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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310화 (259/1,000)

00310  36. 소 해적시대  =========================================================================

신부가 마지막 문장을 읽지 않고 전 총독의 유서를 다른 신부들에게 넘겼다. 유서를 낭독하던 신부가 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선착장에 모인 에스파냐 귀족들과 상인, 모험가와 병사들이 일제히 침을 꿀꺽 삼켰다.

이들이 투표에 참가해 로하스를 임시 총독으로 선출했지만, 총독의 직위는 선거직이 아니라 임명직이었다. 물론 봉건제 영주 같은 세습직도 아니었고 국왕의 임명권을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위임받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선거결과보다는 전임 총독의 유서가 결정적이었다.

“루이스, 내 아들이 다음 총독의 직무를 맡는다. 모든 이들에게 신의 은총을 빈다.”

“우와아!”

선착장에 모인 시민과 병사들이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비록 투표에 의해 로하스가 임시 총독으로 선출됐었지만 더욱 합법적이고 정통성 있는 총독이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로 발표된 이상 필리핀 총독은 즉시 바뀌게 되었다.

“주인님! 혹시 총독을 세습할 수 있나요?”

“아니. 비올레타가 말하길 에스파냐 국왕이 임명한다고 했어.”

민영이 묻기에 이민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권력을 독점하는 총독을 보내면서 만약 대를 이어 세습하게 한다면 거의 반드시 독립을 시도하게 된다. 영지를 사유 재산으로 여겨 외국에 팔거나 지참금으로 넘기는 꼴을 보인 유럽 봉건제가 아직 남아있는 이 시기에 그런 위험한 일을 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 혹시 에스파냐 국왕은 총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이 신임 총독을 잇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국왕과 총독이 다음 대 총독을 루이스로 하기로 미리 합의했을 수도 있겠어요.”

“신임 총독이 유능한 자라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아니면 평생 국왕에게 충성한 전 총독에게 상으로 1대에 한해 세습을 시킨다든지.”

그러나 에스파냐 국왕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이번이 필리핀 총독직을 부자 세습한 유일한 사례인 것을 감안하면 그런 추정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느 국왕도 이런 위험한 결정을 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새 총독 루이스는 마닐라에 돌아오자마자 마치 신임 총독인 것처럼 행세했고, 끝내 관철시켰다. 그는 전임 총독이 유서를 숨겨둔 곳은 물론 유서 내용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를 이을 새 총독이 될 것임을 귀띔 받았던 것이다.

“페드로 로하스 이 놈 어디 갔지?”

새 총독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전 총독의 유훈이 담긴 유서가 보관돼 있던 서재가 난장판으로 변해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로하스는 전 총독의 유서를 찾아 없애려고 시도했던 것이 분명했다.

만약 유서가 사라졌다면 페드로 데 로하스의 합법을 가장한 쿠데타가 성공할 뻔했다.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사망한 사실을 본국에 보고해 신임 총독을 보낼 때까지 최소한 1, 2년은 로하스가 총독으로 지낼 수 있었다.

이민호는 몰랐는데 로하스라는 사람은 광신도에 가깝다고 했다. 그리고 부유한 고산국을 침공해 왕궁을 약탈하고 식민지로 삼자는 주장을 마닐라에서 공공연히 펼쳤다고 한다. 비기독교국에 선교한다는 명목으로 현지 왕국의 멸망이나 식민지 등 무엇이든 허용되는 시기라서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모험가나 병사들도 꽤 있었다.

갑자기 항구를 가득 메운 에스파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로하스와 심복 두 명이 병사들에 의해 묶인 채 끌려왔기 때문이다.

로하스가 무혈의 반란을 시도한 것을 추측만 했지 아직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로하스가 체포돼 오자 새 총독부터 당황했다. 그러나 로하스를 끌고 온 병사들은 당당하게 보고했다.

“로하스가 총독부에 보관된 세금을 훔쳐 마카오로 도주하려고 했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로하스가 배에 타는 것을 거부해서 말다툼하는 동안 잡을 수 있었습니다.”

병사들이 끌고 온 말 열 마리의 안장에 걸린 자루에서 보석과 금화가 쏟아져 나왔다. 로하스는 포르투갈 상선을 타고 마카오로 갔다가 인도와 아프리카를 거쳐 유럽으로 도망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보석은 이민호가 색깔을 인공적으로 바꿔 가치를 높인 것이었고, 금화는 고산국에서 주조한 것이었다. 괜히 죄 지은 것처럼 이민호가 속으로 뜨끔했다.

“일개 모험가나 군인도 아니고 법관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당장 투옥하라! 멕시코로 보내 재판에 붙여야겠다.”

“예! 어서 가자, 이놈아!”

재판을 하더라도 형량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반란 과정에서 확실한 증거를 잡기도 어렵고 죽거나 다친 사람도 없었기에 교수형이나 총살형을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다만 공금 횡령 정도로 몇 년 노역에 처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마닐라의 감옥이 특이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다른 감옥과 다리 이곳은 철창이 천장에 있었다. 비가 오면 고스란히 맞아야 하고 말라리아모기에 노출된다. 불결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닐라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그랬듯이 로하스는 내년 봄에 멕시코로 출발하기 전에 죽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 기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더라도 범선의 비좁은 유치장에서 두세 달 동안 갇혀 있어야 하니 거의 죽었다고 봐도 됐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로하스 때문에 불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일이 끝났으니 다 잊어버렸소. 축하합니다, 신임 총독.”

“감사합니다, 고산국 국왕전하.”

“신임 총독께 취임 선물로 갤리선 3척과 선상반란에 가담했던 해적들, 그리고 갤리선 기함에 보관된 군자금을 넘겨드리겠소. 금액은 나도 모르겠소.”

로하스가 총독인 어제 오늘 넘기지 않고 계속 배에 가둬둔 해적 포로들부터 필리핀 총독부에 인계했다. 중국인 노잡이로 위장한 해적들의 얼굴을 알아본 에스파냐 귀족들이 당장 쳐 죽일 듯이 위협했다. 시체도 인계했는데 갤리선에서 포로로 잡혔다 석방된 신부와 비서가 해적 두목과 부두목들의 얼굴을 확실히 알아보았다.

그리고 군자금은 신임 총독이 알던 액수보다 오히려 늘어났다. 원정 초기에 전임 총독이 사망하는 바람에 병사와 노잡이들에 대한 급료를 한 번도 지급하지 않아 군자금이 고스란히 남았고, 오히려 해적 두목이 자금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해적 자금도 같은 배에 실었기 때문이었다.

새 총독 루이스는 해적의 자금 전체와 함께 군자금에서도 3할을 떼어 이민호의 배로 보냈다. 이민호가 극구 사양했으나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끝내 돌려받지 않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닐라에 거주하는 모든 에스파냐 사람들은 앞으로도 고산국을 맹방으로 여길 것입니다. 혹시라도 저희 힘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지금처럼만 관계가 유지돼도 충분합니다. 필리핀은 고산국의 좋은 친구니까요.”

다음 날 오전 고메스 로페스 다스마리냐스 총독을 위한 장례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마닐라에 거주하는 모든 시민들이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장례 미사에 참석했고, 이민호도 호위들과 함께 검은색 예복을 입고 미사가 열리는 성당에 입장했다.

상복의 색은 유럽에서도 지역마다 달랐으나 에스파냐는 일찍부터 검은색을 상복으로 정해서 입었다. 그 전까지 흰색을 상복으로 입었던 독일은 에스파냐의 영향을 받아 16세기 초부터,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때부터 검은색을 상복으로 입게 되었다.

필리핀을 안정시키고 해적을 토벌하며 향료 무역을 열기 위해 노력했던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인트라무로스 안에 세워진 산 아우구스틴 성당에 묻혔다. 마닐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어느 누구보다 이해하고 잘 대해주려 했던 총독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게 되었다. 신임 총독과 비올레타, 그녀의 어머니가 깊은 슬픔에 빠져 이민호도 코끝이 시큰해졌다.

“국왕전하.”

“동 두아르테, 오랜만이오. 유럽에 가신다더니 어찌 이리 일찍 돌아오셨소?”

장례 미사 중에 옆자리로 다가온 서양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포르투갈 상인 두아르테가 장례 미사가 열리는 마닐라의 산 아우구스틴 성당에 와 있었다. 임시 총독 로하스가 포르투갈 상선을 타고 마닐라를 탈출하려는 시도를 막은 사람이 두아르테였다.

아직도 에스파냐의 배가 외국에 직접 가서 교역하는 곳은 고산국과 일본밖에 없었다. 그것도 갈레온들이 북태평양 항로를 타기 직전에 들르는 것이었다. 에스파냐 상인들은 마닐라에 앉아서 다른 지역 상인들이 배에 싣고 온 물건을 거래하는 편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대신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나라나 인도네시아 여러 섬나라의 상인들과 경쟁하며 마닐라에 물건을 납품했다.

“포르투갈 범선들이 인도양 북부를 지나다가 무굴제국 황제가 보낸 함대에게 붙들려 해달 모피 200장을 압수당했습니다.”

“뭐요? 약탈을 당했단 말이오?”

이민호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가 주변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장례 미사가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사를 라틴어로 집전하는 탓에 이민호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면 따라서 일어서고, 앉으면 앉고, 노래를 부르면 입만 벙긋거렸다.

“그건 아닙니다. 저희가 고산국에서 매입한 가격보다 몇 배나 더 받았으니까요. 험! 말래카와 고아에서 다른 상인들에게 해달 모피 자랑을 좀 했더니 그게 소문이 나서 그렇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1년에 천 마리 이상 구하기 어렵소. 더 많이 잡으면 금방 멸종되고 말 거요.”

실제 역사에서 해달이 멸종 위기까지 간 적이 있었다. 지금은 해달이 북태평양에 수십만 마리가 산다지만 1741년 베링의 탐험 이후 러시아와 여러 유럽 국가에서 사냥선단을 조직해 북태평양에 파견하고부터 겨우 몇 십 년 만에 거의 씨가 말라버렸다.

“해달 모피가 유럽에 소개되면 영국과 네덜란드 놈들이 반드시 아시아로 몰려올 것입니다. 그놈들이 해달의 씨를 말릴 게 분명합니다.”

“그건 각오했소만, 해달이 워낙 귀하고 잡기 어려운 동물이니 결코 쉬운 사냥이 되지는 않을 거요.”

사실 해달은 사람에게 너무 쉽게 잡혀서 문제였고, 아이누 섬 북쪽부터 알류산열도까지 흔하게 분포했다. 어쨌든 인도의 무굴 제국에서도 해달 모피의 가치를 알아준다니 다행이었다. 인도가 더운 지역이라지만 해달 모피 정도 되면 사치품이니 어디든 쓸 곳이 있었다. 여차하면 오스만제국에 되팔아도 된다.

“그렇다 치고, 어찌 이리 일찍 돌아왔소?”

“사실은 오스만제국의 속주인 이집트에서 친하게 지내는 이슬람 상인을 만나는 바람에 홍해 어느 도시에서 화물을 부렸습니다. 그 친구가 물건을 갖고 지중해로 넘어가서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교역을 할 것입니다.”

두아르테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어 이번 교역이 큰 성공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카오 상인들은 이번에 단기간에 몇 배나 되는 이득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이민호는 두아르테와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이 해적이나 풍랑을 무릅쓰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 필요가 없는 새로운 무력 루트를 개척한 것으로 추측했다.

두아르테는 가진 자의 여유를 가득 담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상인이란 이익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돼 있었다. 이민호는 고산국 왕궁에서 이뤄질 다음 교역을 위해 옥 도자기나 고산국 비단을 좀 더 많이 생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에즈에 운하가 생기면 지중해까지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말이오.”

“맞습니다, 전하. 그래서 오스만제국 황제에게 운하를 파자고 제안하는 자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방어전략 때문에 지금은 운하를 파기 어렵다고 합니다. 하긴 옛날 기원전에 파서 잘 운영하던 운하도 8세기에 방어 문제로 인해 일부러 메워버렸으니까요.”

“운하가 생기면 아시아로 오려는 유럽 여러 나라의 관심이 집중될 것 같소.”

“그렇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결코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수에즈 인근은 주로 평야지대라서 운하를 파기에 너무 쉬운 곳이라서 문제입니다. 오죽하면 기원전에 완성해서 천 년 동안이나 계속 운영했겠습니까?”

이민호는 수에즈운하를 파서 직접 유럽에 상선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 황제를 설득하더라도 현재 동인도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국력을 기울여 방해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수에즈운하 공사는 영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0년밖에 걸리지 않아 1869년에 완공됐다.

============================ 작품 후기 ============================

나중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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