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07화 (256/1,000)

00307  36. 소 해적시대  =========================================================================

“국왕전하! 해적들이 항복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필리핀 총독을 죽인 것은 에스파냐와 수십 년 쌓인 묵은 원한을 푼 복수에 불과하니 개입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잠시 포성이 그치더니 함교에서 관측실로 올라온 함장이 보고했다. 이민호는 어떻게 할까 아주 잠시 고민했으나, 한 번 이빨을 드러낸 해적들에 대한 처분은 언제나 같았다.

예전에는 상황에 따라 상인과 해적을 오고갔더라도, 또는 안 보이는 곳에서는 지금도 노략질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봐줄 수 있었다. 그러나 해적으로 확인된 이상 끝장내는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전력이 아쉬워 해적 포로들을 해군으로 흡수했다간 나중에 반드시 사고를 치게 돼 있어서 꺼려졌다. 그리고 해적들 중에는 탄광으로 보내 일을 시키기도 불안할 정도로 심하게 막장인 인간들이 많았다.

비올레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민호가 함장에게 명령했다.

“계속 공격해서 해적들을 전멸시키시오. 그리고 필리핀 총독의 갤리선은 가능하다면 마닐라로 예인해가도록 합시다.”

“예! 전하. 명을 따르겠습니다.”

함장이 계단을 내려가자 비올레타가 이민호에게 안겨서 울었다. 해적들을 두들겨 잡는 동안에는 신이 나서 잊어버리고 있었다가 이제 다시 할아버지의 죽음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이민호가 비올레타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위로해주었다.

“고마워요, 전하. 하지만 저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해적의 항복을 받아들여 노예로 팔든지 하세요.”

“오해요. 나를 만난 해적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소. 선저에 갇혀있는 해적 포로들은 마닐라에 도착하는 대로 총독부에 넘겨주겠소.”

“그래도 고마워요. 이건 감사 표시예요.”

비올레타가 이민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민호는 아까 혀를 교환한 격렬한 키스보다 이번에 비올레타가 해준 뽀뽀가 훨씬 짜릿하다고 느꼈다.

“흠. 야릇하구려.”

흐뭇해진 이민호가 다시 잠망경 손잡이를 잡았다. 한동안 멈췄던 포격과 총격이 다시 해적들에게 퍼부어지고 있었다.

현재는 선상백병전 와중에 인명피해가 다수 발생한 베트남 군선들이 뒤로 빠지고 고산국 전선들만으로 포위망을 압축하고 있었다. 전선들은 거대한 선체로 밀어붙이면서 서로 뒤엉켜 옴짝달싹 못하는 해적선을 향해 계속 함포를 쏘아댔다.

- 콰쾅!

포탄이 터질 때마다 해적들이 죽어나갔다. 해적선들을 사방에서 포위한 전선에서 끊임없이 총격이 쏟아졌다.

이제는 부서진 해적선이 하도 많아서 더 이상 해적선들을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을 지경이 되었다. 아직도 80척 가까이 남은 해적선들이 꼼짝 못하고 포위망에 갇혀 포화를 뒤집어썼다.

전선 가까이 위치한 해적선에는 살아 움직이는 해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해적선들은 이미 피에 절어 시뻘겋게 된 해적선과, 해병들에게 총격을 당하며 해적들이 새로 흘린 피로 시뻘겋게 변하고 있는 해적선으로 나뉘었다.

이민호가 항복을 받아주지 않자 해적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려 했다. 그러나 해적들이 화승총과 활을 쏘려 해도 고산국 함선에서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해병들은 자그마한 구멍인 총안을 통해 총구만 내놓고 사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전선으로부터 총탄과 포탄이 끝도 없이 날아와 해적들의 목숨을 쉴 새 없이 끊었다. 통하지 않을 것을 알고도 전선에 화승총을 쏘는 해적도 있고, 그저 무릎 꿇고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자들도 있었다. 동남아시아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의외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해적들이 많았다.

사형집행이나 다름없는 일방적인 공격이 끝없이 이어지자 결국 버티다 못한 해적들이 웃통을 벗고 물로 뛰어들었다. 총독의 갤리선 2층에서 분통을 터뜨리던 해적 두목이 머리에 총탄을 맞고 픽 쓰러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민호가 잠망경 접안구에서 얼굴을 떼었다.

“전투는 끝난 것 같소. 구경하시오.”

“어디요?”

이민호가 잠망경에서 물러서자 동시에 달려든 민영과 비올레타의 머리가 부딪쳤다. 국왕좌승함이 지금까지 여러 번 적의 포탄에 명중하거나 해적선과 충돌했지만 방금 난 소리가 가장 컸다.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는 두 여자를 부축한 이민호가 웃음을 꾹 참았다.

- 드드드득!

전투가 끝나면서 함교창을 가렸던 장갑판이 위로 올라갔다. 기계적 장치를 다는 것보다는 해병과 수병들이 잡아당기는 편이 아직은 훨씬 더 간편했다.

이민호는 바다에 널린 수백 척이나 되는 해적선들의 잔해를 보게 됐다. 전투도 아니고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멀쩡한 배를 찾기 어려운 해적선들 중에서 필요한 것은 필리핀 총독의 갤리선 한 척뿐이었다. 해병들이 단정을 타고 배들의 무덤 안으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밧줄을 연결한 갤리선을 바깥으로 힘겹게 빼냈다.

몇몇 해병들이 총독의 갤리선에 올라 배 안을 수색했다. 선수에 대포 2문이 장착된 이 배에는 원정 기간 중 사용할 군자금인지 보석과 은화가 가득 쌓여 있다고 해병들이 보고했다.

갤리선이 예인 중에 침몰할 우려가 있어 보석과 은화는 비올레타의 감독 하에 일단 좌승함으로 옮겼다. 갤리선 2층에 널브러진 해적 두목과 부두목들의 시체는 병원선이 도착하면서 배밑판에 냉동 보관했다.

그 사이 이민호는 좌승함을 함대 기함의 현에 맞대고 이순신과 만났다.

“승첩을 축하드립니다! 국왕전하께서 가시는 곳마다 항상 적선이 떼로 몰려 있는 것 같습니다. 1전단장이 불만이 많을 테니 나중에 다독여주십시오.”

“아버지가 해상봉쇄를 맡으셨군요.”

“갤리선이 세 척이라 했으니 마지막 한 척이 더 잡히는 대로 이쪽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사이 분함대 소속 나머지 전선들이 차례로 합류했다. 함열 중간에 위치했던 배들은 뒤에서 따라오는 배들을 위해 속도를 줄여야 했으므로 도착점인 이곳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전선들이 합류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민호는 분함대보다 이순신이 이끌고 온 배들이 더 빨리 도착한 것이 신기해서 물었다.

“총함장께서는 어떻게 더 빨리 오셨습니까?”

“항해사들이 물길을 잘 찾았습니다. 해류라는 것은 바다에서도 냇물처럼 굽이치며 흐릅니다. 그리고 중심이 되는 해류가 있다면, 그 언저리에 반대로 흐르는 작은 흐름도 있지요. 그것을 타고 좀 더 빠르게 온 것입니다.”

항해사들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였다. 요즘 이순신은 오후에는 고산국 함대를 집결시켜 해군 전술을 훈련시키고, 오전에는 따로 통합 사관학교에 출근해 사관생도, 또는 현직 해군 장교 교육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범선 위주인 유럽의 단순한 함대 전술보다 기동성을 중시한 범노선을 전쟁에 투입하는 동양의 함대 전술이 훨씬 다채로웠다.

대화중에 베트남 수군에서 작은 배 한 척이 좌승함으로 접근했다. 명나라 것과 비슷한 갑옷을 입은 장군이 갑판에 우뚝 서서 소리를 질렀다.

“대월의 장군 응우옌 반 렘이 주인 응우옌 호앙 전하의 명을 받아 고산국 국왕전하를 뵈러 왔소이다.”

외국에 흔히 안남이라 불리는 베트남은 명칭이 여러 가지였다. 기원전에는 남월이라 했고, 나중에는 월남이라는 국명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대내적으로 대월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게다가 외국에는 왕을 칭하고 내부에서는 황제로 부르는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였으며, 더욱이 황제와 실제 집권자가 따로 있는 데다 남북으로 정권이 분리돼 꽤나 복잡한 정치적 지형이었다.

남북의 두 정권을 따로 칭할 경우 북하와 남하, 교지국과 광남국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때 참파는 세력을 잃고 남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어서 올라오시오, 장군.”

해병들이 2열로 도열한 가운데 이민호가 응우옌 반 렘을 좌승함 갑판으로 맞아들였다. 탁자가 함수 갑판에 놓이고 이민호에게 인사를 마친 응우옌 반 렘 장군이 의자에 앉았다.

고산국은 안남의 남북조 양쪽과 동시에 교역을 하고 있었다. 특히 북쪽 찐 씨 정권에는 고산국이 명목상 사대를 취하고 있었고 지난 몇 년 동안 쌀을 교역하고 화승총을 팔면서 친하게 지냈다. 고산국이 화승총을 팔고 쌀을 수입한 것은 중부 베트남 지역에 자리 잡은 응우옌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찬탈자 막 씨를 몰아냈다면서요?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허나 막 씨가 아직 북쪽에 남아있어서 걱정입니다. 또한 참파가 남쪽 국경을 꾸준히 침략하고 있습니다. 고산국에서 화승총을 팔아준 덕택에 근근이 참파의 침략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막 씨 왕조가 무너지고 레 왕조가 복원됐지만 살아남은 막 씨 일족은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북쪽 까오방 일대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찐 씨 정권은 명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그곳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 사이 응우옌 정권은 남쪽 참파로 국경을 넓혀가고 있었다. 참파가 먼저 침략한다고는 하지만 원래 중부 베트남은 참파의 영역이었다. 장군이 자꾸 약한 척 엄살을 떨더니 역시 원하는 것이 있었다.

“실제로 보니 고산국 전선들은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특히 국왕전하께서 타신 이 배는 해적이 공격할 방법이 전혀 없더군요. 과연 천하제일의 수군을 가진 고산국입니다.”

장군이 자꾸 칭찬을 늘어놓기만 해서 이민호는 조금 답답했다. 곧 해가 질 것 같아 초조해져서 이민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고산국과 동맹을 맺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병력은 북쪽 찐 씨가 10만, 우리가 4만을 거느리고 있지만 수군이 약합니다. 그래서 섬라나 명나라 해적, 왜구가 바닷가에 나타나면 전전긍긍하면서도 대응할 방법이 없지요. 그리고 우리 주인께서는 고산국 국왕전하와 함께 참파를 공략해 영토를 나눌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그러나 응우옌 정권과 동맹을 맺어 참파를 공략해봤자 고산국에 별로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을 이민호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베트남 남부 지역이 기후가 좋고 물이 풍부해 농사짓기에는 좋은 땅임이 분명하지만 적대 세력이 주변에 널려있는 이곳까지 와서 농사를 지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약 고산국에 필요한 지하자원이라도 난다면 몰라도 병력을 나눠 새로운 영토를 지키게 할 여력도 없었다.

“남조의 응우옌 호앙 전하께서는 지금까지 고산국에 좋은 조건으로 무역을 해주셨소. 그러나 군사 동맹을 맺어 외국을 침공하는 일에 수군을 동원하기는 어려울 것 같소.”

“그렇다면 해적이나 다른 외적이 바다를 통해 침공했을 때만이라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우리는 명나라 해적들이 몰려온 것을 알면서도 수군 세력이 부족해서 고산국 함대가 오기 전까지 저들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필요하다면 항구 서너 곳을 고산국 수군에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몸이 달아있던 응우옌 반 렘 장군이 동맹 조건을 수정해서 제안했다. 마카오와 해남도, 필리핀, 팔라완, 브루나이까지 고산국의 항로가 이어져 있었지만 그 동안 베트남 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만약 항구를 몇 곳 얻는다면 외륜선만으로도 말래카해협까지 가는 길이 쉽게 열릴 수 있었다.

“역시 해적이 문제지요. 음.”

이번에 해전이 벌어진 곳에서 100리 이내 거리인 푸 쑤언은 남조 응우옌 정권의 주요 거점도시이기도 하고, 나중에 후에로 개칭되면서 수도가 되는 지역이었다. 이곳에 2만이 넘는 병력이 해적의 상륙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응우옌 정권이 동원할 수 있는 수군 함선이 겨우 30여 척에 불과하고 그나마 분산돼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해적과 싸우지 못했다고 한다.

국가발전을 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고산국 입장에서 해적 토벌은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베트남 쪽에도 우호적인 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칫 응우옌 정권과 잘못 엮였다가는 북쪽 찐 씨 정권이나 남쪽 참파와의 전쟁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민호는 찐 씨 정권의 10만 대군도 두렵고, 참파가 아무리 쇠약해졌다 해도 어느 한 국가를 적으로 삼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이익이 전혀 없기도 하고 지금은 일본 정벌 준비에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기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것이 낫겠습니다. 그러나 고산국이 북조와 동일한 동맹을 체결할 수도 있음을 미리 알아두십시오.”

“저희는 수군이 약합니다. 해안 방어에 도움이 되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는 베트남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두 나라가 식민지로 삼는 곳은 지리적인 요충이거나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마카오나 말래카, 마닐라 같은 곳들은 무역을 위한 지리적인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말래카왕국처럼 부유한 지역이라면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버마의 경우 보석 때문에 포르투갈이 수십 년 동안 공을 들이고 있었다.

“조만간 예국 참판을 보낼 테니 공수동맹 조약을 맺도록 합시다. 조약 체결 전이라도 대규모 해적이 나타날 경우 고산국이나 해남도 주애공부로 연락을 주시오. 그럼 함께 토벌작전에 나서주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장군이 인사를 몇 번씩이나 하고 돌아갔다. 고산국의 해군력을 직접 눈앞에서 확인한 응우옌 정권에서는 어떻게든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조건에 동맹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에휴. 오늘은 여기까지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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