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1 38. 큐슈 점령 =========================================================================
“사도노카미는 자주 보네?”
“예! 전하. 소인 토도 다카토라가 일본 관백 전하께서 바치는 항복 문서를 가져왔습니다. 하온데 천장(天將)께서 접수를 거부하고 총대장이신 국왕전하께 여쭈라 하십니다.”
토도 다카토라가 다른 일본 사신들과 함께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더니 두루마리 문서를 바쳤다. 긴 칼을 압수당하고 짧은 칼만 찬 사무라이 두 명이 반질반질한 머리를 숙여 절을 해서 눈이 부셨다. 이민호는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은 채로 물었다.
“내용이 뭔가?”
“일본국 관백 전하가 명나라 황궁에 직접 입조하여 황제폐하께 사죄드리겠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앞으로는 대명의 연호를 받들겠습니다. 항복을 받아들여주시면 조선과 고산국에도 조선에 대한 침략을 사죄하는 사절단을 파견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제안한 것은 항복이 아니라 종전협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민호도 즉시 거부할까 하다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일본에는 천황이라고 따로 있다면서? 최근 국서에서 언급한 일본 국왕은 천황이 아닌가?”
“전하께서도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현재의 천황은 달력 만들면서 새 연호를 붙일 때나 필요한 사람입니다. 물론 제사도 지내고 영주들에게 명목상 조정 대신의 관직도 내려줍니다만 명예뿐인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관백 대신 일왕을 대명 황도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기에 권력자나 다이묘들에 의해 대놓고 허수아비 취급을 받는 일왕을 북경에 데려간들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여러 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원정을 시작했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군대를 물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당장 여기에 일본 관백이 온 것도 아니라서, 항복을 받아들인 이후 시간을 끌다가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민호는 일본과의 전쟁을 원했다.
“전하! 국서 말미에 기록돼 있는 대로 대명 황실에 황금 오십만 냥과 백은 삼백만 냥을 바치고 남자와 여자 노예들도 일만 명씩 바치겠습니다. 고산국과 조선국에도 그 절반씩 바치겠습니다.”
합해서 황급 백만 냥과 백은 육백만 냥이라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애매한 금액이었다. 명나라 같으면 원정 비용을 뽑을 수 있겠지만 침략을 당해 국토 일부가 초토화된 조선 입장에서는 손해였다. 고산국 입장에서도 총알, 포탄 값 때문에 손해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민호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다카토라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이민호가 두루마리 국서를 다카토라에게 되돌려주었다.
“전하께서 시간을 좀 더 주신다면 두 배로 낼 의향이 있습니다! 불쌍한 일본 백성들을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건 아니지. 어쨌든 칼은 이미 뽑혔다네. 당분간 이곳에 억류될 각오는 하고 왔겠지?”
현재 풍신수길의 양아들이며 관백인 풍신수차,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태합직을 계승했다지만 일본은 무척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만약 오사카 성에서 덕천가강이 죽지 않았다면 원래 역사처럼 권력을 빼앗길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조선에서 패전하면서 수하 다이묘들의 이탈과 대립이 잦아진 탓이었다.
토도 다카토라는 풍신수길의 셋째 양아들 도요토미 히데야스의 가신이었으나 이민호와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항복사절로 뽑혔다. 히데야스의 중추 가신인 토도 다카토라를 제거하려는 히데쓰구 측의 노림수로 볼 수도 있었다. 둘째 도요토미 히데카쓰는 9군의 대장으로서 조선 거제도 혹은 부산포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고 일본에 알려졌지만 조선 수군에 의해 전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전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단념이 빠른 토도 다카토라와 사절단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그러나 사무라이 한 명이 웃옷을 벗어젖히더니 명나라 군병들이 말리기도 전에 배에 칼을 꽂았다.
“무사가 임무에 실패했으니 죽음은 당연한 것. 푸른 하늘 아래 대명과 고산국, 조선국의 명장들 앞에서 할복하게 돼서 무사의 영광이로소이다.”
사무라이가 배를 가른 다음 창자를 쭉쭉 뽑아냈다. 소장 부위라서 배에서 시뻘건 것이 한참 뽑혀 나왔다. 이민호를 따라온 여자 호위들이 끔찍한 장면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민호는 각국의 최고 지휘관들과 함께 운주당에 올랐다. 도원수로 임명된 이항복이 갑옷을 입고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주애공 대인!”
“오랜만이오, 백사 대감.”
이민호가 명나라 황제로부터 원정군의 총지휘권을 받았으므로 이항복이 이민호를 명나라 관작으로 부르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고산국왕으로 불러주길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조선 관직명으로 불러주길 바란 이민호는 은근히 섭섭했다.
경상우수사 오응정과 함경도 방어사 오응태가 속닥거리다가 이민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름과 얼굴이 비슷하다 했더니 두 사람은 친형제 사이였다. 자유분방한 오응태와 달리 동생 오응정은 신중하면서도 꼿꼿한 성격이었다.
“본진의 출발이 며칠 안 남았으니 최종적으로 작전을 검토해봅시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요?”
사실 원정은 오늘부터 이미 시작됐다. 텅 비었다고 알려진 대마도를 점령하기 위해 조선 수군과 육군 일부가 아침에 떠났다. 대마도 엄원 항에 책성을 쌓은 다음에는 일기도를 공략할 예정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작전이 세부적인 내용까지 결정돼 있었다. 2차 상륙군인 여진족 기병 2만을 수송할 때 약간 벅차겠지만 군마 수송용으로 개조된 고산국 수송선들이 나서면 하루 안에 수송이 가능했다.
일본은 상륙할 지점이 많은 대마도는 아예 포기하고 일기도를 1차 방어선으로 삼았다. 거제도와 동래에 10만이 넘는 연합군이 집결하고 거제도 주변 바다에 무수히 많은 군선들이 모이고 있어 일본에서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큐슈 북부에 병력을 집결시켜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현재 큐슈 북부에 배치된 왜군 현황은 이렇소.”
이민호가 지휘봉을 꺼내들자 호위들이 큐슈 지도를 벽에 붙였다. 조선군과 명군이 예상한 대로 왜군이 큐슈 북부 지역 몇 곳에 배치돼 있었고, 겐타로가 보낸 정보로 병력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왜군은 큐슈 북부에 15만이 집결하고, 나머지 6만은 고산국의 갑작스런 상륙전에 대비해 큐슈 각 지역별로 나뉘어 배치돼 있었다. 그리고 혼슈에서 징발한 병력이 혼슈 서부지방 곳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물론 배도 많이 모았으나 예전과 달리 대형 세키부네를 건조하지 못하고 작은 고바야 위주였다.
왜군은 15만 이상을 조선 땅에서 잃었으면서 다시 고스란히 병력을 징발했다. 다른 시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남자들의 씨가 마를 때까지 병력은 금방 충원할 수 있었다. 6.25때 겨우 3년의 전쟁 기간 중에 국군 1개 사단을 거쳐 간 장병들이 10만을 넘었다. 물론 다 사상자는 아니었고 다른 부대 창설을 위해 차출된 경우가 더 많았다.
“고산국과 조선 수군 함대가 왜병들이 집결한 해안을 두들긴 다음 선봉 부대가 적진 앞에 상륙할 것이오. 이런 위험한 작전을 제시하다니, 역시 천조의 장수들은 용감하십니다.”
이민호가 감탄하는 척했다. 큐슈에 처음 상륙할 선봉군이 결정되기 전에 여러 나라에서 서로 선봉을 하겠다고 다퉜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누구나 선봉에 서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남의 뒤를 따라다니고 싶어 하는 장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첫 상륙의 영광은 천군이 맡기로 했으니 천군과 고산국 함대가 12월 5일 아침에 거제도에서 출발하지요.”
“다른 군도 용감한데 저희를 선봉으로 삼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산국에서 함포 사격 지원을 잘해주십시오.”
고산국 함대가 함포 지원을 해준다면 상륙전은 쉬울 거라는 판단에 유정이 선봉을 자처했었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산 하나만 넘으면 보이지 않을 테니 상륙 지원이란 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었다.
최종적으로 작전을 조율한 다음 이민호가 오응태를 불렀다.
“함경도와 평안도 기병 5천은 임지로 돌아가는 거요?”
“그렇습니다, 전하. 기병들은 일본에 가고 싶어 해도 왕명을 따라야 하니 어쩔 수 없지요. 원래 여진족 막으라고 키우는 북방 기병 아니겠습니까? 허나 함경도와 평안도에 돌아갈 때쯤 교대 시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함경도로 북상하다가 적당한 곳에서 해산시켜 집에 돌려보낼까 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조정 대신들은 곧이곧대로 기병들을 집에 돌려보내라고 하니, 일본에 대한 복수는 헛말인 것 같고 과연 황제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흠. 그래요? 유 제독 잠깐 와보시오.”
오응태가 말을 비비 꼬는 것에서 이민호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굳이 조선국왕이 아닌 황제폐하에 대한 충성심 운운한 것도 걸렸다. 그래서 총병 유정을 불렀더니 잽싸게 달려와 이민호 앞에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든 하명해주십시오, 대인.”
“동래까지 여진 기병들을 인솔한 조선 기병 5천이 있지 않소? 그들이 북방으로 가서 곧 교대한다고 하오.”
“예? 천군이 멀리까지 원정을 왔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번 보복전쟁의 제일 당사자인 조선군이 집에 돌아가서 놀다니 말도 안 됩니다!”
“그러니 제독이 조선 국왕 전하께 자문을 보내 항의하도록 하시오.”
고산국에서 직접 조선에 항의할 수는 없지만, 명나라에서는 이 문제로 항의할 자격이 충분했다.
“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왜적 60만 이상을 상대해야 할 전쟁을 앞두고 조선 기병 5천을 빼돌리다니, 너무합니다. 하오나 곧 출정해야 해서 그 사이에 조선 국왕의 명령이 돌아올 시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요. 왕명이 오려면 한참 걸릴 테고 이들은 원래 집에 가기로 되어 있었으니 강제로 데려가면 사기가 떨어질 것이오. 그러니 이들을 자원자에 한해 고용하면 어떻겠소?”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자문에도 그렇게 하겠다고 통보하겠습니다.”
이민호는 유정이 조선국왕을 무척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은근히 배알이 꼴린 이민호가 물었다.
“유 제독은 대국의 장수로서 아주 당당하시구려.”
“조선이야 뭐 대명에 신세를 진 게 많지 않습니까? 대명의 제독인 제가 떳떳하게 요구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진 기마병 지휘관이 없으니 이 장수를 지휘관으로 삼아야겠군요. 당신! 나한테 자주 인사하러 온 것으로 봐서 이번 원정에 참가하고 싶은 거지? 참가하고 싶어 죽겠지?”
“꼭 참가하고 싶습니다. 왜적들을 쳐부수고, 그 동안 저한테 까불던 여진족 놈들도 족치고 싶습니다.”
이민호가 오응태에게 무슨 소린가 물어봤다. 오응태 말로는 조선 기병 지휘관 자격으로 여진 기병을 통솔하기 어려웠으나, 고산국왕의 명령을 받으면 여진 기병을 통솔하기 쉬울 거라는 희망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오응태 마음대로 여진 기병을 다룰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여진족이나, 함경도와 평안도 기병이나 거칠기는 마찬가지였다. 거친 사내놈들끼리 어떻게 서열을 정리할지 이민호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독립국인 조선국의 군권을 침해할 수도 있는 사안이므로 이민호와 유정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이민호는 이항복과 협의해서 가장 적당한 방법을 고민했다.
결국 유정의 불만이 가득한 자문을 받은 파발이 한성으로 달리고, 오응태는 신이 나서 동래로 향했다. 월봉으로 은 석 냥을 제시했더니 함경도와 평안도 기병 5천 기 중에서 3천여 기가 원정에 참가하겠다고 자원했다. 말과 활은 모두 개인 자산이니 비번 때 사용해도 상관없었다.
결국 북방 기병 3천을 고용해 조선군도 아닌 원정군 직할 마군으로 편성했다. 이민호가 직접 지휘하기 어려워, 도원수 이항복에게 동의를 받아 함경도 방어사 오응태를 원정군 마군대장으로 임명했다. 여진 기병 2만까지 합해서 용병으로 고용한 기병 세력이 2만 3천으로 늘어났다.
“오 방어사는 고산국의 무기를 좀 알지요?”
“물론입니다, 전하. 보병총과 기병총, 유탄, 기병포까지 다 압니다. 제가 곧 임기만 끝나면 고산국으로 갈 테니까요. 제 자리 있지요? 헤헤!”
“다른 양반들은 남아있을 가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걱정하던데 말이오.”
“불법도 아닌데 어쩌겠습니까? 조선에 남은 사람들도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요.”
이민호는 오응태에게 고산국 3연대에서 기병 1개 대대를 뽑아주었다. 시간이 생명이라 웬만한 성곽은 지나치는 편이 낫지만 혹시라도 포위되거나 반드시 함락해야 할 성이 있게 될 가능성에 대비해 포병대까지 딸려 보냈다. 오응태가 입이 찢어질 정도로 좋아했다.
한산도에서 작전협의를 마치고 이민호만 배를 타고 조라포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옛 부하들과 만나서 회포도 풀 겸, 앞으로 조선 수군과 합동작전을 많이 수행할 예정이므로 세세한 협의도 할 겸 한산도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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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바로 출발시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