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33화 (282/1,000)

00333  38. 큐슈 점령  =========================================================================

다음 날 고산국 함대는 아침 일찍부터 큐슈 북동쪽 해안선을 돌아다니면서 해안에 세워진 왜성들을 공략하고 나섰다. 겐타로가 이미 자세한 해도를 작성하고 공격목표의 위치도 조사해두었으므로 함대는 편하게 공격에 임할 수 있었다.

“니시무라 씨와 총함장님은 너무 꼼꼼하시단 말이야.”

“그래서 불만인가요, 주인님?”

“아니! 절대로 아니야. 편하고 좋잖아.”

이민호는 함교에 편히 앉아서 함대가 해안의 성곽과 시가지를 함포로 공격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서 반건조 오징어를 뜯는 이민호를 민영이 얄미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민영이도 오징어 나눠줄까?”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어요. 죽고 죽이는 전쟁 중에 주인님만 너무 여유를 부리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들 보기에 창피할까봐? 걱정 마. 내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 더 빨리, 효과적으로 끝낼 수 있어.”

큐슈 북동부 부젠국 나카쓰(中津) 성이 고산국 함대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다. 행주대첩 때 포로로 잡혀 북경으로 끌려간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아버지,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가 성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풍신수길의 군사로서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다가 오히려 주군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받게 된 걸출한 인물이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크리스천 다이묘로서 돈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을 사용하다가 1587년 풍신수길이 기독교 금령을 내렸을 때 신앙을 버렸다. 1589년에 아들에게 직위를 물려주고 조스이칸(如水軒)이라는 호를 사용하다가 아들의 죽음과 함께 다시 복귀했다.

며칠 전에 나고야로 보낸 성의 주력 병력이 하카타를 지나다가 여진 기병에게 전멸 당했기 때문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급히 돈을 주고 백성과 낭인들을 고용해 일만 명을 수하에 두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으로 참가한 아들이 병력을 이끌고 성을 나서자 요시타카는 재산을 풀어 급히 끌어 모은 군세를 이끌고 오토모 요시무네 군을 격파한 다음 서군에 속한 주변 8개 성을 짧은 시간에 줄줄이 함락시켰다.

야마쿠니 강의 하구 삼각주 건너편에 세워진 성이 집중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1575년 오다 가문에 반란을 일으킨 아리오카 성에 항복 교섭을 하러 갔다가 토굴에 일 년 동안 갇힌 탓에 그 후로는 걷지 못했다. 가마를 타고 급히 성을 빠져 나가려던 요시타카의 머리 위에 포탄 한 발이 떨어져 가마꾼들과 함께 폭사했다.

“주인님! 포구에 배가 한 척도 없어요.”

“그래. 히로시마에 몰려간 모양이야.”

눈썰미가 좋은 민영의 말에 이민호가 해안선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작은 어선 한 척 남아있지 않았다. 모리 가문이 도대체 히로시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나카쓰 성이 무너지자 함대는 동쪽으로 15km 이동해서 우사 앞바다에 멈춰 다시 함포를 쏘았다. 고산국 함대의 포격을 받은 우사(宇佐) 성은 낡은 형식의 성이며 내부에 목조건물이 너무 많아서 금방 불타올랐다.

함대가 성에 이어 성하마을에 한창 포격을 하는 중에 북서쪽 해안에 대규모 기마병 집단이 나타났다. 민영이 기쁜 목소리로 이민호를 불렀다.

“주인님! 여진 기병이 왔어요!”

“저게 2만 3천 맞나? 기병이라 그런지 어마어마하게 많아 보인다.”

함대는 우사성의 성하마을에 더 이상 포격을 할 필요가 없었다. 2만여 기병이 쓸고 지나가자 대부분 목조건물인 민가는 다 쓰러져 불타고 심지어 주춧돌까지 뽑혔다. 이민호가 해안도시는 특히 철저히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더니 오응태와 기병들이 아예 쑥밭을 만들어버렸다.

함대와 여진 기병이 바다와 땅에서 다시 움직였다. 부젠국보다는 분고(豊後) 지역에 공격 목표가 훨씬 많았다. 높은 산이 즐비하고 평야가 해안에 몰려있는 지형이라 해안에 세워진 성채가 많은 탓이었다. 고산국 함대는 다카다(高田)부터 차례로 부숴나갔다. 역시나 어선이 없는 포구의 선착장 시설도 함포로 부쉈다.

함대는 민간인 거주지역이라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민가는 물론 겁에 질린 왜인들이 피난을 떠나는 행렬에도 어김없이 포탄 한두 발이 날아갔다. 고산국 함대의 계속된 파괴에 질린 비올레타는 가만히 있다가도 민간인 학살을 두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민호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왜인들을 백성으로 삼으실 예정이 아니었나요? 이렇게 의미 없이 죽여 버리면 나중에 왜인들이 불만을 품을 텐데요.”

“일단 나는 왜인들을 죽여도 좋다고 지시한 적은 없소. 다만 막지도 않을 것이오. 이럴 때 우리의 힘을 과시해서 왜인들에게 극복할 수 없는 힘의 차이를 확실히 알려주는 일이 필요하오. 그래야 왜인들이 나중에 반항을 못한다오.”

“마치 주인이 누군지 서열을 인식시켜줘야 하는 강아지처럼요?”

“죽은 자들에게는 안 됐소만 왜인들 특성이 그렇소.”

조선인들은 강하게 억누를수록 반발이 더 커지는데 반해 왜인들은 위축되고 오히려 충성하는 경향이 심해졌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이 점령지에서 유화책을 쓸 때에는 조선 백성들이 의병에 참가하는 경우가 적었다가 왜군의 점령지 정책이 백성들에게 가혹해질수록 의병 참가자가 늘어난 사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일본은 점령군인 미군에게 간이며 쓸개까지 다 갖다 바칠 정도로 복속했다.

오후에 구니사키 반도 남동쪽 기쓰키 앞바다에 함대가 도착했다. 기쓰키(杵築) 성은 오토모(大友) 일족, 기쓰키 요리나오(木付頼直)에 의해 1394년에 건축된 작은 성이었다. 성은 해안 언덕에 세워져 있어 함포로 공격하기 아주 이상적이었다.

함포 사격이 시작되자마자 성벽이 무너지면서 성의 잔해가 언덕 아래로 휩쓸렸다. 함대는 남북 양쪽 언덕의 사무라이 거주지와 언덕 사이에 밀집한 상가에도 포탄을 퍼부어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 다음 남서쪽 이시가키바루(石坦原)에 도착했다. 현대의 온천 도시 벳푸(別府)가 되는 해안지대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긴 별 거 없네.”

“저 하얀 연기는 뭐죠? 혹시 왜군이 불을 지르고 도망갔나요?”

민가가 있는 곳에 함대가 포격을 하는 사이 민영이 산언덕을 가리켰다. 이민호가 아까 확인했던 곳이었다.

“지옥이라고 하지. 여기저기 다 온천이야.”

“어머! 어머!”

“온천에 가고 싶어?”

고산국 왕성 북쪽 처음으로 유황을 채굴했던 곳 근처에 온천이 있어서 후궁들이 가끔 단체로 가서 쉬고 오기도 했다. 특히 여진족 출신 호위들은 힘겨운 훈련을 마치고 피로를 푸는 곳으로 온천을 아주 좋아한다고 들었다.

“가면 좋겠지만 전쟁 중에 그런 호사를 바랄 수는 없잖아요.”

“그런 호사를 누릴 수도 있지. 며칠 지나서 시간을 내보자.”

벳푸에는 온천이 하도 많아서 대충 아무 땅이나 파도 온천수가 쏟아지는 곳이 많았다. 이민호는 섭씨 98도의 뜨거운 물에서 목욕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냇물과 연결하면 적당한 온도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새벽 곤히 자는 이민호를 민영이 깨웠다. 곁에서 자던 주상아 공주가 어느새 일어나 이민호가 입을 군복을 다림질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졸린 눈으로 양치질을 하는 사이 민영이 요약해서 보고했다.

“하기에서 출항한 왜군 함대 수백 척이 간몬 해협으로 남하 중이에요. 조선 삼도수군이 출동하면서 주인님께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보냈어요. 그래서 총함장님이 함대를 출동시켜 지금 간몬해협으로 향하고 있어요.”

“수백 척이나 온다고? 알았어. 지금 세 시지? 인간들이 잠 좀 자면서 싸울 것이지 말이야.”

거제도에서 폭발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원정 개시일 전 날부터 병사들이 잠이 부족해 헤매고 있는 판에 야습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야습은 방어자가 언제든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였다.

간몬 해협 바로 북쪽 시모노세키부터 그 주변이 나가토(長門) 국, 그 동쪽이 스오(周防) 국이었다. 두 지방은 메이지시대에 합해져서 조슈번이 된다. 가까운 두 지역에서 언제든 간몬 해협을 공격할 수 있어서 탐망선들이 감시를 집중하고 있었다. 왜군 병력이 배와 함께 집결한 곳은 히로시마인데 아직 출항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혼슈 서쪽 지방인 주고쿠(中國)는 6국 120만 석의 대영지이며 1591년에 히로시마 성으로 거성을 옮긴 모리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다. 나가토는 혼슈 서부인 주고쿠 지방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구니(國)였고 동해 연안에 위치한 하기(萩)는 나가토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경제적 중심지는 간몬 해협 북쪽인 시모노세키였지만 고산국과 조선 함대의 공격으로 완전 초토화가 됐다.

“기침하셨습니까, 전하?”

“안녕하시오, 함장?”

세수하고 나온 이민호가 함교에 도착해 주변을 살폈다. 상현달에 비친 바다가 온통 금색으로 출렁거렸다.

“동해 쪽에 왜선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다니 놀랐소. 전에 혼슈 북쪽 해안을 돌면서 왜선들을 잡지 않았소?”

“유야 만과 오미 섬에서 왜선 몇 십 척을 격파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기라는 지역은 강 하구가 육지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그곳에 왜선들이 숨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모리 가문에 협력하는 무라카미 수군 배 수십 척이 며칠 전에 간몬 해협을 서쪽으로 지나 북쪽으로 올라갔다는데 바로 이곳 하기에서 모인 모양입니다.”

이 시대에 바닷가 포구 외에 강 하구에 자리 잡은 강상 포구도 흔했다. 방파제를 쉽게 만들 수 없던 시절이라 풍랑에 배가 휩쓸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무가 민물에 썩는 것을 각오하는 편이 나을 수 있었다.

전국시대부터 모리 가문을 따라다닌 것은 무라카미 수군 중에서도 이요의 노시마에 근거지를 뒀던 무라카미 타케요시의 세력이었다. 세토 내해의 인노시마(因島) 무라카미는 근거지에 그대로 남았고 구루시마 해적은 조선에 두 번이나 파병 갔다가 그때마다 이순신에게 몰살당했다.

“수백 척이라 해도 대형 왜선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던데 우리가 괜히 지원하러 가는 것 같소.”

“전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아군이 많아야 피해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무찌르는 것은 무장으로서 자랑할 일이지만 지휘관으로서는 잘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전하이십니다.”

“그렇지요. 확실히 이기는 편이 좋소. 그리고 괜히 적선을 남겨뒀다가 오랫동안 숨바꼭질할 필요 없소. 한 번 싸울 때 아예 박살을 내놓아야 합니다.”

고산국 함대가 간몬 해협을 통과하면서 해협 좌우에 배치된 아군과 불빛 신호를 주고받았다. 이곳처럼 높은 산에서 포를 쏴댄다면 해수면 위를 지나는 배 입장에서는 맞대응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함대가 간몬 해협 서쪽 출구를 빠져 나왔다. 우마시마와 무쓰레시마를 지난 함대는 북쪽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서두른 덕에 조선 수군 함대가 한창 전투 중인 후타오이시마(蓋井島) 근해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 퍼벙! 펑!

넓게 학익진을 펼친 판옥선 100여 척에서 연속 대포를 쏴댔다. 이민호는 당연히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해전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300여 척이 넘는 왜선들 대부분이 작은 고바야에 불과했고, 조선 수군이 문제없이 때려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선두에 선 세키부네 10여 척이 판옥선에서 쏜 대포를 연신 얻어맞고도 끄떡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얼씨구? 꼴에 장갑함이네.”

무라카미 수군이 동원한 배는 철갑선은 아니고 외부 판재를 얇은 철판으로 두른 것에 불과했다. 이것은 적의 화공에 대비한 것이지 철판으로 방어력을 보강한 것은 아니었다. 저 세키부네 10척은 상장을 만들 때 두꺼운 판재를 썼다는 결론이었다.

“기함에서 불빛 신호입니다. ‘전체 함대는 전방의 대선 10척을 공격하라.’입니다. 좌승함도 포격에 참가하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하시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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