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7 38. 큐슈 점령 =========================================================================
이민호는 호위대와 함께 말을 타고 전장에 나와 있었다. 전선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왜군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전선에서 내려 교두보에 상륙한 원정군사령부 직할 기병대대가 급히 출진할 준비를 갖췄다. 조선군이 패할 경우 즉시 기병들을 투입해 왜군을 쫓아낼 계획이었다.
“혹시 주인님이 만든 진형을 보고 베낀 게 아닐까요?”
“비슷한 면도 있긴 한데 개념이 전혀 달라. 우린 단병접전을 아예 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횡대로 넓게 벌리는 건데 저들은 단병접전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있어. 정면의 화력 밀집도가 굉장히 두터운 대신 측면 방어는 아예 기마병에게 맡겼어.”
이민호가 민영과 대화하는 중에 조선국 도원수 이항복이 말을 타고 다가왔다. 문관이 갑옷을 입어서 조금 어색했으나, 원래 조선의 선비라면 문무를 가리지 않아야 했다.
“주애공 대인! 진형이 특이하지요? 거창의 정온이라는 유생이 제안한 진형을 비변사에서 좀 다듬어서 삼첩진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전통적인 오위체제 진법과 전혀 다르군요. 저 진형은 단병접전에 약한 조선군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화력투사에 강한 강점을 더욱 강화한 것 같소. 그러나 왜군은 조총이 장기일 뿐만 아니라 단병접전에도 아주 강한데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겠소?”
“그래서 화력으로 압도할 겁니다. 조금 지켜보십시오.”
조선군은 조총을 든 3천 명이 맨 앞줄에 빽빽이 서고 그 뒤에 수군총을 든 천 명이 좌우에 공간을 두고 늘어섰다. 그 뒷줄은 활을 든 사수들이었고, 바로 뒤에 방패와 칼, 또는 창을 든 살수가 대열을 이뤘다. 그들 뒤에는 편곤을 든 기병 1천기와 활을 주로 사용할 궁기병 3천기가 언제든 좌우로 뛰쳐나갈 준비를 마쳤다.
“맨 앞줄 총병들은 방포대라 합니다. 3단으로 나눠 윤방하거나 아예 한 줄로 서서 일제 사격을 할 수 있습니다. 뒤에 선 1천 총병은 예비대이기도 하면서 앞줄의 3천이 일제 사격을 할 때는 중앙을 집중 지원하게 됩니다. 김 방어사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합니다.”
윤방은 총병들을 몇 개의 대로 나눠 대별로 교대 사격하는 것을 가리킨다. 단발총의 특성상 교대 사격을 통해 연속 사격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궁수들이 총병의 보조라고 하기에는 수가 너무 많군요.”
“사대 3천은 적이 45보까지 접근했을 때 활을 쏩니다. 더 가까워지면 살수들이 앞으로 나서서 총병들을 보호합니다. 이런 식으로 총탄과 화살을 계속 퍼붓다가 적의 대열이 와해돼 후퇴하면 그때부터 편군과 기사가 추격해서 전과를 확대할 계획입니다.”
왜병들과의 전투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이민호는 퍼뜩 삼첩진으로 명나라 군대와 싸우는 것을 가정해보았다. 방어에 중점을 둔 원앙진이 기본인 남병을 상대한다면 화력이 강한 조선군 삼첩진이 압도적으로 이길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가 기마병인 북병일 경우에는 전혀 달랐다. 북병이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고 측면이나 후면으로 돌아서 친다면 북병이 삼첩진을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삼첩진은 정면에 화력이 지나치게 집중돼 측면이 약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병들이 왜 후퇴를. 응?”
“그렇습니다, 대인. 살수의 부족을 야전축성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왜군이 전진을 시작하자 조선군이 스무 걸음쯤 물러났는데, 조총병들 앞에 배꼽 높이로 낮게 쌓은 뗏장이 드러났다. 풀이 자란 땅 표면을 잘라 풀뿌리가 서로 얽힌 깊이까지 들어내기만 했기에 짧은 시간에 낮은 토성 비슷한 것이 쌓였다.
그리고 그 앞에 흙을 파낸 자리에 물을 퍼부어 얕은 해자로 변신시켰다. 물이 깊지는 않았으나 발을 들이민 순간 진흙이 달라붙어 걸음을 방해할 정도로 진창으로 변했다.
“그 짧은 시간에 땅을 파내다니 대단합니다. 그리고 불랑기 2문이라. 옮기느라 고생 좀 했겠군요.”
“예. 여기까지는 맨손으로 옮겨도 괜찮았는데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앞으로는 수레에 실어 옮길 계획입니다.”
조선에서는 아직 야전에서 화포를 사용한 사례가 없었다. 이동수단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중에 권율이 전라도의 화포를 대구로 옮긴 기록이 있으나 단순한 이동에 불과했다. 실제 역사에서 조선에서는 후기까지 화포는 거의 방어전용이었으나, 일본 원정에 나선 조선군은 고산국의 영향을 받아 무리해서 화포를 야전에 사용하게 되었다.
- 펑! 퍼엉!
불랑기 2문이 불을 뿜었다. 하얀 연기가 앞으로 쏠려 나가고, 조란환 수십 개가 왜군의 방진을 덮쳤다. 철제 산탄 일부는 왜군의 장창을 부러뜨리기도 하고 땅에 처박히기도 했으나 절반 정도가 왜병들을 맞춰 쓰러뜨렸다.
- 타타탕!
왜군이 방진을 맞춰 전진하면서 양쪽 군의 사이가 급격히 좁혀졌다. 조총은 제자리에 서 있는 조선군이 먼저 발사했다. 세 줄이 교대로 연속 사격하는 3차 윤방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기에 뒤쪽 열의 수군총 방포대가 장전을 마칠 때마다 가세했다.
왜군 쪽에서도 조총을 발사해 조선군 총병 몇 명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러나 뗏장이 몸의 반을 가린 탓에 조선군 사상자는 왜군에 비해 훨씬 적었다.
- 타타탕! 타탕!
조선군 대열 앞쪽 방포대 주위가 하얀 연기로 가득 찼다. 왜군의 장창방진을 구성한 아시가루들은 주위에서 수없이 많은 자들이 쓰러지는 가운데 묵묵히 전진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대인?”
“화승총이 강하다 하나 비슷한 수끼리 싸우면 창병방진이나 기병이 더 강합니다. 발사 속도가 느린 탓이지요. 그러나 정면에 화력을 집중하는 삼첩진의 경우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사격 속도가 빠른 수군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총이 그렇게 강한데도 아직은 창칼이 우위에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조선군도 고산국 보병총처럼 사격 속도를 올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조선에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민호는 말과 달리 보병총의 복제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조선에서 보병총을 비슷한 시제품을 만드는 것까지는 가능하더라도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 실전에 대량으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봤다.
“대인의 말씀처럼 만약 중군이 밀린다 하더라도 이곳에는 아군이 더 많으니 염려할 것은 없겠습니다. 언제든 아군 병력을 더 투입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왜군도 당연히 더 온다고 봐야겠지요. 저기 왔군요.”
어쩐지 왜군이 겨우 일만 병력으로 싸움을 건다 했더니 같은 편이 언덕 뒤에 매복하고 있었다. 넓은 곳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싸우는 사이 새로 나타난 왜병들이 빠르게 움직여 진형을 갖춰나갔다.
만약 아침 일찍부터 북병이 말 타고 뛰쳐나갔다면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을 뻔했다. 명나라 북병이 기마정찰대를 운용한다지만 지형을 이용해 숨은 보병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 보이지는 않지만 최소 5만 정도가 더 왔습니다. 저것만으로도 이미 연합군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좌위와 우위를 내보내겠습니다.”
이항복이 교두보 안쪽으로 전령을 보냈다. 그 사이에도 김시민의 중군과 왜군 사이에 총격이 오가고 왜군은 계속 진격했다.
양군의 사이가 거의 50보 거리로 가까워지면서 조선군 중군이 이룬 삼첩진에서 일제히 활을 쏘았다. 활은 조총에 비해 연사력이 훨씬 높아서, 사대 3천은 순식간에 화살 3만 발을 왜군 방진을 향해 쏟아 부었다. 장창방진과 같은 속도로 전진하던 왜군 궁병 방진에서도 활을 쏘아 기다란 화살이 조선군 진지에 쏟아졌다.
- 피비빅!
그러나 발사 속도는 조선군이 훨씬 빨랐고, 궁병 숫자도 더 많았다. 화살의 비가 왜병들 머리 위로 계속 쏟아졌다.
이때 왜병들은 돌격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화살에 맞아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직후 왜병들이 조선군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 타타타탕!
장전이 완료된 모든 조선군 총병들이 일제히 발사했다. 그리고 두어 걸음 물러난 공간을 칼과 방패 또는 창으로 무장한 살수대가 차지했다. 왜병들이 기다란 창을 높이 올리며 마지막 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왜병들이 얕은 해자를 건너는 순간 갑자기 전진속도가 뚝 떨어졌다. 진창의 진흙이 왜병들의 발에 엉겨 붙으면서 다리가 무거워진 탓이었다. 무거운 창을 들고 걷다가 진창에 발이 걸려 자빠지고 엎어지는 자들도 있었다.
- 따다다다닥!
왜군 창병들이 사무라이의 신호에 맞춰 일제히 창을 내리쳤다. 선두에 나선 조선군 살수대는 창 길이만큼 뒤로 물러서지 않고 몸을 낮췄다. 그리고 뗏장을 이용해 왜병들의 창대 공격을 막았다. 사무라이들 일부가 칼을 빼들고 뗏장을 넘어 조선군을 향해 돌격했다.
- 쨍강! 캉!
조선군 팽배수가 왜검을 방패와 환도로 막는 사이 뒤에서 창병이 찌르는 식으로 전투가 진행됐다. 그 사이에도 방포대가 끊임없이 조총과 수군총을 발사했다. 두 집단이 맞붙은 곳은 하얀 연기에 가려 보이는 것이 거의 없었다.
“도원수 대감! 기병을 배후 공격에 활용하지는 않는 건가요?”
“예. 기본적으로 기병은 정찰과 추격에만 쓸 예정입니다. 그리고 왜군 쪽에도 기마무사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으니 견제를 해야 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왜군 쪽에서 쏟아져 나온 천여 기의 기마가 조선군 좌측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삼첩진 대열의 측면 방어를 위해 기병들이 움직였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돌격하던 기마무사 집단은 일단 궁기병들로부터 화살 세례를 세 차례 받았다.
“아악!”
왜군 기마무사들이 화살에 맞아 줄줄이 낙마했다. 대열에 혼란이 생긴 그 직후 조선군 편곤 기병이 돌진했다. 마상무예가 많이 딸리는 왜군 기마무사들은 조선 기병이 편곤을 휘두르고 지나가자 말에서 줄줄이 떨어졌다.
임진왜란 기간을 통해 조선 기병과 마상에서 격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왜군 기마무사들도 잘 알게 되었다. 얼른 말에서 내린 기마무사들이 대열을 갖추려 했으나 화살에 맞거나 대열 바깥을 스치고 지나가는 편곤 기병들의 공격을 받아 점점 숫자가 줄어들었다. 버티다 못한 기마무사들이 다시 말에 올라탄 다음 퇴각했다.
보병들끼리 싸우던 곳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전투가 진행되면서 밀집된 조선군으로부터 총과 활, 창과 칼의 동시 공격을 받아 창병방진의 대열이 급속히 얇아졌다. 창병들이 반수 이하로 줄어든 순간 왜병들이 창을 던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조선군 총병들이 추격하지 않았으나 왜병들이 총 사거리를 벗어날 때까지 한두 발씩 더 쏠 수 있었다. 궁병들은 대여섯 발을 더 쏘아 도망가는 왜병들을 쓰러뜨렸다. 갑옷 부위에 맞은 운 좋은 왜병들은 등판에 깃털 장식을 하나씩 달고 달아났다.
기마무사들을 몰아낸 3천여 궁기병들도 도주하는 왜병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새로 나타난 왜군 대열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왜병들이 새로 등장한 왜군 대열 사이로 빠져 나가고, 중간에는 수천 명의 왜병들 시체만이 남았다.
“와아! 이겼다!”
조선군 중군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사이 좌위와 우위가 중군 좌우에 포진했다. 왜군보다 훨씬 적게 피해를 입은 중군은 처음과 비슷한 밀집도로 서 있었다. 좌위와 우위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뗏장을 떠서 급히 흙 방벽을 쌓고 있었다.
“좋은 진형입니다. 승첩을 축하합니다, 도원수.”
“감사합니다, 대인! 하하!”
그 동안 마음 졸이고 지켜보던 이항복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력 위주인 조선군이 야전에서 왜군에게 이긴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이민호도 걱정을 많이 했었다.
“대인! 야전에서는 아무래도 먼저 공격하는 쪽이 많이 불리한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공격하는 쪽은 시간과 장소를 선택해서 싸울 수 있습니다. 항상 선택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렇습니다. 기병이 가만히 있어도 상대의 선택폭을 많이 좁힐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저들이 먼저 공격해올 것입니다.”
“그런데 도원수! 왜군이 먼저 공격해오길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선봉이 무너진 것을 본 저 왜병들은 후퇴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민호가 가리킨 곳에는 기병포를 조립해 발사준비를 마친 고산국 포병들이 있었다. 고산국도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겨우 2문을 운용했던 작년보다 기병포의 비율이 급격히 올라가고 있었다. 이것은 고산국 원정군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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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인상적인 전투만 묘사하려 해도 앞으로 중요한 전투가 많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