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8 38. 큐슈 점령 =========================================================================
보병대대처럼 기병대대에도 포병대가 정식 편제로 포함된 것은 전술적으로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기병의 특성상 미리 준비된 적 보병의 방어진지를 공격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는데 기병포 8문이 그 부담을 덜어주었다. 여차하면 기병돌격과 총기가 아니라 포병만으로 적의 견고한 진지를 격파할 수 있게 되었다.
- 콰콰쾅!
3인치 화포 8문이 일제히 화염과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는 조선군이 사용하는 불랑기보다 적게 났으나 위력은 훨씬 치명적이었다. 왜군의 창병 방진 중간, 또는 그 옆에서 대기하는 철포병들 사이에 포탄이 낙하했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밀집해서 서있던 왜병들이 수십 명 단위로 쓰러졌다.
기병포 8문 중에서 2문은 들판에 늘어선 왜병들 한참 뒤를 목표로 노렸다. 주변에 군기가 펄럭이고 화려한 휘장이 나부끼는 총대장의 군막이었다. 거리가 멀어서 군막에 명중하지는 않았으나 바로 옆 기마전령들 사이에서 터진 포탄에 말 여러 마리가 쓰러졌다. 이민호는 왜군 총대장의 군막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살피다가 이항복을 불렀다.
“도원수! 바로 이때 기병을 돌격시키시오!”
“예? 하오나 적의 방진은 아직......”
이항복이 망설이는 사이에 이민호가 혀를 찼다. 그 순간 기병포가 세 번째 발사됐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왜병들이 일제히 뒤로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지난 2년 동안 고산국 전선에서 쏘아대는 함포에 극도로 공포심을 가진 큐슈의 왜병들은 지상에서 포탄이 터지는 순간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어쩌다 조선에서 큐슈로 살아 돌아온 부상병들이 내뱉는 말도 온통 포탄에 대한 과장 섞인 두려움뿐이었다.
그러나 왜병들은 포탄 한 발에 수십 명씩 죽어가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왜병이 겁을 먹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순간 상급자에게 참살 당함은 물론 가족들이 영지에서 쫓겨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군이 용감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제도 속에 사는 것뿐이었다.
왜병들이 갑자기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주한 것은 왜군 지휘부가 먼저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말 타고 남쪽으로 달리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마무사들 사이에 여러 가지 군기가 휘날리고 있었고, 그 안에 류조지 가문의 군기가 다수 섞여 있었다. 특히 대장을 상징하는 마인이 가장 남쪽에서 움직였다.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장남 나베시마 가쓰시게는 함경도 책성 전투에서 고산국 원정군이 기병포로 가토 기요마사를 저격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어린 아들에게 고산국 대포의 무서움을 누누이 강조했고, 풍신수길의 눈총을 받아가며 아들을 영지로 돌려보냈다.
나베시마 가쓰시게가 총대장이 되어 오늘 다시 본 포격은 함경도에서 겪은 두려움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소년 장수는 총대장답게 의젓하게 접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주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가신들이 어린 주군을 말에 태워 기병포의 공격으로부터 도주시켰고, 이것이 곧바로 전군의 붕괴로 이어졌다.
“어? 어? 공격 명령 내려! 물론 기병이야!”
이항복이 서둘러 조선군 기병들에게 전령을 보냈다. 이민호도 전령들을 불러 명령을 전하도록 했다.
임진왜란 기간을 통해 왜군이 항상 돌격만 한다는 인상이 굳었으나 사실은 후퇴도 자주 했다. 왜군이 용감하게 돌격한다는 인상이 조선인들에게 강하게 박혀 있어 왜군이 패해 도주할 때에도 피해를 덜 보면서 안전한 곳까지 물러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후퇴 과정에서 더 많은 인명피해를 냈고, 이것은 다른 나라들과 차이가 없었다.
“전령! 유정 제독에게 가서, 왜적을 포위 공격한 다음 전투가 끝나면 40리 전방 마쓰우라 강변까지 진출하도록 군령을 전해!”
“예! 공격한 다음 40리 남쪽 마쓰우라 강변에 진출하라고 명령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가! 기마대대 돌격 준비!”
원정군 직할 기마대대가 대열을 맞추는 사이 전령이 말을 타고 명군 진영으로 달려갔다. 명군 북병도 출전 준비를 완벽히 마치고 언제든 달려 나갈 수 있게 대기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중군과 좌우군에 분산 배치된 조선군 기병 1만 2천이 대열을 짠 다음 출진했다. 이어서 두껍고 번쩍이는 철갑옷을 이은 명군 기병 1만여 기가 지축을 울리며 남쪽으로 달려갔다. 아직까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사기가 바닥 나 도망치는 왜군 5만 명이 목표였다.
- 두두두두두~
2만여 기의 기병이 평지와 언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남쪽으로 도주하던 왜병 후미는 조선 기병에게 곧 따라잡혔다. 다급한 나머지 후위를 배치하지 못한 왜군은 기병으로부터 도망치는 보병이 항상 그렇듯 무차별로 학살당했다.
조선 기병들의 활쏘기 실력이야 정평이 나 있었지만, 실제로 더 많은 전과를 올리는 쪽은 숫자가 적은 편곤 기병이었다. 기다란 창 자루 끝에 작은 막대를 쇠사슬로 달아 이것으로 적을 후려치는 무기가 편곤이었다. 투구나 삿갓처럼 생긴 진가사를 쓴 왜병들이 뒤에서 후려친 편곤에 맞는 즉시 고꾸라졌다.
고산국 원정군 직할 기마대대는 숫자가 적었으나 추격전 중에 가장 적절한 전술 행동을 했다. 연합군 기병에 맞서 왜병들이 집결해 장창으로 방어하거나 조총병들이 모인 곳마다 유탄을 쏘고 총격을 가해 흩어버렸다. 흩어져 도망치는 왜병은 조선 기병에게나 명나라 북병에게나 아주 손쉬운 표적일 뿐이었다.
명나라 북병은 두꺼운 갑옷을 입어 방어력이 강하고, 조선 기병은 활을 멀리서 정확히 쏠 줄 알았다. 고산국 기병은 총이나 유탄을 발사해 왜병들이 감히 모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같은 기병이면서 특성이 다른 세 가지 기병들이 왜군을 몰아치자, 겁에 질린 왜병들은 모든 연합군 기병이 두꺼운 갑옷을 입은 채 활과 유탄을 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연합군 기병에게 감히 대응할 생각 자체를 못했다.
겁에 질린 왜병들은 무기를 버린 채 최고 속도로 달렸다. 뒤쳐져 연합군 기병에게 포위된 왜병들은 머리만 땅에 대고 오들오들 떨다가 죽어갔다. 대지가 왜병들의 시체와 붉은 피로 뒤덮였다.
이때 직할 기마대대는 왜군의 퇴각로를 살짝 벗어나 언덕을 넘어 달리면서 왜군의 선두 부분을 따라잡았다. 기마무사들이 몰려 있는 곳 중앙에 적의 대장들이 몰려 있었다. 왜군 수뇌부를 한꺼번에 잡고 잘하면 왜병들 전체의 후퇴를 막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이민호가 말 타고 따라가서 본 것은 여기까지였다. 적의 저격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는 민영의 건의를 받아들인 이민호는 목책이 세워진 교두보로 다시 돌아왔다.
“여진 기병이 빨리 도착하면 좋겠다.”
“오후 늦게 배가 도착할 거여요. 그리고 지금 병력으로도 충분해요.”
“아직 왜적이 10만 넘게 남았어.”
“다들 분산돼 성을 지키거나 겨우 몇 천 단위로 움직이고 있을 걸요?”
이민호는 이번에 격파한 왜군이 적의 주력이길 바랐다. 원래 큐슈는 3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서쪽의 류조지, 북동쪽의 오토모, 남쪽의 시마즈였다.
막판에 시마즈 가문이 강세를 보이며 큐슈 전역을 통일하기 직진이었으나, 혼슈를 거의 통일한 풍신수길이 20만을 동원해 정벌하고 나서는 3개 국으로 영지가 축소됐다. 최근에는 고산국 함대에게 여러 번 공격당해 영지는 초토화되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 남지 않았다. 류조지 가문은 원래 가신이었던 나베시마 가문으로 힘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시기였다. 시마즈 가문에게 타격을 입은 오토모 가문은 풍신수길 가문을 섬기게 되면서 1개 구니(國)로 영지가 줄어들었다.
풍신수길이 큐슈 중앙 구마모토에 영지를 내린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사하거나 명나라로 잡혀가 참수 당했다. 그 이후 아직 영주가 정해지지 않았고, 고산국 함대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아 이 지역은 거의 무인지대로 변했다.
결론적으로 이번보다 큰 규모의 왜군이 몰려올 가능성은 적었다. 대신 큐슈 곳곳에 축조된 성곽을 점령하는 문제가 남았다. 이들은 항복하지 않고 결사 항전할 것으로 예상됐다. 더 큰 문제는 혼슈에서 얼마나 많은 증원군을 보냈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서 여진 기병을 풀어놓고 우리 함대가 빨리 움직일 수 있어야 해. 혼슈에서 적이 넘어올까 봐 초조해 죽겠다.”
“적군도 준비가 돼야 넘어오죠. 그리고 혼슈의 적이 큐슈로 좀 넘어오면 어때요? 바다로 밀어붙이면 되죠.”
자신감이 붙은 민영이 생긋 웃어서 이민호도 기분이 좀 풀렸다. 고산국 병력은 상륙 이후 아직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바로 혼슈에서 지원 병력이 큐슈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었다.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 고산국 해군과 지상군이 이 중요한 임무에 동원될 예정이었다.
“주인님! 언덕 위에 몰려있는 저들은 뭐죠? 전군이 후퇴할 때 뒤에 남는다는 후위 부대인가요?”
“아! 그냥 민간인들. 구경하나봐.”
민영이 가리킨 곳을 이민호가 확인했다. 높은 언덕마다 왜인들이 수백 명씩 옹기종기 앉아서 전쟁을 구경하고 있었다. 몇몇은 도시락을 까먹고, 떡장수가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출출해진 왜인들에게 떡을 팔았다. 전쟁터 속에서도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명군 지휘부는 언덕에 모습을 드러낸 다수의 왜인들이 일반 백성이란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다. 당연히 적이라고 판단한 제독 유정이 기병들을 파견해 언덕으로 들이쳤다. 북병들은 왜인들 일부가 칼을 차고 있으니 당연히 전체 구경꾼들을 왜병으로 인식하고 최선을 다해 공격했다.
그제야 위험을 느낀 왜인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적 영지의 백성들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일이 거의 없는 전국시대 내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왜인들은 명나라 기병들의 창날과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전령! 유 제독에게 일반 백성 구경꾼들은 무시해도 좋다고 통보해줘. 언덕마다 기병을 보내면 포위망이 엷어지잖아!”
“예! 구경꾼들을 무시하고 포위망을 최우선적으로 형성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전령이 달려간 것을 확인하고 이민호는 바닷가 지휘막사로 이동했다. 비올레타가 섬라의 왕제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섬라군의 보급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비올레타! 무슨 문제가 있소?”
“아! 전하. 아유타야 왕국의 왕제께서 대규모 양계장을 지어달래요.”
비올레타가 고산국 해군 복장을 하고 있어서 상큼했던 이민호의 기분이 섬라군의 요구사항을 듣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전쟁터에서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닭을 10만 마리밖에 안 가져온 것은 병아리를 키워서 잡아먹을 계획이었다는 거여요. 일인당 최소한 사흘에 한 마리씩은 닭을 먹어야 한 대요.”
“한 달이면 다 먹을 텐데 병아리를 언제 키운다는 말이오?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하시오.”
현대 태국이 러시아에서 전투기를 구매하는 대신 닭을 대금으로 지불하면 어떠냐고 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태국은 닭본위제라는 농담이 인터넷 상에서 돌았다. 닭은 태국, 지금의 섬라에서 중요한 가축이었다. 이 시대 태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유타야 왕국, 주변국에서는 시암, 명나라에서는 섬라라고 불렀다.
“전하! 그래서 믿을 만한 상인들을 데려왔습니다.”
“왜인들 아니오?”
섬라의 왕제가 추레하게 생긴 왜인들 네 명을 가리켰다. 다들 나이를 많이 먹었고, 순박한 농민처럼 생겼지 절대로 생각이 많은 일본인 상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나가사키와 몇몇 일본 상업도시를 방문했던 이민호는 이들이 상인이 아님을 알아봤다.
“일본 출신이지만 아유타야 왕국에 거주하는 자들입니다. 반은 저희 백성들이죠. 이들이 일본 점령지마다 돌아다니면서 닭을 사도록 국왕전하께서 허가장을 발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왜인들은 소와 말, 개 외에 가축을 거의 키우지 않을 텐데요? 닭도 키우긴 하나 구하기 어려울 것이오?”
“그게 정말입니까? 이런 야만인들을 봤나!”
섬라의 왕제가 타이어로 왜인들을 꾸짖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고향에 돌아오고 싶어서 왕제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이거 어떡하지? 쌀국수에 얹을 닭고기를 못 구하면 병사들 사기가 뚝 떨어질 텐데.”
“저쪽 땅을 떼어줄 테니 양계장을 만들어서 닭을 대량으로 키우시오. 닭사료로 사용할 잡곡을 지원해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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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