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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309화 (258/1,000)

00309  36. 소 해적시대  =========================================================================

“그럼 어째서 어머니의 개인 소지품마저 들고 가지 못하게 막았나요?”

“전임 총독이 횡령과 부정축재 혐의가 있을 소지가 있어서 잠시 조사한 다음 짐을 내어드릴 예정이었습니다. 누구든 권력을 가진 자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부정에 물들기 쉬운 법입니다. 법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비올레타 양도 총독부의 조사에 협조해주십시오.”

권력교체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민호가 보기에 로하스의 행태가 조금 과한 것 같았다. 새로운 권력자가 권력 강화를 위해 전임자를 격하시키는 수단으로써 가족에게 불명예를 안기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국왕전하? 제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 않습니까?”

이민호는 가만히 있으려 했는데 로하스가 물어보자 의견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쎄요. 나야 마닐라의 일에 관여할 권리가 없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임시 총독은 전임 총독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전에 며느리인 다스마리냐스 부인을 집에서 쫓아냈군요. 피도 눈물도 없이 무자비하게 법을 집행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변호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할 때는 법조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럼으로써 법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법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주는 경우가 흔했다. 로하스는 그 전에 민정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마닐라 시민들에게 법을 엄격하게 집행함으로써 법의 무정함을 사람들에게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전하! 국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스마리냐스 부인은 총독의 가족이 아니므로 총독 관저에 살 자격이 없습니다.”

“법조문이 그렇게 되어있다 하더라도 에스파냐 본국에서 실제로 적용될 때는 다를 것이오. 일반 가정집이라도 이사를 하기 위해서는 며칠의 말미가 필요한 법이오. 임시 총독 로하스 당신은 선출되자마자 전임 총독의 가족을 즉시 관저에서 내쫓아 명예를 훼손시킨 셈이오. 그 의도가 무엇이든 명예롭지 못하오.”

“뭐라고요? 내정간섭입니다! 더 이상 저를 모욕하면 참지 않겠습니다!”

로하스가 허리에 찬 칼의 손잡이에 손을 대자 민영이 다른 호위들과 함께 이민호 주변을 에워쌌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에스파냐 병사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로하스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투표를 통해 임시 총독으로 선출은 됐는데 시민들에게 전혀 신망을 얻지 못한 자인 모양이었다.

“돈 페드로 데 로하스! 그대를 모욕하는 것은 내 입이 아니라 그대의 음흉한 마음과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 같소.”

“전하! 부디 그만해 주세요. 저희 가족 때문에 고산국과 에스파냐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저는 원하지 않아요.”

이때 비올레타가 이민호를 말렸다. 이민호는 투표 전에 도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마닐라에 거주하는 에스파냐 사람들 대부분은 고산국과 교역을 하면서 얻는 이익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감정이나 다른 이유 때문에 무역 파트너와 충돌하는 우를 범하는 특이한 자가 로하스였다. 이민호는 로하스가 전임 총독의 가족을 핍박하는 것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숨어있다고 파악했다.

비올레타가 말싸움을 말리려고 이민호를 억지로 끌고 향한 곳은 고아원이었다. 이민호는 갈 필요 없다고 했으나 가장 큰 후원자이므로 고아원을 살펴보는 것은 권리이며 의무라고 비올레타가 설득했다. 이민호는 호위대와 함께 인트라무로스에서 멀지 않은 고아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전하! 여기가 마닐라의 산티아고 고아원이에요.”

“오!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깔끔하군요.”

“전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벽돌로 건물을 새로 지었어요. 나무를 심어 울타리도 만들었답니다.”

비올레타가 안내한 곳은 큼직한 벽돌 건물이 여러 채 서 있는 주거시설이었다. 인트라무로스 바깥에 세워졌지만 일부러 중국인 거주 지역과 다른 방향에 건설해 고아원이 전투나 소요사태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였다.

“산티아고라면 혹시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서 성 야고보 아니오?”

“맞아요! 성 야고보의 유해가 갈리시아에서 발견돼 그 무덤 위에 산티아고 대성당이 건축됐어요. 야고보의 유해를 무어인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레콘키스타가 적극적으로 시작됐다고 역사책에서 배웠어요.”

그 외에 에스파냐에 산티아고와 관련된 전설도 많아서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산티아고는 캘리포니아 남쪽 도시 산디에고와 같은 어원을 가졌다.

“갈리시아라면 이베리아 북서쪽 대서양 연안이 맞소?”

“그래요! 갈리시아는 정말 좋은 곳이에요. 특히 음식이요.”

비올레타는 갈리시아 출신답게 해산물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혜진은 이민호가 가르쳐준 메뉴 외에도 비올레타와 어울리더니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냈다.

이민호는 금발의 유럽인 처녀가 매운 문어 요리를 좋아해서 어리둥절했었는데 갈리시아 지방이 해산물 요리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올레타는 된장국을 칼도 가예고와 비슷하다고 했는데 이민호는 그런 음식을 안 먹어봐서 비교하지는 못했다.

고아원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깨끗한 옷을 입은 개구쟁이 꼬마들이 떼를 지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종교기관이 운영해서 분위기가 엄숙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면은 이민호가 보기에도 좋았다.

고아원 본관 건물 앞에서 곡괭이를 높이 치켜들면서 땅을 파는 수녀에게 비올레타가 다가가서 인사했다. 수녀는 비올레타를 반갑게 맞이했고, 총독의 죽음을 떠올린 수녀가 비올레타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참 지나서 일어난 비올레타가 수녀를 이민호에게 소개했다.

“전하! 이분이 원장 수녀님이세요.”

환갑을 훨씬 지난 듯한 유럽인 수녀가 공손히 인사하자 이민호도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민호는 직접 곡괭이를 들고 일을 하는 청빈한 수녀라면 훌륭한 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수녀님? 저는 고민호라고 합니다.”

“오! 당신이 고산국 국왕전하시군요. 어서 오십시오. 스페인어가 서툴면 중국어로 말해도 된답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선교를 못하고 있지만 저희 같은 하느님의 종들은 언제든 준비를 해놓아야지요.”

원장실에서 60대 수녀에게 고아원 운영 상황을 들었다. 현재 원생이 300여 명이고 매달 꾸준히 원생이 늘어나고 있었다. 10여 년 전 부두에서 상인이나 손님들을 상대로 소매치기를 하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생활하게 한 것이 이 고아원의 시초였다. 성인이 되어 고아원을 나간 청년들은 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상인이나 현지 군인 등으로 고용돼 잘 살고 있다고 했다.

비올레타는 마닐라에 온 첫 해부터 고아원에서 수녀들을 도와줬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도 생활비를 빼서 고아원을 도왔으나 고아들이 늘어나면서 운영이 어렵게 되자 비올레타가 귀족들의 사치품을 터는 도둑질에 나서게 됐었다.

“수녀님. 이번에 국왕전하께서 또 금괴를 주셨어요.”

“비올레타 영애. 고아들을 위해 순결했던 영애가 희생을 하시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흑흑!”

“그런 건 없으니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도 순결하단 말이에욧!”

비올레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 이민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닐라도 사람이 사는 곳이며 비올레타가 워낙 인기인이라서 온갖 소문이 난무하고 있었다.

“예? 영애는 잔혹한 타타르 왕의 후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나요?”

“타타르가 아니라 문명국인 고산국이에요. 고산국에서 조선말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배우라고 할아버지가 보내신 거여요.”

“불쌍하신 총독 각하! 중국인들에게 그렇게 잘해줬는데도 바로 그 중국인에게 살해당하시다니.”

수녀가 성호를 그었다. 수녀가 기도하는 것 같아 잠시 기다렸던 이민호가 제안했다.

“매년 이 정도 금액을 기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마닐라 항구에 들어오는 고산국 연락선을 통해 저에게 편지를 보내세요. 제가 해결할 수 있다면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전혀 상관없는 지역에서 다른 나라 고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도우시는군요.”

“수녀님은 유럽인인데도 동양 아이들을 돌보지 않습니까?”

“저야 하느님의 종인 걸요.”

“저는 국왕, 정치가입니다. 제 백성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물론 제 백성이 우선이겠지만요.”

“국왕전하께서 이렇게 훌륭하신 분인 줄 몰랐어요. 과연 고산국은 문명국이군요.”

고산국에서 몇 년째 건설 중인 성당에서도 부속 미션학교 외에 고아원을 운영했다. 이민호는 미래에 범죄율을 낮추고 성실한 청년들을 길러내는 길이라 생각해 고아원에 대한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스마리냐스 총독의 장례식이 다음 날로 미뤄져 이민호는 좌승함으로 돌아갔다. 비올레타는 어머니와 함께 친하게 지내는 하급 귀족의 집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

이민호는 고산국 왕도에서 출발해 바기오를 거쳐 마닐라에 온 연락선 선장을 만났다. 해군이 긴급 출동한 다음 날에 출발한 연락선인데 고산국에서는 아무 일도 없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었다.

지난번 마닐라처럼 해군과 주요 병력이 항구를 비운 시기를 노려 해적들이 대거 쳐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이민호도 조금 걱정했었다. 그러나 아리수 강 하구에 요새도 있고 지상군 대부분이 수도 주변에 주둔하기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해적이 빼앗아간 갤리선의 행방을 수색하던 에스파냐 원정함대가 다음 날 오전부터 50척 단위로 마닐라 만으로 들어왔다. 고산국 함대가 마닐라 만에 들어서기 전부터 에스파냐 배들이 먼저 발견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원정군 함대를 부르러 갔고, 원정함대가 이제야 돌아오고 있었다. 이민호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원정함대를 마중 나온 로하스를 비롯해 에스파냐 귀족들과 병사들이 선착장에서 웅성거렸다. 선두에 선 배가 총함장이 탑승한 원정함대 기함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전임 총독의 아들이며 비올레타의 아버지인 총함장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선착장에 내렸다. 원정에 참가한 에스파냐 병력 900명은 마닐라를 지키고 있던 병력보다 훨씬 많았다.

“페드로 로하스 네 이놈! 높은 직위에 있는 자들이 바다에 나가 있는 사이 억지로 임시 총독 선거를 해서 네놈이 선출됐다지?”

총함장 루이스가 로하스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체구는 비슷했지만 변호사는 40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총함장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히익! 잠깐만! 선거를 이유로 나를 비난할 생각은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것이요. 나는 법 규정을 그대로 지킨 것뿐이오. 그리고 나는 임시 총독이니 총함장이 이러는 건 하극상이오!”

“네놈의 의도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엉터리 선거로 임시 총독에 선출된 네 놈은 아버지, 전 총독의 유훈을 빼돌려 없애기 위해 총독 관저에서 내 아내를 쫓아낸 것이다. 부하들을 시켜 며칠째 총독 관저를 샅샅이 뒤지고 있겠지?”

전임 총독의 아들 루이스는 이미 정보를 쥐고 와서 로하스를 족쳤다. 그러나 로하스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으윽! 유훈 따위는 없었소. 내가 총독 관저에서 유훈을 찾으려 한 것은 사실이나 단지 다음 대의 합법적인 총독에게 총독 권한을 넘기기 위한 정상적인 행정 절차였소.”

“욕심 많은 네 놈이 총독 자리를 다른 이에게 넘길 리가 없지! 그리고 유훈은 못 찾았을 것이다. 너 같은 비열한 놈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겼으니까!”

루이스는 병사들 몇 명과 함께 총독 관저로 가더니 금방 봉인된 문서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신부들에게 낭독하라고 넘겨주었다. 신부들이 봉인을 뜯어 전임 총독의 필체가 맞다고 확인한 다음 신부들 중 한 사람이 읽어나갔다.

“이 유서가 공개됐다면 나,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하늘나라로 가고 난 다음일 것이다. 나는 국왕폐하로부터 필리핀 총독에 임명되면서 다음 총독을 지명할 권리를 위임받았다. 내가 나이가 많아 불안하다는 이유로 이런 중요한 권리까지 주시는 국왕폐하께 성심을 다해 충성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다음 총독을 신중히 고르기 위해 여러 후보자들을 두고 고심했다. 다들 훌륭한 젊은이들이라 고르기 어려웠으나 결국 국왕폐하와 마닐라 시민들을 위해 결심했다. 다음 총독은......”

============================ 작품 후기 ============================

절단신공, 그러나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과.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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