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1 36. 소 해적시대 =========================================================================
장례식을 마치고 성당에서 나온 이민호는 로하스와 부하들이 갇힌 감옥에 구경 갔다. 땡볕이 내리쬐는 땅속 좁은 감옥에는 변기가 따로 없어 똥오줌 냄새가 지독하고 파리가 들끓었다.
로하스와 심복 부하 두 명은 어제 고문을 받아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피 흘린 상처가 더러운 것에 노출됐으니 며칠 안으로 살이 썩어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늘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로하스에게 이민호가 말을 건넸다.
“땅 밑에서 잘 지내나, 페드로? 엉터리로 총독이 됐다고 기고만장하더니 꼴좋게 됐구나.”
“고산국 왕이로구나. 네 놈 때문에 내 계획이 다 무너졌다! 신을 믿지 않는 주제에 거대한 부를 소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욕이야!”
“무슨 소리? 난 유일신 FSM을 믿고 있는데. 그런데 너는 탐욕이 끝이 없구나. 네놈은 종교를 핑계 삼아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자다. 너 솔직히 신을 믿지도 않잖아?”
이민호의 말을 스페인어로 통역해주는 해병 장교가 몹시 당황하면서 어찌 어찌 통역을 마쳤다. 호위 중에 두 명이 비올레타에게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는데 아직 통역에 나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비올레타가 조선말을 훨씬 잘 했다.
어제 로하스와 심복 부하들이 조사라는 명목으로 온몸에 채찍질을 당하는 고문을 받았다. 그래서 결국 로하스가 무리를 해가며 총독이 된 목적을 밝혀냈다. 다만 중국인 해적들과의 연결 고리는 파악하지 못했다.
로하스의 최종 목적은 마닐라 전체에서 동원한 에스파냐 병력으로 고산국을 기습 공격해 궁성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고산국 궁성과 수도의 지도를 다 만들어놓았고, 이번에 로하스가 총독까지 됐으니 거사만 일으키면 되는데 아깝게 됐다고 자백했다.
로하스와 달리 추종자 2명은 마닐라가 고산국과 본격적인 전쟁을 한다면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고산국 궁성을 약탈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그 다음 에스파냐가 아닌 유럽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떵떵거리며 살 꿈에 부풀어 있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믿는 자는 야만인 이교도일 뿐이야!”
“이슬람이나 FSM이나 다 예수님을 인정하는데? 에이! 재미없는 종교 이야기는 그만 하고. 해적 포로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말이야. 마닐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널 존경한다던데, 정말이야?”
명나라 국적의 해적들은 필리핀 총독부로 인계된 후 간단한 조사를 마친 다음 즉시 처형되었다. 전임 총독의 장례식 전에 해적들을 죽이지 않으면 흥분한 에스파냐 병사들이 중국인 거주구역을 공격해 학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판단한 신임 총독은 해적들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처형 명령서에 사인하고 말았다. 사형은 총살로 집행됐다.
“후후! 멍청이들은 그 동안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자기들을 탄압한 줄 알아. 내가 민정장관으로 지낼 때 걸핏하면 병사들을 동원해 놈들을 실컷 두들겨 팼지. 그러면서 총독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몹쓸 짓을 한다고 사과했더니 깜빡 속아 넘어가며 고마워하는 거야. 그때부터 중국인들은 내 말만 믿었지.”
“정말 멍청하군.”
“그렇지! 그뿐만이 아니야. 작년에 내가 법관에 임명됐을 때는 일부러 판결을 비비 꼬았지.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판결을 내려야 하니까 거의 법관 마음대로인 사건이 꽤 많아. 그래도 죄 지은 놈은 대충 알 수 있어. 그럴 때 죄 지은 놈은 무죄, 죄 없는 놈은 유죄, 이렇게 판결을 내렸어. 크크! 이러니 총독이 제 아무리 중국인들에게 잘 해줘봤자 중국인들은 총독을 믿을 수가 없었던 거야. 원한만 쌓였지.”
“이런 비밀스런 이야기를 내게 해줘도 되는 거야? 내가 법정에서 증언하면 너한테 불리하잖아.”
“너는 이교도 외국인이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너는 갈 수도 없는 멕시코의 재판정에서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간단히 끝이니까.”
“하느님 맙소사!”
총독의 갤리선에 타고 있다가 해적들에게 사로잡혔던 총독의 비서 후안 데 쿠엘라, 그리고 프란치스코회 신부 몬티야가 바로 옆에서 듣고 있었다. 노련한 몬티야 신부는 열심히 기록하고 있는데 착한 쿠엘라가 너무 놀라 성호를 긋다가 로하스에게 들켜버렸다.
“누구야? 밖에 에스파냐 사람이 있지?”
“응. 신부님이 지금까지 네가 자랑한 말을 적고 있었어. 고해성사가 아니니까 재판정에서 증언해도 상관없겠지.”
“아니야! 내 말은 좀 과장됐어! 남자들이 술집에서 큰소리치는 것과 같아! 허황된 개소리였어!”
“그래. 너는 그 동안 재판과 행정을 통해 마닐라를 분열시켜서 몇 년째 중국인들과 화해하기 위한 총독의 노력을 무력화했다. 증언으로 인해 네 형량이 늘어날 가능성은 적어. 하지만 너를 대하는 간수들의 자세가 좀 달라지겠지.”
이를 빠드득 갈고 있는 에스파냐 병사들이 입은 아래 갑옷은 딱 왜병과 같은 치마 형식이었다. 병사 두 명이 철창 틈새로 할버드의 자루 끝을 내리더니 로하스의 몸에 내리찍었다. 이민호는 로하스의 비명을 뒤로 하고 감옥을 떠났다.
오후 늦게 국왕좌승함 집무실로 비올레타가 이민호를 찾아왔다. 상복을 벗은 비올레타가 입은 갈리시아 옷은 북유럽 민속의상, 구체적으로 네덜란드나 덴마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하! 저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마닐라에 남겠어요. 그 동안 감사했어요. 주상아 공주님께 보낼 편지를 준비했으니 전해주세요.”
“잘 생각하셨소. 주상아 공주께서 몹시 섭섭하시겠지만 내가 잘 말해주겠소.”
비올레타가 확실한 결정을 했는지 총독 관저에서 일하는 에스파냐 하인과 하녀들이 그녀의 짐을 선착장으로 실어 날랐다. 이민호는 아쉬웠지만 비올레타에게 잘 살라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제 앞으로 전하를 만날 일이 거의 없겠어요. 아버지가 임기 몇 년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저도 따라가야 할 테니까요.”
“비올레타 양과 함께 있으면 즐거웠는데 참으로 아쉽소.”
비올레타가 이민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울 듯 말 듯한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민호의 손을 잡아끌어 국왕의 침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보조침대에 앉아 기지개를 키고 있던 민아가 화들짝 놀라 큰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비올레타가 이민호에게 안겨오더니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이민호도 그녀에게 키스를 하면서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입을 뗀 비올레타가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당신은 강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마닐라 시민들을 대표해서 당신께 감사드려요. 그러니 저를 안아주세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나도 당신을 원하긴 하나 마닐라를 위해준 사례로 안고 싶지 않소. 전에 말했듯이 당신은 물건이 아니요.”
“오늘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어요. 저를 안아주시면 평생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어요.”
“당신은 사랑스런 여자요. 그러니 평생 사랑할 남자와 첫날을 함께 하시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이민호는 몹시 아쉬웠다. 이민호의 눈길이 가는 곳을 느낀 비올레타가 살짝 가슴을 열었다.
“어때요? 하지 않겠어요?”
“크고 아름답소.”
이민호가 탄력 넘치고 뽀얀 비올레타의 가슴에 입을 맞췄다. 말랑말랑한 것 여러 곳에 입을 맞추다가 작은 꼭지를 입에 넣고 혀로 굴렸다. 이민호가 보고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눈을 감은 채 격하게 숨을 몰아쉬는 비올레타의 몸이 무너지려 해서 침대에 눕히려다가, 계속 세운 채로 애무를 했다. 일단 눕히면 약속과 달리 그녀를 진짜로 안게 될까 걱정된 탓이었다.
“전하! 어서 저를......”
“성의는 충분히 받았소.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소.”
이민호가 비올레타의 가슴을 여며주었다. 이민호는 무척 아쉬웠지만 눈물을 머금고 비올레타를 떠나보내려 했다. 비올레타가 고개를 숙이더니 홍조를 지었다.
“하지만 전하의 그곳은......”
“지금 몹시 곤란하지만 다른 후궁이 해결해주겠지요. 아니면 혼자서 해결하거나. 그러니 안심하고 어서 돌아가시오.”
“너무하세요!”
비올레타가 이민호를 뿌리치고 침전의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고 나갔다. 바깥 집무실에 남아있던 민영이 놀란 눈으로 침전 안을 들여다 본 다음 문을 닫았다.
“민아 거기 있지? 얼른 침대로 올라와. 어서!”
“네! 주인님!”
이민호가 허둥지둥 옷을 벗는 것을 보면서 민아가 잔뜩 기대하며 침대에 올라갔다. 이민호는 옷을 채 벗기도 전에 침대로 뛰어들었다.
다음 날은 고산국 함대가 마닐라를 떠나는 날이었다. 인트라무로스의 남북 방향에 위치한 요새 두 곳에서 차례로 예포를 발사하고, 병사들이 항구에 도열해 필리핀 최고의 맹방에게 최상의 예우로 환송했다. 마닐라에 거주하는 모든 에스파냐 사람들이 선착장에 몰려나와 전선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선착장에 접안한 국왕좌승함을 마지막 순서로 두고 전선들이 한 척씩 항구를 떠났다. 전선에 탑승한 해병과 수병들이 예복을 입고 상갑판에 올라와 마닐라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 못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걱정 마시오, 총독. 비올레타 양은 잘하고 있습니다. 뭐든 열심히 배우고 고산국에도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어제 화를 내면서 돌아갔던 비올레타는 밤사이 다시 고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바꿨다. 새 총독이 취임해 마닐라가 안정됐다는 이유였다. 아라 공주가 고산국의 일을 하면서 유구국 무역대표부를 돕듯이 비올레타도 마닐라의 무역 일을 돕는 정식 직책까지 총독부로부터 받았다.
비올레타의 어머니는 마치 시집보내는 딸을 마지막으로 안는 듯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비올레타가 어머니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가서 잘 지내라. 종종 편지 쓰고.”
“예, 어머니. 흑!”
이민호는 비올레타가 왜 저리 슬피 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좌승함에 오르는 비올레타에게 물어보았다. 총독 관저에서 근무하는 에스파냐 하인들이 비올레타의 짐을 다시 배로 옮겨 싣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마닐라에 자주 오면 될 것 아니오?”
“이제는 달라졌잖아요!”
비올레타가 괜히 화를 내더니 갑판을 지나 선실로 향했다. 뭐가 달라졌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이민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역대표 일을 하는 동안에는 총독부에서 휴가를 안 주나?”
“아마 기독교 신자라서 그럴 거여요.”
민영이 대답했지만 이민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유럽에서는 국왕이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일부일처제를 지켜야 하잖아요.”
민영은 그 동안 외국 사정에 대해 주워들은 것이 많았다. 1521년 중종 16년 1월 24일 실록에 유럽의 결혼제도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북경에 주청사로 갔던 신상이 불랑기국, 즉 포르투갈 사신들과 대화를 하는 중에 풍속을 물어보니, 비록 임금이라 하더라도 왕비는 한 명이며 왕비가 죽으면 다시 재혼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부 사실일 수는 있어도 정확하지는 않았다. 일례로 왕비가 죽으면 국왕은 웬만하면 재혼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세시대에는 유럽의 국왕이 여러 여자들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함으로써 사실상 중혼을 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교황청에 의해 이혼이 엄격히 금지된 이후에는 왕들이 비공식적인 첩이나 애인을 두게 되었다.
심지어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들이 애인을 여럿 두고 그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귀족으로 올려주기도 했다. 이때 성직자들이 부패한 것은 교회 권력이 세속 권력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귀족 출신들은 정상적인 사제 육성 과정을 생략한 채 서품을 받아 바로 교회의 고위직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교회와 귀족의 유착에 의해 교회는 더욱 부패해갔다.
“그런데?”
“어휴! 아직도 못 알아들어요? 주인님에게 이미 여자가 많아 정식 결혼식을 못 올리니 비올레타 양이 삐칠 수밖에요.”
“응? 그럼 비올레타가 유럽식으로 내 비공식 첩이나 애인으로 지내겠다는 거야?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주인님 속마음이야 다 드러났는데요 뭐. 호호!”
민영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함장이 마치 다른 귀인들을 대하듯 비올레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른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간부들과 병을 가리지 않고 비올레타에게 며칠 전과 전혀 다른 대접을 하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누구 맘대로? 나는 좀 억울한데?”
“정말요? 그럼 비올레타 ‘귀인’께 방금 하신 주인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고.”
“입가에 침 닦으세요.”
“습! 민영이 너! 날 놀리지 마!”
화를 내는 척하면서도 이민호는 싱글벙글 웃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지만 비올레타 스스로 오겠다니 이민호는 애써 막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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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한 회로 이번 편이 끝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