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6 37. 일본 정벌 준비 =========================================================================
다음 날 아침, 좋은 말할 때 얼른 돌아오라는 혜진의 말을 전한 전령이 고산국 왕도로 돌아갔다. 서류와 씨름하고 있을 혜진이 불쌍했지만 이민호가 해중국 영역에서도 할 일이 많았다.
먼저 오전에 해중국 궁성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진 작은 학교를 불시에 방문했다. 마침 쉬는 시간이었는지 주로 조선과 일본 출신, 그리고 가끔 원주민 아이들이 교실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다들 교복을 입었는데 이것이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도 있었다.
“교복이 너무 단순한 것 같소.”
“다른 도안을 봤습니다만, 보수적인 학부모들이 걱정할 것 같아 선생들과 협의를 통해 가장 무난한 종류를 골랐습니다.”
허둥지둥 뛰어나온 교장 선생의 안내를 받아 이민호 일행이 복도를 지나갔다. 이민호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들은 창가로 고개를 내밀면서 민영과 호위들이 예쁘다고 난리였다. 그러나 수업종이 치자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갔고, 교사들이 수업을 시작하면서 학교 전체가 조용해졌다.
“교장 선생님! 남학생 비율이 너무 높은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요?”
“조선과 일본 출신 부모들에게는 충분히 설득해서 남녀 가리지 않고 학교에 나옵니다. 하오나 몇몇 원주민 부족들은 어린 딸을 절대 마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습니다.”
“혹시 예전에 신부를 납치해 결혼하던 악습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 거요?”
“예. 지금은 불법이지만 아직 원주민들을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원주민 마을 안에 학교를 세워야겠으나 아직은 교사 인력이 부족합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30대 후반의 교장이 설명했다. 교장은 상투를 틀고 있는 것을 괜히 죄스러워했다.
“원주민 교사를 양성한 다음 차차 원주민 학교를 늘리도록 합시다. 의무취학 연령 아동들은 다 학교에 다니고 있지요?”
“물론입니다, 전하. 사람마다 농지가 배정되니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지주, 부모가 소작농인 셈입니다. 일손 도우라고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내는 것은 소작농이 지주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설득하니 부모들이 여자애들까지 학교에 보내고 있습니다.”
“큭큭! 그렇게 볼 수도 있군요.”
가정에 아이가 늘어나면 경작지가 자동으로 늘어났다. 원주민을 빼곤 백성 대부분이 이민자이며, 개간한 농지 절반을 놀리고 있는 고산국과 해중국에서만 가능한 제도였다. 명목상 왕토사상에 따라 이렇게 아이들 몫으로 농토가 추가로 배정됐기에 그 땅을 경작하는 부모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소작농과 같은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배울수록 좋은 직업에 취업할 기회가 많아지고 더 좋은 혼처를 잡을 수 있어 남녀 불문하고 어린아이들을 일단 학교에 보냈다. 고산국과 해중국에서 의무교육은 이 시대에 성인이 되는 나이인 16세까지였다. 그 이상부터 대학이나 다른 교육 과정인데 요즘 한창 세워지고 있어서 경쟁이 치열했다.
더구나 의무교육이 시행되고 있기에 교육비가 무료라서 대부분 학생들이 무리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나라에서 백성들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먼저 적정 수준 이상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 비용을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전가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의무교육의 이유였다. 그러나 아직도 교사가 모자라 2부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물론 교육을 못 받았다 해도 농민이나 어민, 해중국 여자들은 해녀를 하면 되기에 먹고 사는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신분제가 없는 고산국과 해중국에서도 신분 상승 욕구는 분명히 있었다. 관료나 기술자, 군 장교와 연구소에 근무하는 자들은 고산국과 해중국의 엘리트로 인정받았다.
이 시기 관료와 기술자들은 과로에 시달렸지만 혹시라도 젊은이들이 지원을 꺼릴까봐 다들 힘들어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라 전체에 만연한 인력부족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해결될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급식이 괜찮네요. 혹시 규정보다 많은 것 아니오?”
“예, 전하. 사실 규정보다 많습니다. 학부모들이 극성이라서 제 철 과일이나 해산물을 학교에 많이 가져옵니다. 자기 자식도 먹일 거라서 품질은 학교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나은 편이며 위생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민호는 점심시간 때까지 버텨서 아이들 사이에 끼여 기어코 학교급식을 얻어먹었다. 아이들 눈치를 살펴보니 국왕이 방문했다고 특별히 급식이 더 잘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애들 비만이 걱정되는군요. 적당히 먹이고 적당히 운동을 시키세요.”
“예, 전하. 방학 때마다 왕도에 가서 교육방법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공부보다는 그저 많이 먹고 많이 뛰어놀게 하겠습니다. 에, 그렇다고 수업을 등한시하지는 않습니다.”
현대 대한민국의 초등학교와 달리 고산국과 해중국에서는 담임교사가 대부분 과목을 가르치지 않았다. 교육제도가 앞서나가서 교과 전담제를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이 아직 초등학생들에게 모든 과목을 가르칠 수준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최 선생이 교과서 외에도 교사들을 위한 학습지도서를 만들어 일일이 가르쳐야 했다.
학교에서 유일한 한문선생이기도 한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은 일 년에 세 번 있는 방학 때마다 교육대학에 가서 강의를 받고 토의를 해서 꾸준히 실력을 양성했다. 조선에서는 나름 지식인이라는 중인 계층 중에서도 일부만 산학을 배웠기에 특히 수학을 새로 배워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의 고충이 심했다.
어수선한 건국 초의 분위기는 교육계도 마찬가지였다. 학교를 세우면서 처음 교사를 모집할 때 한글을 쓰고 읽을 정도면 웬만하면 받아들인 탓에 실력이 없거나, 반대로 너무 뛰어난 교사들이 같은 학교에 뒤섞여 있었다. 본격적으로 학교를 열기 전에 최 선생과 그 동료들이 교사들을 먼저 교육시켰고, 이후에도 방학 때마다 재교육을 시켰지만 평균적인 교사들이 학생을 가르칠 수준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교사 인력이 만성적으로 부족해 예국에서는 능력이 떨어지는 교사들을 제대로 가려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일단 수준을 끌어 올리기에 바빴다.
점심 먹고 남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피구와 배구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 이렇게 실컷 놀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공은 고무나무 수액에서 뽑아 천연고무로 만든 단순한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 학교에 간호교사가 배치되는 것이 좋지 않겠소? 학교 위생 상태도 관리하고 말이오.”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 수 있으니 그게 좋겠습니다만, 간호사 같은 고급 인력은 큰 병원에나 좀 있지 작은 병원에도 없습니다.”
“내가 잘못했소. 지역 보건소부터 지어야겠구려.”
먼저 의사 인력을 키우느라 바빠 간호사 교육은 좀 늦게 시작했다. 그래서 겨우 6개월 정도 배우고 병원에 배치된 간호사들은 인력부족으로 거의 장인이나 의사들 수준으로 장기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산국과 해중국에서는 이렇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산국은 인구가 적고, 그마저 아직 직업훈련이 덜 되어 있었다. 이민호는 유대인들이 빨리 이주해 와서 교육 분야에서 활약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카이펑 외에 닝보나 다른 몇몇 지역에도 유대인 공동체가 있어서 이들도 고산국에 이민 올 것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교사들과 작별한 이민호는 항구 입구 언덕에 선 요새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 말에 올랐다. 네덜란드나 영국, 혹은 일본이 침공해온다면 북쪽 끝인 이 요새가 가장 먼저 적을 맞게 될 것이다. 이민호는 고산국이 아닌 해중국에 처음 설립한 어업연구소를 향해 말을 몰았다.
“주인님! 서양 범선 여러 척이 공격해 와도 저 요새가 버틸 수 있을까요?”
“민영이는 함포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거지? 요새에는 같은 대포라도 배에서 쏘는 게 아니니까 잘 맞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배들은 크고 두껍잖아요. 영국과 네덜란드도 비슷한 배를 쓴다던데 그런 배들이 쳐들어오면 어떡해요?”
“대포에 맞기만 하면 다 깨지니까 걱정 마. 판재를 재보니까 서양 범선보다 판옥선이 더 두꺼웠어.”
함포의 위력은 걱정이 없는데 명중률이 떨어져 문제였다. 전기 모터가 달린 주포안정기를 개발하면 함포 명중률도 뛰어오를 텐데 아직 개발을 마치지 못했다. 그래도 요새에서 3인치 포를 발사하면 해상에서 쏠 때보다 명중률이 훨씬 높았다.
상식과 달리 범선이 동아시아 선박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한 것도 아니었다. 역사상 17세기에 서양 범선들이 동양의 함선들에게 격파된 사례는 세 번이었다. 한 번은 1661년 대만 남쪽에 세워진 네덜란드의 질란디아 요새를 정성공 함대의 포위로부터 구하기 위해 바타비아 즉 자야카르타에서 보낸 네덜란드 증원 함대 중에서 두 척이 가라앉았다. 1643년 베트남 응우옌 정권이 북쪽의 찐 정권과 싸우는 도중 응우옌의 얼마 안 되는 수군이 찐 정권을 돕는 네덜란드 함선 세 척을 격침시켰다.
한 번은 1604년 조선에서 있었다. 통영 앞바다 당포에서 판옥선 25척이 대형 범선 한 척을 공격했다가 끝내 나포해 나중에 당포전양승첩도가 그려졌다. 그 범선의 정체는 서양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건조되고 캄보디아에서 무역을 마치고 돌아오던 일본 배였다. 그러나 선주는 중국인, 항해사는 포르투갈인, 병사는 일본인으로 다국적으로 구성됐다. 저항하던 일본인들 대부분이 사살되고 나서 나머지 선원들이 항복하자 조선 조정에서 포로들을 일괄적으로 명나라로 송환했다.
<당포전양승첩도>로 검색해보면 임진왜란 기간 중에 발생한 당포해전이라고 설명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해전에 참가한 수군 장수들의 이름과 통제사 이경준으로 판단할 때 1604년의 사건이 맞다. 그리고 판옥선들 가운데 포위당한 커다란 배도 분명히 서양식 범선이니 임진왜란 당시 상황이 아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전하!”
이번에 어업연구소장으로 승진한 중년 어부가 이민호 일행을 맞아들였다. 어업연구소는 원래 해삼과 전복의 종묘, 종패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그 동안 다른 어패류의 종묘 생산을 연구하다가 지금은 어업연구소로 확대돼 고산국과 해중국의 해양수산 업무를 총괄했다. 물고기나 조개류뿐만 아니라 그물이나 낚싯줄 등 어구 분야도 연구하는 곳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민물 장어 새끼들을 잡아서 키우고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구경 좀 합시다.”
“밤에 횃불을 키고 선창가를 돌아다니면서 삼베를 그물로 만든 잠자리채로 채집했습니다.”
어업연구소 뒤쪽에는 양어장 같은 시설 여러 개가 설치돼 있었다. 일부러 그늘을 친 곳에 작은 욕조가 있었고, 새 물이 흘러 들어왔다가 촘촘한 그물을 지나 빠져 나갔다. 그 안에 작고 투명한 것들이 꼬물대고 있었다.
“하온데 전하! 민물 장어들을 잡아 배를 가르면 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물고기처럼 인공 수정시켜서 새끼들을 양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산란장을 찾아 대량으로 새끼들을 채집하겠습니다.”
“그건 불가능할 테니 아예 시도조차 하지 마시오. 연어는 잘 키우고 있소?”
현대에도 불가능한 민물장어 인공수정을 시도하겠다는 어업연구소장은 실로 용감한 사내였다. 아시아의 민물장어는 마리아나 해구 근처에서 알을 낳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산란장의 위치는 현대에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어업연구소장은 의욕에 넘쳐 갖가지 일을 벌이고 있었다. 아이누 섬의 해삼이 더 비싼 가격을 형성하자 어업연구소장이 해삼 몇 가지를 교배시켜 돌기가 많으면서도 더운 바다에서 자라는 해삼을 만들겠다고 설친 적도 있었다. 이민호는 그게 가능하더라도 아이누 섬 사람들은 뭘 먹고 사느냐고 다그쳐 그 연구를 중단시켰다.
“예. 동서 해안의 하천들 중에서 적당한 크기를 골라 연어 치어를 키우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세 치가 넘으면 치어를 방류할 예정입니다. 하오나 천적이 적은 강에서는 그 전에 방류해도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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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한 회 더 올려야 마칠 것 같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