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2 36. 소 해적시대 =========================================================================
국왕좌승함이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신임 총독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가 황급히 배에 다가와 이민호에게 문서를 건넸다.
“국왕전하! 이것은 팡가시난 지역에 대한 통치권 위임장입니다.”
“예? 그곳은 필리핀 총독부의 영토 아닙니까?”
이민호가 비올레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민호를 지켜보고 있던 비올레타가 고개를 홱 돌려 콧방귀를 뀌었다. 이래저래 많이 삐친 모양인데 스스로 한 결정을 물리는 변덕을 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커험! 지참금으로 땅을 넘기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물론 못난 딸을 시집보내려면 필리핀 땅을 다 넘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빠!”
비올레타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다시 선실로 돌아갔다. 선착장에서 딸을 떠나보내는 그녀의 어머니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저는 영주가 아닌 총독에 불과합니다. 영토를 늘리는 것도, 그 영토를 다른 나라에 넘기는 것도 모두 멕시코 부왕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아! 네.”
“지난해에 팡가시난 지역 주민들이 총독부에 청원해서 멕시코 부왕에게 문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제대로 허가를 받아 고산국에 통치권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곳도 필리핀의 영토일 텐데 굳이 고산국에 넘기는 이유가 있습니까?”
“팡가시난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매년 총독부에 반란을 일으키던 지역입니다. 뜻밖에 그 지역 주민들이 국왕전하께서 다스려주길 원해서 멕시코 부왕이 고산국에 넘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에 들러보시고 앞으로 잘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
팡가시난은 바기오 남서쪽 지방으로 다구판, 링가옌 등이 포함된 평원 지역이었다. 경기도의 절반 넓이로 비옥한 아그노 강 유역은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농경지로 개발이 가능했다.
팡가시난은 루손 섬 북부를 지배하는 고산국 입장에서 몹시 신경 쓰이던 지역이었다. 그 지역 특유의 역사와 리마홍의 후예라는 인구 구성 때문이었다.
명나라 해적 두목 리마홍(林風)은 광둥성 동쪽 끝 차오저우(潮州)에서 태어나 해적들을 규합해 1570년대에 광동과 복건 지방을 노략질했다. 그는 1574년에 마닐라를 공략했다가 포기하고 팡가시난 지역에 왕국을 세워 원주민들을 다스렸다. 그러나 1575년에 몇 달 간에 걸친 혈전 끝에 후안 데 살세도가 이끄는 에스파냐 원정군에 의해 해적 대부분이 죽고 리마홍은 바다로 도주했다.
그런데 리마홍의 부하 해적들이 팡가시난에 정착한 겨우 1, 2년 사이에 원주민 여자들과 혼인을 하면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 피로 연결되었다. 원주민들이 리마홍의 해적들을 침략자로 여기지 않고 지배자로 받아들인 탓에 혼혈이 원주민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그리고 대량으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해적들이 몰살당하거나 극소수만 살아서 쫓겨난 지금도 팡가시난 지역에서 리마홍의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이제 겨우 성인이 되는 리마홍의 후예들이 팡가시난의 지배층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 펑!
마지막 예포가 발사되는 순간 국왕좌승함이 선착장을 떠났다. 갑판에 오른 이민호가 손을 흔드는 사이 비올레타는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닦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배가 안 보일 때까지 끝없이 손을 흔들었다.
고산국 함대는 그 날 오후에 산토 토마스 항구에 도착했다. 이곳에도 원주민들을 위한 시장을 열었더니 올 때마다 항구도시가 해안을 따라 급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기오 개발에도 바쁜 판에 노동력을 돌려 이곳도 어느 정도 도시 기능을 하도록 봐줘야 했다.
“왕의 후예이시여! 저희들도 다스려 주십시오.”
“무슨 소리요? 나는 왕이지만 왕의 후예는 아니오.”
산토 토마스에 도착했더니 여러 지역에서 몰려온 부족장들이 이민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갈로그어가 통하지 않아 통역 두 명을 세워놓고 부족장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혹시 필리핀 총독에게 건의한 팡가시난 사람들이오?”
“그렇습니다. 비록 선대의 약속이라 하나 전 왕께서 불행하게 되셨으니 후대에서라도 그 약속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이민호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이민호, 중국명 리민하오가 리마홍과 흡사한 발음이긴 했다. 진작 알았으면 초반에 유용하게 써먹었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영토가 늘어나고 다른 지역에서 주민들이 찾아올까봐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오해하신 것 같소. 나는 리마홍도 아니고, 그의 후예도 아니오. 나는 명나라 광동 출신이 아니라 조선에서 태어났단 말이오.”
“오! 리마홍 왕께서 조선까지 가셨군요. 역시 그 분은 바다의 왕이십니다.”
부족장들과 도무지 말이 안 통했다. 그러나 대화를 길게 이어갈수록 이들이 굳이 리마홍의 후예를 기다린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다만 필리핀 총독부와 지난 20년 동안 원수를 졌고, 가까운 북쪽에 강대한 세력이 들어서자 리마홍을 고산국과의 연결고리로 삼은 것에 불과했다. 상황이 대충 이해가 되자 이민호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어쨌든 필리핀 총독이 그대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팡가시난 전 지역이 고산국의 통치권 아래로 들어왔소. 그러니 앞으로는 바기오에 파견된 고산국 총독대리의 명을 따르기 바라오. 리마홍과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대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여 앞으로 영원히 보호해주겠소.”
“국왕전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부족장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팡가시난 지역이 고산국과 연결되는 유일한 고리인 리마홍을 억지로 끼어 맞춘 것에 불과했지만 주민들의 충성심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루손 북부 지역이 고산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고산국 영역에 속하는 것이 원주민들에게 오히려 특권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런 결과가 생겼다.
“좋소. 그러나 나는 영토를 확장할 생각이 없고, 에스파냐와 잘 지내기로 했으니 그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킬 일은 자제하도록 하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온데 국왕전하께서 마닐라를 거의 속국화했다고 들었습니다. 마닐라 총독이 공주를 국왕전하께 바치면서 보호해주기를 애걸했다고 하니 국왕전하께서는 선대 리마홍 왕에 못지않은 대왕이십니다.”
“공주요? 아! 비올레타 영애 말이오?”
비올레타는 확실히 이민호와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 100km 넘는 이곳까지 바로 전해지지 않았을 테니 그 전에 비올레타가 고산국에 간 것을 뜻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국가끼리 우호 증진을 위해 서로 도와주고 하는 일이 늘어나는 법이오. 그리고 비올레타 영애는 고산국 왕도에 일하러 가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다시 통역 두 번 또는 세 번을 거쳐 부족장들에게 이민호의 말이 전해졌다. 같은 나라 안에서 통역을 거친다면 몹시 답답한 일이었다. 팡가시난 지역에도 타갈로그어가 통했으면 나을 뻔했다.
문제는 언어인데 팡가시난 안에서도 여러 가지 언어가 통용된다는 것이었다. 당장 올해에 학교를 세워 먼저 각 부족에서 지원자를 받아 교사들부터 교육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통역용 공통언어 링구아 프랑카를 조선말로 하고 각 지역 언어를 보존하도록 결정했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옛 시대에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한 경우는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현대 한국에서 일하는 연변 조선족들은 대학을 안 나왔더라도 중국어와 조선어 모두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이민호가 일반 주민들에게도 조선말을 가르치려는 것은 세력 증강을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언어가 통한다면 더 친숙함을 느끼기 마련이었고, 장기적으로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팡가시난 지역 부족장들에게 선물을 쥐어 돌려보내고 이민호는 호위대만 이끌고 바기오로 향했다. 도로는 지난번보다 더 잘 닦여 있었고 꾸준히 마차들이 오갔다.
이민호는 산토 토마스에서 만 건너편 서쪽으로 20km쯤에 헌드레드 아일랜드 국립공원이 있다고 알고 있었다. 가본 적은 없고 사진으로만 봤을 때 푸른 바다에 점점이 흩어진 열대의 섬들은 지상낙원이나 다름없었다. 평화로운 시절이라면 휴양지로 결코 부족하지 않은 곳이라서 고산국 군인들을 위한 휴양지로 건설해볼까 고민했다.
“전하! 아무리 원주민들을 간접지배 형식으로 통치한다지만 겨우 관리 몇 명이서 다스리기에는 너무 넓습니다. 바기오를 지키는 병력도 겨우 100여 명에 불과합니다.”
예국에서 실무를 익힌 정문부가 이번에 바기오에 와서 총독부를 열었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정문부는 정열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넓긴 하지요. 그런데 이곳 남서쪽에 팡가시난이란 지역을 알고 있소?”
“예. 농사짓기 좋은 땅이라 인구가 많은 곳입니다. 원주민들의 기질이 사나워서 충돌하지 않도록 자제시키고 있습니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아마 안 좋은 일 같소. 그 지역 통치권을 위임받았소.”
이민호는 정문부의 턱이 빠지는 줄 알았다. 고산국에서 갈아 넣는 것은 공돌이들만 국한하지 않았다. 관리들도 적은 인원에 넘쳐나는 업무로 죽어 나갔다. 특히 바기오는 새로 영토로 편입되고 워낙 넓은 지역이라 지금의 인원만으로는 기초적인 관리조차 버거워했다.
“허! 어이가 없습니다. 그럼 문무에 걸쳐 인원을 보충해주십시오. 마카오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 쓸 만한 것 같습니다. 이곳으로 몇 명 배정해주십시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좋소. 마카오 대학 출신은 당분간 중앙 관료로 키울 예정이니 총독부에 배정하기 어려울 것 같소. 부족한 인원은 정 총독이 조선에서 아는 사람을 초빙해오든지 하여튼 총독이 알아서 충원하시오. 다만 총독의 가신이 아니라 국가 관료제도에 속할 것이오.”
“당연히 국가에 속한 관료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곧 일본에 원정군이 가야 할 테니 무관을 부르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정 총독도 원정군에 참가해야 되는 것 아니오?”
“여길 내버려두고 전쟁에 참가하라고요, 전하? 보내신다면 가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엉망이 되기 전에 후임자부터 정해주십시오.”
“아, 아니오.”
현직 총독 이름으로 부대 일부를 나눠 지휘하려던 이민호의 계획이 무산됐다. 관료들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키다 보니 이렇게 이민호 마음대로 못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함대는 이틀 후에 고산국 왕도에 도착했다. 여러 곳을 들르느라 긴급 출동한 것치고는 작전일수가 꽤 늘어났다. 어느덧 일본 원정이 코앞에 닥쳐오고 있었다.
“칙서가 책상에 쌓여 있군.”
“명나라 칙사들 꼴 보기 싫어 죽겠어요. 칙사인지 상인인지 모를 저들 때문에 옥 도자기와 비단을 더 생산해야 해요. 덕분에 장인들이 너무 힘들어 해요. 차라리 배를 곯더라도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장인들도 있어요.”
집무실에 도착하니 명나라 황제가 보낸 칙서 여러 개가 책상에 쌓여 있었다. 명나라 예부와 병부, 제독부에서 보낸 실무 자문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 동안 자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간단한 보고서로 정리한 혜진의 입이 댓 자나 나와 있었다.
“물건을 사주는 손님인데 너무 뭐라 하지 마. 그리고 설마 장인들이 조선으로 돌아가지는 않겠지.”
“지금 명나라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어요.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을 핑계로 세금을 두 배나 올렸어요. 그리고 은을 캔다고 환관들을 각지로 보내 민폐가 말이 아니에요. 그리고 소금 가격을 몇 배로 올렸어요.”
“아직도 그러는군.”
“남들이 보면 명나라가 일본 원정에 전력을 기울인다고 오해하겠죠. 하지만 환관들이 고산국에 들락거리면서 사치품 장사나 하고 있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고산국 왕도에서 국내 가격에 사서 북경에 가져가 팔면 꽤 많은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래서 환관들이 칙사로 뽑히기 위해 황제에게 바치는 은의 양이 몇 만 냥 단위를 이미 넘어갔다.
가장 최근에 온 환관은 황제에게 10만 냥 넘는 은을 바치고 칙사로 왔다고 한다. 칙사들은 돈에 눈이 뒤집혀서 칙서를 궁성에 던져놓고 시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나? 혹시 명나라에 반란이 일어난 곳은 있어?”
“사천은 잠시 수그러들었어요. 대신 절강에서 분위기가 흉흉해요.”
한숨을 내쉰 이민호가 칙서 내용을 살폈다. 대부분 일본 원정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뜻밖에 섬라가 적극적으로 병력을 파병했다. 이민호는 섬라가 조공 횟수를 늘리길 원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동지역을 배회하던 여진족 2만을 의외로 쉽게 고용했다. 여진족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국경지대를 거쳐 일부 가족들을 동해국에 머물게 하고, 동해안 폭이 좁은 길을 따라 동래로 향하고 있었다.
오응태가 방어사로 임명돼 여진 기병들을 이끌고 있는데 기병들이 민가를 약탈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숱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래서 여진 기병을 함부로 고용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겠다.”
“주인님은 궁성에 남으면 안 되나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잉~ 주인니임~”
혜진이 이민호의 무릎에 앉아 애교를 부렸다. 이민호는 오랜만에 혜진의 몸을 만졌다. 혜진은 어느새 다 큰 처녀가 되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해적시대 편은 이번 회로 간단히 끝났습니다.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