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08화 (257/1,000)

00308  36. 소 해적시대  =========================================================================

응우옌 반 렘 장군이 푸 쑤언에 고산국 함대가 정박하면 병사들까지 융숭하게 접대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나중으로 기회를 미뤘다. 고산국 해군이 다만 가끔이라도 안남 해안을 초계하기로 약속하고 장군을 보냈다.

응우옌(阮)이라는 성은 현대 베트남 인구에서 자그마치 4할에 육박해 성 만으로 사람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같은 말인데도 응웬, 응엔, 구엔, 느구엔 등 듣기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마닐라에서 건조된 갤리선 외에 반쯤 부서진 해적선들은 전부 베트남에서 차지했다. 그 외에도 부서진 판자와 해적 시체들이 해안에 가득 쌓였다.

5천여 명의 해적이 몰살당하면서 그와 비슷한 숫자의 미망인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해적들이 자기들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았다. 명나라 해적들에게 노략질당한 사람들은 주로 명나라 해안 지방 거주민들 아니면 필리핀의 말레이계 원주민들이었다. 피해자들 중에는 가끔 무역과 해적업을 겸하는 왜구들도 끼어 있었다.

“쳇! 벌써 해전이 끝났구나.”

초저녁에 이응화가 이끄는 나머지 전선 20척이 도착했다. 이로써 좌승함을 비롯해 40여 척의 함대가 모두 모였다.

이응화는 전선 뒤에 갤리선 한 척을 예인하고 와서 콧대를 높이 세웠다. 해적 30명을 사살하고 2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했다. 이로써 해적들이 필리핀 총독을 살해하고 탈취한 갤리선 세 척 모두를 잡아냈다.

필리핀 총독부에서 동원한 200여 척의 범선과 갤리선이 못해낸 일을 고산국은 40여 척으로 간단히 해낸 것이다. 페드로 남작이 왔을 때 에스파냐 원정군 함대는 마닐라 주변 해역에서 해적에게 나포된 갤리선을 수색하고 있다고 했다.

밤이 됐지만 고산국 함대는 즉시 마닐라로 향하기로 했다. 마닐라로 직진할 경우 중간에 서사군도의 얕은 바다를 지나야 해서 남쪽으로 약간 우회한 다음 동쪽으로 향했다. 태풍이 완전히 지나갔는지 바다가 훨씬 잔잔해져서 항해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민호가 집무실로 비올레타를 불렀다. 앞으로 마닐라의 에스파냐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해서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비올레타가 갑옷을 벗고 평상복을 입으니 인상이 완전히 달라보였다. 비올레타가 뒷머리를 묶어 늘어뜨린 땋은 머리는 조선 처녀들과 완전히 같았으나 이것은 그녀의 고향 갈리시아 지방의 전통 헤어스타일이었다. 혜영이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 선물한 댕기를 비올레타가 장식으로 달고 다녀 완전히 조선식 댕기머리가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갈리시아 사람들은 켈트족의 후예답게 백파이프와 비슷한 가이타를 전통악기로 연주했다. 그러나 수에비족의 침공과 서고트왕국의 성립, 레콘키스타 당시 프랑스 브르타뉴 귀족들의 지원으로 인해 상류층 귀족들의 혈통은 많이 뒤섞였다고 봐야 했다.

비올레타는 스페인어와 갈리시아어, 중국어를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조선말도 충분히 대화할 정도로 많이 배웠다. 비올레타는 무역이나 정치 분야에도 지식이 풍부한 편이었다.

“비올레타 양! 이제 마닐라는 어떻게 되는 거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공석이 된 필리핀 총독을 새로 뽑아야 해요. 이럴 경우에 대비해 아마도 할아버지가 유훈을 남겨놓으셨을 거여요. 그러나 만약 그것을 찾지 못하면 시민들이 투표를 해서 임시 총독을 뽑아 그가 통치할 거여요. 임시 총독은 임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어느 때인가 국왕폐하에게 직접 임명된 총독이 정식으로 부임할 거여요.”

이번에 살해당한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1519년 1월 생으로 필리핀 총독에 부임한 1590년 6월 당시에 이미 70세가 넘었다. 이 시대 기준으로 대단히 장수한 셈이었으니 언제 노환으로 별세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에스파냐 국왕폐하나 멕시코 부왕이 총독을 임명하는 것 아니요?”

“물론 국왕폐하만이 총독 임명권을 가져요. 다만 할아버지의 경우 유고시에 임시 총독을 지명할 권한을 가진 국왕 명령서를 국왕폐하께 받아오셨어요. 사실상 할아버지가 총독 후계자 지명권을 가진 셈이에요.”

“다음 총독이 누구인지 혹시 비올레타 양은 아시오?”

에스파냐에서 필리핀에 가려면 대서양을 건너 중남미를 지나 다시 태평양을 건너야 한다. 본국에서 까마득히 먼 거리인 마닐라에 국왕이 제대로 된 인사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필리핀의 정식 총독을 에스파냐 국왕이 임명하면서 새 총독에게 후임 총독에 대한 임명권 일부를 위임하기도 했다.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70대 노인이라 이런 장치가 더욱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올레타가 설명하길,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후계자에 대해서는 비밀에 붙였다고 했다. 후보자로 떠오르는 사람이 총함장으로 일하는 총독의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말고도 정복자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구에로 함장 등 몇 명이 더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아마 아버지를 지명했을 거여요. 할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총독이 될 만한 충분한 능력과 경력을 갖췄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아버지는 해적이 탈취한 갤리선을 찾아 바다에 나와 있어요. 겁에 질린 마닐라 시민들이 그 사이에 새 총독을 선거로 뽑았을지도 몰라요.”

“비올레타 양의 부친이 총독이 되면 좋겠구려.”

누가 되든 고산국과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광신도가 새 총독에 뽑힌다면 거액의 무역 이익을 포기하면서 고산국에 적대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보통 이 정도 개념 없는 사람이 총독직을 수행하기는 어렵겠지만, 17세기 초중반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그런 총독을 임명해 무역과 외교관계를 멋지게 말아먹기도 했다.

“그리고 군자금을 고스란히 돌려줘서 고마워요, 전하. 마닐라에 거주하는 7천여 시민들이 몇 년 동안 낸 세금을 모아서 만든 원정 자금이었어요. 제가 어떻게 보답해드릴 수 있을까요?”

“주인에게 제대로 돌아갔으니 됐소.”

실제 역사에서 1593년 양력으로 10월 하순에 필리핀 총독을 살해하고 갤리선을 탈취한 해적들은 풍랑에 휩쓸려 서쪽 안남에 표류했다. 갤리선에 실린 은화와 보석 등 군자금은 물론 선수에 탑재된 대포 2문까지 모두 대월국의 응우옌 정권에게 압수당한다. 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진 해적들 중에서 일부는 말래카에서 체포돼 마닐라로 끌려가서 법의 심판을 받았다.

“금액이 얼만지 묻지도 않으시네요?”

“내 것이 아닌데 무슨 상관이오? 어차피 함대가 출동했으니 찾아준 비용을 청구하지 않겠소. 그러니 걱정 마시오.”

현대 국가에서는 분실물을 찾아주는 사람이 물건 가격의 최소 몇 퍼센트를 받는 것으로 아예 법으로 규정됐으나 이 시대는 아니었다. 찾은 사람이 주인에게 알려주지 않고 다 갖는 경우가 흔했고,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도 한 푼도 보답을 못 받을 수도 있었다. 아직 전근대라 소유권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강해 심지어 소유권 절대의 원칙이 통용되는 시대였으나, 물건을 찾아준 사람이 그에 따른 비용을 소유자에게 청구할 권리는 있었다.

“혹시 제가 여성으로서 매력이 없나요?”

“전혀 아니요. 내 눈길과 자주 마주쳐서 잘 알면서 그러시오? 그리고 군자금을 찾아준데 대해 비올레타 양이 책임질 하등의 이유가 없소. 그러니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시오.”

혹시나 비올레타가 몸을 던질까 우려한 이민호가 미리 못을 박았다. 비올레타는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제 가슴만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하하! 비올레타 양의 가슴도 좋아하는 거요. 이만 주무시오. 내일 아침에 마닐라에 도착하면 아마 장례식에 늦지 않게 참가할 수 있을 거요.”

“네. 고마워요, 전하.”

비올레타가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비올레타를 시중들기 위해 따라온 주상아 공주의 시녀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주상아 공주가 이민호에게 비올레타를 받아들였으면 하고 은근히 신호를 보낼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민영도 마찬가지였고, 훨씬 직설적이었다.

“주인님. 비올레타 양을 유혹해서 무역 일을 시키지 그러세요?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인재잖아요.”

“민영이 왜 질투를 하고 그래? 큭큭!”

“저는 아무런 재주가 없잖아요.”

민영은 혜영이나 아라 공주를 비롯한 이민호 주변의 여자들이 모두 똑똑하고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속이 많이 상해 있었다. 심지어 민영과 같은 호위대장인 민희마저도 이민호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으나, 민영은 이민호를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도와줄 능력이 없었다.

이민호는 그런 민영의 속마음을 알고 측은해졌다. 그러나 민영은 이민호에게 소중한 여자로서 늘 높은 순위에 들었다. 어느새 잘 시간이 되었다.

“날 몇 번이나 지켜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이리 와.”

“오늘은 제 배란일도 아닌데요. 저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주인님의 후사도 못 만들고 있어요. 쓸모없는 것 같아요.”

“그런 건 전혀 상관없어. 그리고 조급해하지 마.”

이민호가 민영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 동안 주로 이민호가 민영에게 위로를 받았으니 이렇게 가끔 민영을 위로해줄 때 오히려 더 즐거웠다. 민영은 이민호에게 애무를 받아 금방 몸이 뜨거워졌다.

고산국 함대는 12시간 넘게 항해한 끝에 다음 날 오전 마닐라에 입항했다. 지난번과 달리 해적선들이 마닐라만을 가득 채운 채 인트라무로스를 공격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닐라의 평화로운 모습에 이민호는 일단 안심했다. 그러나 항구에 정박한 배가 몇 척 없어서 의아했다. 비올레타는 총독을 살해한 명나라 해적들을 수색하기 위해 원정함대가 바다에 나가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마닐라에서는 많은 돈을 들여 향료 제도로 가는 원정함대를 꾸렸다가 근처에 가기도 전에 총독 살해범을 잡기 위해 동원됐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일 갤리선 3척과 군자금까지 모두 잃었다면 마닐라는 몇 년 동안 경제 불황에 빠질 뻔했다.

나머지 전선들을 바다에 남기고 국왕좌승함만 마닐라 선착장에 접안했다. 마닐라는 바다가 잔잔하고 넓어 다 좋은데 다만 항구가 얕다는 문제가 있었다. 반대로 마닐라 서쪽의 수빅 만은 수심이 깊어 양항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으나 다만 육상 교통이 불편했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항구에 나와 이민호와 고산국 함대를 환영하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사람들 얼굴에 불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전하! 해적에게 탈취 당했던 갤리선 세 척을 모두 찾아오셨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돈 페드로 반갑소.”

변호사 출신 민정장관 페드로 데 로하스(Pedro de Rojas)가 마닐라 귀족들과 시민들을 대표해서 이민호에게 인사했다. 이민호는 조금 어리둥절했으나 흔쾌히 인사를 받아들였다.

총함장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물론 부총독 보르히아 자작도 바다에 나가 있는 중이라 마닐라에 더 이상 높은 사람이 없나 보다 단순히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임시지만 제가 잠시 필리핀 총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닐라에 남아있는 귀족과 시민, 군인들의 투표로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임명됐습니다. 아는 것이 부족한 저를 전하께서 잘 돌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요? 축하하오.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그런데 환영인파 가운데 여러 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임시 총독 로하스를 비난하던 시민들이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것이었다.

이민호가 로하스와 인사하는 사이에 비올레타가 총독의 며느리에게 달려가 안긴 것은 이민호가 이미 봤었다. 그러나 모녀 지간에 대화를 하면서 비올레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비올레타가 로하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돈 페드로! 아무리 당신이 임시 총독이 됐다지만 어머니를 총독 관저에서 내쫓은 건 너무했어요!”

“법적으로 당연한 처사입니다. 부인과 비올레타 양은 이제 총독의 가족이 아니니 총독 관저에 머무를 수 없지요.”

“그래도 최소한 장례식 때까지 기다려줬어야죠!”

“비올레타 양! 솔선수범해서 국법을 지키는 것이 귀족의 의무랍니다.”

시아버지를 잃고 남편이 바다에 나가있는 동안 슬픔에 잠겨있던 부인을 총독 관저에서 내쫓은 자가 로하스였다.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으나 이것은 마닐라 내부의 일이었고, 에스파냐 사람들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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