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2 38. 큐슈 점령 =========================================================================
이민호는 나중에 남병들을 통해 이 날의 전투를 상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요동 기마병들이 선발로 이동 중에 왜군에게 포위 공격을 받아 고전하는 동안 남병이 도착해 왜군의 포위망을 뚫고 구원해줬다고 한다. 북병 사상자가 3천 명이니 5천 명이니 말은 많았으나 정확한 인명 피해는 다들 입을 다물어서 알 수 없었다.
남병과 북병이 서로 시기하는 사이였으므로 완전하다고 할 수 없어도 이민호는 대략 감이 잡혔다. 딱 벽제관 전투의 재판이었다. 남병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려고 조급해진 요동 기마병의 무분별한 진격이 항상 문제였다. 적지에서 이동하는 중에 매복 공격이나 야습을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 치더라도 거의 매번 당해 습관화될 정도라면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유 제독은 남병 출신이 아닌가? 북병 장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나?”
“그, 그것이......”
명군 전령이 우물쭈물하자 이민호가 노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같은 편끼리 경쟁의식을 갖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 전쟁 국면을 망치는 수준이라면 제대로 통제해줘야 했다. 그러나 유정은 카리스마 넘치는 겉모습과 달리 거친 성정의 북병까지 휘어잡을 정도로 뛰어난 대장은 되지 못했다.
“유 제독에게 전해. 여차하면 여진 기병이나 고산국 기병 또는 보병을 지원해줄 수도 있다고.”
“그들이 막강하다 해도 천군은 무적입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나중에 발목만 잡지 말라고 해라. 계속 이런 식이면 북병을 후방 점령지역 경비에나 투입하겠다. 안전하고 편해서 좋겠지?”
이민호가 윽박지르자 전령이 잔뜩 기가 죽어 돌아갔다. 명나라 군대는 천군이라면서 자부심 하나만큼은 엄청나게 강했다. 그리고 명군 지휘부는 남병이나 북병이나 평소에도 허풍이 심해 이민호의 불안감이 커졌다.
명나라 남동 해안에 배치됐던 남병은 왜구를 상대하기에 최적화된 부대였다. 척계광은 저돌적인 왜구에게 겁먹고 겨우 수십 명의 왜구에게 수천 명이 도망가던 남병을 유기적이면서 강한 군대로 탈바꿈시켰다. 군율이 엄격하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도 줄어들었다. 명나라 후기에 대표적인 정예군이 남병인 척가군이었지만 왜군을 상대할 때는 화력이 약간 딸리는 감이 있었다.
요동과 만리장성에 주둔한 북병도 남병과 마찬가지로 정예군이었다. 커다란 전마에 두꺼운 철갑을 입은 기마병은 잘 싸울 때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싸웠다. 기마병 절반 정도는 한족이 아닌 몽골족이나 여진족 출신이라 용감하기로는 일반 한족 군대와 비교하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였다.
그러나 장점이 될 수도 있는 바로 그 인적 구성에 단점이 있었다. 북병은 유목민 기병들이 그렇듯이 싸움이 어려워지면 쉽게 도망가 버렸다. 그러나 도망가더라도 순수 유목민 기병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잘 빠져 나가는 반면, 한족과 유목민이 뒤섞인 북병은 도망가다가 몰살당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북병이 경기병이 아닌 무거운 갑주를 걸친 중기병이라 퇴각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이민호는 판단했다.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께서 강녕하셔서 소신은 무척 기쁩니다. 주군께서 소신을 위해 직접 배를 보내주셔서 영광이옵니다.”
“오랜만이오, 니시무라 씨. 잘 지내셨소? 그 동안 많은 일을 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직접 하고 싶었소.”
나가사키의 상인이며 미카의 아버지인 니시무라 겐타로가 이민호에게 절을 올렸다. 솔직한 그의 성품으로 인해 감정을 진솔하게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민호가 신뢰할 만한 극소수의 일본인들 중 하나가 겐타로였다.
그는 이민호가 보낸 탐망선을 타고 큐슈 북쪽 해안을 돌아서 간몬 해협까지 왔다. 큐슈 전체가 전쟁터가 된 판에 왜인이 안전하게 지상으로 이동하기 어려울 것을 감안해 이민호가 배를 보낸 것이었다.
“소신은 주군께서 시키신 일을 따른 것뿐입니다.”
“바쁘니 공치사는 그만하고, 왜군의 움직임을 평가해보시오. 여기 자리에 앉으시오.”
“주군 앞에서는 무릎 꿇고 있는 것이 편합니다. 관백이 항복사절을 조선 거제도에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명 황제의 부마이며 조선과 유구국의 보호자이며 에조 섬의 정복자인 고산국왕 전하께서 몹시 노해서 사신들을 참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토도 다카토라를 비롯한 사신들은 거제도에 억류돼 있소. 사무라이 한 명은 할복했소. 사신들이 항복이 아니라 휴전이나 종전 제의를 하지 않겠소?”
“그래서 관백이 큐슈의 정벌군 지휘부로 2차 항복 사절을 보낸다 하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물론 조건도 변경됐음이 틀림없었다. 출발 직전에 이민호가 사신단을 억류한 것은 정보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일본으로부터 더 좋은 항복 조건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다.
“조건은 뭐라 합니까?”
“만약 일본 정벌군이 큐슈를 정복할 수 있다면 정벌군의 영토로 인정해줄 테니 그 선에서 전쟁을 끝내자고 합니다.”
일본 관백은 고산국에게 큐슈를 떼어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 기회에 혼슈까지 공격하길 원했고, 관백이 큐슈의 다이묘들에게 저항을 그치고 정벌군에게 항복하라고 공식적인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일본의 세력 구도에서 그런 제안이 나온다는 것도 이상했다. 사실 관백이 큐슈의 다이묘들에게 항복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해서 과연 다이묘들이 그 명령을 따를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제안이 소문나면 큐슈뿐만 아니라 혼슈의 다른 다이묘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가신 역할을 하는 다이묘들을 보호 못해주면 주군 자격이 없다는 것이 일본의 관습 아니오?”
“그렇습니다. 쉽게 하극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모리 가문이 큐슈를 지원하는 것을 관백이 막지 못했습니다. 하기(萩)에서 수군 함대가 모여 조만간 간몬 해협을 지키는 조선 함대를 야습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또한 히로시마에 어선을 비롯해 모든 배를 긁어모으고 모리 군의 병력이 대거 집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기와 히로시마 앞바다에 수시로 탐망선을 보내 예의 주시하고 있소. 배가 많긴 한데 작다더군요.”
모리 가문은 조선에 병력을 대규모로 파병했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는 작은 아버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 등 조선에서 전사한 모리 가문의 가신들을 위해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전체적으로 화약이 많이 부족합니다. 몇 년 동안 축적했던 화약을 조선에서 다 사용했고 새로 생산한 분량도 태합이 독촉해서 조선으로 보냈기 때문에 본토에는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이나 철포병들이 사용할 화약이 일인당 20회 분량 미만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 반가운 이야기구려.”
지난 몇 년 동안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일본에 화약을 판매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본에서 필요량 전체를 자체 생산해야 했고, 고산국 함대가 걸핏하면 공격해서 얼마 안 남은 화약 재고마저 거의 소진시켜 버렸다. 대신 이민호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 했다.
“정벌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전비를 마련하느라 큐슈의 다이묘들이 영지민들을 또 다시 쥐어짰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금을 못 낸 영지민들의 어린 딸들이 일만 명 넘게 나가사키로 팔려왔습니다. 곧 큐슈 정벌이 끝날 것 같으니 처녀들의 의향을 물어보고 고향에 돌아가거나 고산국으로 가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좋겠소. 비용이 많이 들었을 테니 손실을 보전해주겠소.”
임진왜란이 시작된 뒤부터 이민호가 시키는 일을 하느라 나가사키에서 지출된 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러나 겐타로는 어떻게 해서든 이익을 내서 고산국으로 보내고 있었다. 이민호가 정보 활동하는데 쓰라고 보낸 자금도 이 고지식한 상인은 고스란히 다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제가 주군께 개인적으로 청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겐타로가 이민호에게 오체투지를 하며 울먹거렸다. 뭔가 들어주기 어려운 청이 있다고 감지했다.
“주군! 부디 불쌍한 일본의 백성들을 살려주십시오. 일본이 조선을 공격했으니 조선과 그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권리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자나 소수 다이묘들의 욕심에 의한 침략이었습니다. 사무라이들도 전공을 세우고자 무리하게 조선 백성들을 핍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디 죄를 지은 권력자나 사무라이 계급까지만 벌해주시고 일반 백성들은 살려주시길 이렇게 간청을 드립니다.”
“후우~ 니시무라 씨는 왜병들이 조선에서 한 짓을 알고 있소?”
사무라이나 병사들이 위에서 시킨 명령을 수행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조선 백성들에게 잔인하게 대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측은하게 여겨 풀어준 경우도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나쁜 놈이 있고 착한 분도 있게 마련이라서 평시의 일반 사회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영화에서 흔히 보듯이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눈이 뒤집힌 병사들이 적에게 잔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살육을 당한 조선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런 잔혹한 사례가 훨씬 강한 인상으로 남고 소문도 널리 퍼졌다. 전쟁 중에 가족을 잃은 조선 백성에게 물어보면 왜병은 물론 일반 왜인들도 살을 발라 씹어 먹을 만한 원수들에 불과했다. 유족에게 ‘적군 중에도 착한 사람이 있어요.’라고 말해봤자 욕먹거나 얻어맞기 딱 좋았다.
“알고 있어서 더욱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끄럽게 간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군!”
“다른 자가 청원했다면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오. 허나 니시무라 씨는 그 동안 외국인인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이오. 일본인에게는 배반자라고 할 수도 있는 니시무라 씨가 그런 청을 하니까 오히려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 같소.”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 국가 개념이 희미하고, 전체 일본보다는 특정 지방에 소속감을 더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해 그다지 충성심을 느끼지 못했다. 같은 일본인이라는 민족의식도 조선인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약했다.
조선에 갔다가 항복한 이후 조선을 위해 싸운 항왜들도 마찬가지였다. 항왜들은 일본 입장에서 배신자가 아니라, 새로운 주군 밑에서 열심히 일하는 훌륭한 무사나 병사들일 뿐이었다.
이 시기 일본인들 중에서 항왜들을 비난하거나 경멸한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그 비난의 강도는 조선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약했다. 조선인 입장에서는 침략자 일본을 위해 싸운 조선인 부역자들에게 원수 그 이상으로 배반감을 느끼겠지만, 일본인들이 항왜를 대하는 태도는 그래서 훨씬 유화적이었다.
니시무라 겐타로가 이민호에게 청한 것은 같은 일본인이라서 백성을 살려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인간으로서 불쌍한 자들이 생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선 것뿐이었다.
“일반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노예로 삼지 말라는 포고를 내리겠소. 그리고 큐슈에 사는 일본인들이 최소한 지난 세월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겠소. 다만 전쟁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두시오.”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전하. 주군 덕택에 가문의 원수를 갚고 딸은 강한 나라에서 귀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귀한 핏줄을 얻어 혈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무런 한이 없습니다.”
“어허! 세상 다 산 것처럼 그런 말은 마시오. 외손주가 자라는 모습을 봐야 할 것 아니오?”
“그런 영광을! 태어나실 왕자님을 위해서라도 주군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겐타로가 견마지로를 하겠다면 정말로 말이나 개처럼 일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온 정도라면 충분히 잘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방금 약속으로 인해 일반 왜인들에게 너무 잘해주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고산국 치하에서 왜인들이 행복하게 사는 꼴을 보게 된다면 조선 출신 고산국 장병들이 이민호에게 배반감을 느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 여진족 2만과 명군 3만, 섬라 등 여러 나라의 군대가 전투에 나서고 있었다. 다들 적에게 잔인하고 점령지는 물론 심지어 우호적인 주민들에게도 혹독하기로 악명 높은 자들이었다. 큐슈 정벌전은 임진왜란만큼 아주 잔혹한 전쟁이 될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민호는 니시무라 겐타로를 잠시 간몬 해협에서 일하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혼슈에서 건너온 첩자들이 겐타로에게 정보를 보고하고, 가끔은 연락이 닿은 명나라 첩자들도 해협을 건너왔다.
복건 순무가 보낸 첩자들 중에서 아직 세 명이나 살아남았다. 그리고 첩자 한 명이 가져온 중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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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