농민들이 집이나 주변에 식량을 숨겨두고 있을 테니 왜인들의 통행제한을 풀어주시옵소서.”

“전쟁이 시작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점령지 주민들의 자유 통행을 허용한단 말이오? 왜구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지 않소? 왜인들은 언제든 무기를 들고 일어날 자들이오.”

현재는 주요 도로 교차로에 검문소를 설치해 병력 약간씩을 파병해두었다. 왜인들은 어느 방향이든 검문소를 넘어갈 수 없었다. 상업과 물류가 마비되니 전체 큐슈 주민들의 생활이 당장 압박 받았다.

“큐슈에서 전도를 하는 선교사들에게 들어보니 전쟁에 관심 없던 왜인들 사이에 불만이 쌓여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굶어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알았소. 신부님의 의견을 받아들여 예정보다 일찍 통행 제한을 풀겠소. 마을로 돌아와 살고 밭이나 숲을 왕복해도 좋다고 포고령을 내리겠소. 그러나 전선 쪽에서는 통행금지령이 여전히 유효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전하. 그것만으로도 왜인들이 전하의 관대함을 칭송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건의를 받아 적당히 조금씩 규제를 풀어주었다. 현재 큐슈를 절반 이상 점령하고 나자 전투보다는 점령지 행정이 더욱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민호는 고산국으로 급히 편지를 보내서 필리핀에 가 있는 정문부를 큐슈로 불러들였다.

병사로 징집되지 않은 일반 왜인들이 이번 전쟁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원정군의 침공을 전국시대 내란과 똑같이 취급해 이번 전쟁이 일반 백성들과 관계없다고 보고 평상시 생활을 유지하는 부류였다. 전투가 벌어진 지역 언덕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구경했던 바로 그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은 명군이나 여진 기병에게 호되게 당한 다음부터 연합 정벌군 병사들을 만나면 잽싸게 숨어들었다.

두 번째는 조선군이 심하게 보복할 것이라고 예상해 처음부터 피난을 떠난 경우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왜인들이 좀 더 많았는데 문제는 큐슈 점령 작전에서 주력을 맡은 명군과 조선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요 도시와 도로가 정벌군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자 왜인들이 공포에 빠져 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식량이 떨어져 가는데도 길이 막혀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피난을 일찍 떠났던 일부 왜인들은 남부여대하고 원정군의 전진에 맞춰 남쪽으로,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사실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부류였다. 이 피난민들은 원정군과 왜군, 그리고 현지 주민들로부터 공격과 약탈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만약 남쪽 사쓰마로 간다면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큐슈 북동쪽 지역 분고에서 일만에 달하는 젊은이들이 간몬 해협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왜인 대표랍시고 몇 명을 뽑아 이민호를 알현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사무라이 복장을 입고 에스파냐 귀족처럼 목에 주름 깃(pleated collar)을 두른 사무라이가 발언했다. 이민호는 주름 깃을 보고 자동차용 원통형 필터를 떠올렸다.

“전하! 저는 시몬이라 하는 낭인 무사이며 다른 이들은 분고 지역의 기리시탄 무사와 백성들입니다. 저희들도 성전에 참가하게 해주십시오.”

“이번 전쟁이 성전이라니? 도대체 누가 그래?”

일본인 천주교인들이 헛소문을 듣고 거병해서 정벌군을 돕겠다고 나섰다. 이들 때문에 이민호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명군에 가담한 자들도 이들과 비슷한 헛소문을 듣고 오직 종교적 열정만으로 일어난 자들이었다.

“고산국왕 전하는 건국 초부터 기리시탄들을 보호하고 성당도 세워주신 것으로 압니다. 선교사들의 본거지인 마카오를 경제적으로 돕고 마닐라를 이교도 해적들로부터 세 번이나 구해주셨습니다. 천주교를 탄압하는 관백과 태합을 정벌하러 국왕전하께서 일본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남만인 선교사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끄응. 그건, 그렇다. 그러나 로마가 멀어서 교황 성하로부터 성전이라는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 함부로 성전이라는 거룩한 말은 삼가도록 해라.”

간몬 해협까지 몰려온 1만여 왜인들이 혹시나 반란이라도 일으킬까봐 일단 성전과 비슷한 것이라고 해두었다. 도대체 어떤 선교사가 그딴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지 이민호는 그 선교사의 낯짝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런데 기리시탄 사무라이의 반응이 한 술 더 떴다.

“과연 그렇군요. 성전이 아니더라도 전하께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고 큐슈에 지상 낙원을 만들어주십시오. 기독교 왕국 건설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습니다!”

“그게 뭐야!”

전쟁을 일단 시작했다면 적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신념이었다. 만약 큐슈에 상륙하기 전에 천주교도들을 배후 조종할 수 있었다면 훨씬 쉽게 큐슈를 점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전에는 섣불리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민호는 일만여 천주교도들을 간몬 해협에서 남동쪽 100리 거리인 나카쓰(中津)에 배치했다. 왜군의 갑옷과 무기는 전쟁터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모은 전리품은 남아돌았다. 천주교도들에게 이것들을 주어 무장시키고 고선국왕의 깃발인 태극기를 주어 군기로 삼게 했다. 통역 병사 몇 명을 배치하고 여진족에게도 통보해 같은 편끼리 싸우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보급 소요가 늘어나겠군요.”

“저들에게는 쌀만 주면 돼. 그것도 명군이나 조선군의 3분의 1만 줘도 되니까 다행이야.”

민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영은 키가 크고 평소 운동량이 많아서 남자 병사들만큼 먹는 편이었다.

“키가 작더라도 그래도 남잔데 겨우 그것만 먹고도 살아요?”

“왜인들은 적게 먹잖아.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나도 몰라.”

해안에 주로 위치한 왜성들을 공격하면서 처음부터 완전히 불태운 곳도 있었지만 여진 기병들이 공격한 곳은 본격적인 전투 전에 항복한 경우도 꽤 많았다. 전쟁에서 노획품으로 가장 많은 것은 역시 군량이었고, 군량에 여유가 생겼으니 일단 그 군량을 천주교도들에게 돌렸다.

“큐슈를 계속 점령하기에는 군비가 너무 많이 든다고 하셨죠? 저들을 고용하면 어떨까요?”

“너무 많지 않아?”

“명군에 속한 천주교도가 3만, 이곳에 1만이에요. 전쟁이 끝나면 절반 이상이 집으로 돌아가겠죠. 2만이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수준이에요. 월봉을 주지 않고 사무라이나 아시가루처럼 땅만 분배해줘도 충분할 거여요.”

고산국이나 명나라에서 왜군과 같은 전력을 갖추려면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다. 물론 갑옷과 무기는 물론 병영과 수영 유지비까지 군인과 보인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조선보다는 유지비가 비싸게 먹혔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자칫 큐슈 주민들 전체가 강제로 천주교로 개종될까봐 걱정이야. 종교는 적당히 분산되는 편이 나아.”

“큐슈에는 신도와 불교의 교세 또한 강해요.”

“그래. 생각해보자. 저들의 종교적 열정이 다른 종교에 대한 횡포로 변질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나 기독교 다이묘가 절을 때려 부수거나 절에서 스님들을 내쫓은 다음 천주교회로 만든 사례가 바로 큐슈에서 있었다. 기독교 왕국을 꿈꾸던 오토모 소린이 절과 신사를 부순 행위는 휴가 지역에 국한됐고 불교의 교세가 오토모를 배격했던 탓이라는 다른 이유를 들먹이기도 했지만 절과 신사를 파괴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틀 후, 조선군 사이를 왕복하는 전령이 간몬 해협에 도착했다. 이민호가 전령을 직접 불러서 물어보았다. 모리군의 공격을 하릴없이 기다리는 동안 이민호는 지겨워서 미칠 것 같았다.

“조선군이 잘 싸우지 않는다고 들었다. 과연 그러한가?”

“그 동안 명군이 막아서 조선군은 제대로 싸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조선에서도 명군이 조선군을 막은 사례가 많지 않습니까?”

연합군 중에서 조선군은 다른 군대와 동등했지만 오직 명군 앞에서는 많이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독 유정은 명령권도 없는 주제에 조선국 도원수 이항복에게 명령을 내리곤 했다. 주로 적을 앞두고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는 대기 명령이었고, 그 명령만큼은 이항복이 아주 잘 받아들였다. 오히려 이항복이 제독 유정을 화려한 언사로 조종하고 있지 않나 의심스러웠다.

“지금은 어때?”

“구마모토와 우토를 점령한 다음 조선군은 남서쪽 사쓰마로, 명군은 남쪽 오스미로 향했습니다. 각각 따로 전진하고부터는 조선군이 매일 같이 전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고산국 포병이 배치돼서 성이 한나절에 하나씩 함락되고 있습니다.”

남동쪽 휴가는 여진족 기병들이 공략하고 있었다. 이쪽에 3연대 기마대대는 물론 바다에서는 10여 척의 전선들이 함포 사격을 가해 여진 기병들의 공격을 도왔다.

“그래? 도원수가 싸움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었나?”

“도원수 백사 대감이 전투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수들과 병사들은 왜군을 원수로 대하며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병사들 대부분이 복수하기 위해 일본 땅에 건너온 자원자들이니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끄응!”

광해군의 성향으로 볼 때 이익이 없으면 군대를 파병하고도 얼마든지 태업을 지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사르후 전투에서 강홍립의 항복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광해군이 밀지를 내렸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은 딱히 태업의 증거를 잡아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백사 이항복은 이 시대 천재 중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몽땅 명군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명군과 분리돼 독자적으로 전진하게 되자 아주 빠르게 왜성을 점령하며 남진하고 있었다.

“사람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결과로 판단해야겠지. 조선군이 명군보다 먼저 목표를 달성하길 원한다고 백사 대감께 전하라.”

“구두로 말입니까?”

“쳇! 명령서를 써주겠다. 조선국 도원수에게 전달해라.”

모든 군사와 행정 행위에서 문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사람은 이민호였다. 이민호가 먼저 스스로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전투현장에 주인공이 안 가니까 묘사하기 어렵군요.

이번 편은 끝났고 다음 회부터 새로운 편입니다.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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