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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330화 (279/1,000)

00330  38. 큐슈 점령  =========================================================================

“포로를 많이 잡았는데 어째서 따로 관리하지 않는 거야?”

이민호는 여진족 기병들에게 포로 관리 지침을 따로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고산국에서는 포로를 수집하면 보급부대 쪽으로 넘겨 따로 집중 감시했고 조선군 기병도 비슷하게 포로를 관리했다. 여진족 기병들을 현재 오응태가 지휘하고 있으므로 비슷하게 관리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들은 왜병 포로를 잡아 무장해제만 시키고 말안장에 묶어 끌고 다니거나 예비용 말에 태우고 다녔다. 왜군 포로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고 다투기도 했다.

“민영아! 저 여진족들이 왜 저러지?”

“포로를 잡은 사람이 그 포로를 종으로 삼는 거여요. 높은 사람에게 포로를 상납하기도 해요.”

“뭐?”

“일을 시키다가 적당히 말이 통하면 그때부터 전쟁에서 종자로 쓰기도 해요. 포로는 주인을 위해 적과 싸우면서 병사나 장군으로 출세할 수 있어요. 마치 주인님 밑에서 감불이나 감동이 계속 승진한 것처럼요. 주인님도 알고 그러신 것 아니에요?”

“아닌데. 그저 고향과 부모를 잃은 너희들이 불쌍해서, 그리고 같이 지내다 보니까 능력이 좋아서 계속 일을 시켰지. 내 주변에는 계복이나 노비들 말고는 딱히 다른 사람도 없었고.”

여진족이나 몽골족은 다른 부족을 정복한 후에 지배하에 들어온 부족을 같은 편으로 부려먹었다. 부족 단위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포로도 그런 식으로 활용했다. 실제 역사에서 병자호란 전후에 포로로 잡혀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서 청군에 소속됐다가 도망쳐온 사례가 흔했다.

“그런데 감시가 허술하면 포로들이 도망가지 않나? 아! 왜인들도 안 도망가겠구나.”

이민호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여진이나 몽골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포로가 된 다음에는 비슷하게 포로로 잡은 자를 위해 봉사했다. 현대인 출신인 이민호는 물론 조선인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조선에 와서 항복했거나 포로로 잡힌 항왜들은 조선 임금으로부터 의심을 받으면서도 조선을 위해 왜군을 상대로 열심히 싸웠다.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치는 조선인들이 오히려 이 시대 동아시아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는 배신자인 셈이었다.

민영 등 시전부락 포로 출신들이 어떻게 보면 원수나 다름없는 이민호에게 충성하는 이유가 이렇게 밝혀졌다. 야만의 시대에는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어렸을 때 잡혀온 민영이나 감불 등이 이민호를 두려워하면서도 충성을 바친 것은 이민호가 잘해준 탓도 있었지만 그런 전통적인 관념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너희들이 돌아갈 곳이 없어져서 나한테 남은 줄 알았어.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충성스럽다 했어.”

“이제 저희들의 충심을 의심하지 마세요.”

“의심한 적은 없었어.”

이민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사실 이민호가 여진족들을 의심한 적이 많았다.

처음 수원에 데리고 왔을 때부터 이민호는 여진족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줬었다. 도망치려면 언제든지 도망쳐도 좋다는 뜻이었는데 여진족 아이들은 그럴 이유가 아예 없었다. 이민호는 야만스런 여진족과 다르다고 자부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여진족 아이들을 모두 수하로 부리게 됐으니 여진족과 똑같은 행동을 했던 셈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기병 지휘관 오응태가 묘한 포로들을 국왕좌승함으로 보내왔다. 갑옷을 입은 20대 초중반 여성이 남장을 한 여자들과 함께 잡혀와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포로를 국왕좌승함까지 호송한 함경도 군관에 따르면 여자는 일반 사무라이도 아니고 다치바나 가문의 병력을 지휘한 다이묘급 무장이라고 했다. 오응태가 일본에서 고위직 신분인 다이묘를 이렇게 포로를 바친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하필 여자들이라서 곤혹스러웠다.

“부인은 누구시오?”

“저는 조선에서 전사한 다이묘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아내 다치바나 긴치요입니다!”

“아! 다치바나!”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부산포에서 시마즈 군과 자중지란 중에 병력을 다 잃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아 물에 빠져 죽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성이 부군과 같군요. 참!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지요?”

“아닙니다. 제가 원래 다치바나 씨이며 남편이 양자로 들어와 다치바나 가문을 계승했습니다. 남편은 조선에서 죽어버렸지만요.”

“그렇군요. 전쟁 중에 부군이 전사하신 것은 유감이오. 부인께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거나 조용한 산골 마을에 들어가서 조용히 계시길 바라오.”

이민호는 이 시기 큐슈의 무사가문 여자가 가장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특이한 포로라서 접견하긴 했지만 이민호는 어서 간몬 해협으로 가서 왜군의 증원을 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혹시 전하께서는 일본에서 협력자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전쟁터에서 살아나온 젊은 여자 다이묘가 이민호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의도를 파악한 이민호는 시큰둥했다. 복잡해지는 것도 싫었고, 잡히고 나서부터 순종적으로 돌아서는 일반적인 왜인 포로가 아니라서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몰라 거부감부터 든 탓이었다.

“필요 없소. 그리고 나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전란의 시대에는 원수와도 손을 잡을 수 있어요. 저는 다치바나 가문을 정식으로 상속했으니 누구든 저를 취하는 남자가 가독을 계승할 수 있어요. 저는 아직 출산을 하지 않아 몸매도 좋은 편이에요. 제가 욕심나지 않으시나요? 그리고 제 시녀들은 아직 처녀랍니다.”

다치바나 긴치요는 일곱 살 어린 소녀의 몸으로 당시 주군이었던 오토모 소린의 허락을 받아 남성 당주처럼 가문을 계승했다. 딸은 단순히 전대 가주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승하기 어려우니 어렸을 때부터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고 봐야 했다.

긴치요는 얼마 후 다카하시 쇼운의 적장자로서 다치바나 가문의 양자로 들어온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결혼했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지만 벌써 유부녀 10년 차가 넘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아직도 아이가 없어서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풍신수길이 인정하는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긴치요의 눈에 차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마치 신통치 않은 수컷과의 교미를 거부하는 짐승 암컷과 비슷했다.

“전혀요. 군관은 부인을 배웅해드려라.”

“예, 전하.”

긴치요를 끌고 온 함경도 군관도 이민호를 전하라고 불렀다. 군관이 여자 포로들을 끌고 나가는데 긴치요가 버티며 소리를 질렀다.

“고산국 국왕전하! 저는 한 나라의 주인인 다이묘입니다. 당신이 왕이라도 저한테 이럴 수는 없어요!”

“일본 왕이나 관백이라면 그렇겠지요. 벌거벗긴 채 여진 기병들한테 던져주기 전에 어서 썩 나가시오!”

일본에서 한 나라(國)라고 하면 지방을 뜻했다. 오토모 가의 가신이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풍신수길이 사쓰마 정벌을 한 다음 다이묘로 독립했었다. 긴치요는 남편이 전사하자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여자로서 다이묘 자리를 꿰찬 것 같았다.

다치바나 긴치요와 시녀들을 단정에 태워 해안에 내려줬다. 긴치요와 시녀들은 아버지나 남편이 외지로 원정 나갔을 때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등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이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여자들이었다. 무기가 없더라도 알아서 살아 돌아갈 것으로 믿었다.

“전하! 저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뭐가 말이오?”

이민호는 혹시 비올레타가 미망인 다이묘의 미모를 평가하나 했다. 시녀들도 몸이 탄탄하면서도 남장을 해서 그런지 묘하게 색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정치적인 판단부터 했다.

“적당한 규모의 군세를 거느린 여자 영주가 돕는다면 큐슈를 점령한 이후 통치할 때 유리할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불러서 협력을 하지 그러세요?”

“천만에 말씀이오. 차라리 나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말했으면 훨씬 더 믿음직했을 것이오.”

미카와 시녀들은 가문의 원수에게 복수를 해줄 것을 원했고, 평생 충성하는 대가로 이민호가 그렇게 해줬다. 그러나 긴치요와 시녀들은 동포를 팔아 출세할 생각뿐이었다. 긴치요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이민호는 그런 여자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민호는 다치바나 가문의 젊은 여주인이 일본의 전국시대 게임에서는 꽤나 아름다운 여성 캐릭터로 등장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그러나 게임 캐릭터는 남녀를 불문하고 용모에 과장이 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도 함대는 계속 동쪽으로 전진했다. 그 동안 고산국 함대에게 몇 번 공격당했던 하카다의 성과 그 주위는 초토화된 그대로였다. 무너진 성터에 자그마한 목책 진지가 세워져 있었지만 여진족 백여 명이 말을 탄 채로 울타리를 넘어간 다음 철저히 부숴버렸다.

하카다는 이 시대 기준으로 꽤 큰 무역도시였는데도 지키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하카다 서쪽에서 왜군 2만을 섬멸하는 사이 포성을 듣고 백성들뿐 아니라 관원들도 피난 갔다고 이민호는 판단했다.

여진족 기병들이 도시에 도착하면서 축제가 시작됐다. 이민호나 오응태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여진족 2만 기병이 텅 빈 도시를 향해 말을 타고 돌격했다.

여진 기병들은 웬만한 인공 구조물을 다 때려 부숴 무너뜨렸다. 그리고 집을 뒤져 값나가는 것을 찾은 다음 불을 질렀다. 기병 2만 명이 나서니 도시 하나가 아주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도시에 남은 사람들이 조금 있긴 했다. 그러나 노인과 아이들, 여자들 소수에 불과했다. 여진족들이 겁에 질린 이들에게 뭔가 일을 시켰다. 포구에 배를 접안시킨 이민호의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아마도 밥을 해오라고 시킨 것 같았다.

“멍청이들! 오늘밤 잘 곳도 없이 죄다 불 지르면 어떡하나?”

“처음부터 야영할 생각을 했을 거여요.”

민영의 말에 이민호는 저들이 여진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정했다. 유목민족 정복자들은 심지어 황제가 되고 나서도 궁전에 천막을 치고 지냈다.

이민호는 조만간 여진족 기병들을 혼슈에 풀어놓을 때 필요한 것이 뭔지 이번에 제대로 맞춰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겨우 2만에 불과했지만 여진 기병을 상대한 적이 없는 왜인들에게 악마를 풀어놓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겠네. 어이, 전령! 오 방어사 좀 오라고 해. 전혀 통제가 안 되잖아? 야만스럽게 약탈, 방화나 하고 말이야.”

“주인님이 해병들에게 시키신 일은요?”

민영이 부두를 가리켰다. 전통적인 무역 항구였던 하카다의 부두에는 대형 창고가 꽤 많이 세워져 있었다. 창고 문을 연 해병들이 마치 개미 떼처럼 줄지어 물건을 배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전에 이민호는 해병들을 상륙시켜 물건을 배로 옮겨 싣도록 명령을 내렸고, 해병들은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창고에는 비단과 면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병참능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보급품의 현지 조달이지. 섬라와 유구 병사들이 겨울옷을 제대로 준비해오지 못한 것 같으니 면포를 그쪽으로 보내야겠어.”

“섬라군에 비단도 보낼까요, 전하?”

“아니, 비단은 군자금으로 쓰게 좀 남겨두시오.”

민영과 비올레타가 은근히 이민호를 갖고 놀았다. 여진족의 방화와 달리 점령한 지역의 창고를 터는 정도는 이 시대 다른 문화권에서도 얼마든지 용납될 수 있었다. 둘은 그저 이민호가 당황해서 쩔쩔 매는 모습을 보고 싶어 자꾸 도발하고 있었다.

“전하! 소신을 부르셨사옵니까?”

국왕좌승함에 소환된 오응태가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이민호에게 큰절부터 올렸다. 아무리 고산국에 이민 올 예정이라지만 현직 함경도 방어사로서 조금 지나친 감이 있었다. 오응태가 신뢰하는 군관 두 명만 같이 와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 작품 후기 ============================

간몬해협에는 다음 날 가야겠습니다.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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