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05화 (254/1,000)

00305  36. 소 해적시대  =========================================================================

- 펑!

갤리선의 선수 함포가 굉음과 함께 허연 연기를 선수 방향으로 뿜어냈다. 도주 중인 배의 선수에 배치된 대포가 앞을 향해 발사됐다는 것은, 공격용이 아니라 신호용이라는 뜻이었다.

“서, 남, 북쪽에서 해적선 다수 출현! 만 안쪽에서 해적선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망루에 오른 무상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민호가 주변을 살폈다. 만 안쪽, 섬 뒤쪽 또는 해안 야자수 그늘 아래 숨어있던 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200척은 넘어가는 배에 탄 해적들이 화승총과 대포를 쏘며 국왕좌승함에 빠르게 접근했다.

“전하! 해적들이 공격해옵니다. 응전하겠습니다.”

“함장! 좌로 선회해서 아군 함선들이 도착할 때까지 해역에 대기하시오.”

“속도를 줄이고 선회하겠습니다.”

“속도 올리고 어서 도망가라고!”

작전 중인 이민호 입에서 이렇게 솔직한 말이 나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함대 선두에 섰던 국왕좌승함이 왼쪽으로 급선회하는 사이 계속 늘어난 해적선들이 노를 저어 바다로 나왔다.

300척에 달한 해적선들이 오직 이민호가 탄 국왕좌승함만 노리고 달려들었다. 노를 젓는 갤리선은 짧은 시간 동안에는 속도가 꽤나 빨랐다.

- 쿵! 쿵!

좌승함의 함미 함포 2문이 연달아 포탄을 발사했다. 그러나 아직 파도가 높아서 그런지 명중탄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안정기를 개발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자꾸 미루다가 이렇게 급할 때 함포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하! 해적들의 목적이 밝혀졌습니다.”

해적 포로들을 고문하고 온 해병 지휘관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이민호가 자꾸 함교 뒤쪽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역시 나를 목표로 했나?”

“아닙니다.”

해병 지휘관이 피식 웃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착각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민호는 은근히 상처 받았다.

“해적들은 총독의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를 유인하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그때 마침 태풍이 불어와서 갤리선을 추격하던 에스파냐 함대가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쳇!”

이민호를 목표로 삼을 만큼 간 큰 해적은 없었다. 그리고 상인 겸 해적들을 상인이나 최소한 운송업자로 활용해서 충분한 이득을 나눠주고 있기 때문에 해적들이 이민호를 암살하려고 시도할 이유도 없었다. 고산국 깃발을 단 상선을 해적이 약탈하지 않는 것은 보복이 두려운 것도 있지만 이렇게 고산국을 통해 얻는 이익이 많기 때문이었다.

“나를 알아봤으면 도망가야지 저놈들이 왜 나를 잡으려 들지?”

“전하께서는 주변에서 최고의 부자이시고, 전하께서 탄 배는 보물선으로 알려져 있어요. 마침 혼자 떨어져 계시니 기회다 싶은 거겠죠.”

비올레타가 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빙긋 웃었다. 미녀의 화사한 웃음이 말에 강한 신빙성을 부여하는 것 같아 이민호는 약간 거부감을 느꼈다.

고산국 전선이 군선 역할뿐만 아니라 무역선 역할도 했기에 금은보화나 비단, 모피를 잔뜩 싣고 다닌 경우가 많았다. 소문이 약간 과장된 듯했으나 전혀 거짓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긴급 출동했기 때문에 전선에 실린 상품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쨌든 이 기회에 저 해적선 300척을 잡아야겠소.”

“예. 어서 함대를 모아 대항하세요. 부디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주세요.”

비올레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요청하지 않더라도 이민호는 이빨을 드러낸 해적들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반드시 고산국 소속 배를 공격하지 않았더라도 고산국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바다에서 설치는 해적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의 생명과 재산을 강제로 빼앗으려는 자는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보따리 장사나 하는 편이 나았다는 것을 해적들이 죽어가는 순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다.

“물론이오. 항법사! 함대가 합류하는데 얼마나 걸리겠나?”

“함선마다 50리 간격을 두고 움직였으니 여섯 시간 약간 넘게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분함대 10척이 다 합류하려면 해가 질 것 같았다. 그 전에 갤리선의 노잡이들이 힘이 빠질 것이고, 중간에서 추격을 멈추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척에 불과한 갤리선 외에 나머지 해적선들은 대부분 범선이었다. 좌승함이 바람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해적선을 추격대열에서 낙오시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분함대 소속 전선들과 합류하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함교에서 근무하는 장교들 중에 긴장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다들 태연 작약했다. 그래서 이민호는 화가 났다.

“함장은 너무 여유 만만한 것 같소. 만약 여기서 내가 죽으면 나라 전체가 휘청거리지 않겠소?”

“국왕전하께서 최소한 좌승함에서 승하하시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적선이 대거 추격 중인데도 아직 해병들이 전투위치에 배치되지도 않고 있어요. 에잉! 해군에 문제가 많아요.”

“지금처럼 퇴각한다면 전투 배치시킬 필요가 없습니다만, 해병들을 전투 배치시킬까요?”

“함장은 전투를 시작하시오.”

주위에서 좌승함을 호위해줄 배는 아직 한 척도 없었고, 저 멀리 동쪽 수평선에서 전선 한 척이 급히 달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전투 개시 명령을 내렸다. 도망치는 척하면서 이 정도 거리까지 해적선들을 해안선에서 유인해냈으면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해적선들을 찾기 어려워지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해적들이 기세등등하게 좌승함을 쫓아오는 꼴은 실컷 봐줬다. 이제부터는 해적들을 소탕할 시간이었다. 함장이 지휘관석에 앉아 명령을 내렸다.

“총원 전투배치. 함교 뚜껑 닫아.”

- 덜컹!

좌승함에서 가장 취약한 부위인 함교창 앞을 두꺼운 장갑판이 내려와 덮었다. 두꺼운 나무에 얇은 철판을 덧대 방어재로 쓴 것은 동일한 방어력에 비해 가볍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꺼운 나무와 동일한 방어력이 되는 두께의 철판을 덧대 방어력을 두 배로 올린 것이었다. 기존 나무 방어재에 목재보다 얇은 철판을 덧댄 것은 개량작업이 쉽고, 이 시대에 철판 제조 가격이 너무 비싸게 먹혔기 때문이다. 좌승함이 전선을 개량한 함선이라지만 아직은 목재에 방어력 대부분을 의존하고 중요한 부위 또는 공격받기 쉬운 곳 일부에만 철판을 둘렀다.

“전하! 이 배 한 척만으로 저 많은 해적선들을 상대하시려고요?”

“걱정 마시오, 비올레타 양. 좌승함은 충분히 강하오. 그리고 총독의 원수를 갚고 싶어 하는 사람은 비올레타 양뿐만 아니오.”

비올레타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1대 300의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 쿠웅!

굉음이 울리더니 좌승함이 아주 약간 진동했다. 해적이 쏜 포탄에 전선 뒤쪽이 명중한 것 같았다.

“전하!”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가 보유한 가장 강한 대포로 쏴도 이 배는 끄떡없소. 해적이 보유한 대포는 더 작고 약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비올레타가 겁에 질려 덜덜 떨자 이민호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나 비올레타가 어느새 드레스를 갑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서, 마치 여기사를 적의 총구 앞에 방패로 내세운 냉혈 귀족 같은 어색한 꼴이 되어버렸다.

좌승함의 장갑재 두께를 결정하기 전에 유럽의 대포 여러 가지를 수입해 장갑재에 갖가지 방법으로 쏴보는 시험을 마쳤다. 심지어 포탄 형상을 바꾸고 화약을 두 배로 넣어 쏘는 등 위험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험 끝에 결국 조선 수군이 운용하는 판옥선보다 조금 더 강화된 방어력을 목표로 목재와 철판을 결합한 장갑재를 좌승함의 중요 부위에 둘렀다.

영조 때 판옥선 선현의 외판 두께는 12~18cm였고 정조 때 발간된 <충무공전서>에 실린 거북선의 외판 두께는 4치, 즉 12cm 약간 넘었다. <각선도본>에 실린 판옥선의 전면 이물비우는 널빤지가 아니라 곡목(曲木)으로 만든 사례도 있으니 이것이 통나무일 경우 직경이 25.8cm에 이른다. 이 시대의 대포들 중에서 판옥선 정면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좌승함은 판옥선에 비해 확실히 방어력이 우세했고, 이 시대 화포의 공격력을 감안하면 그 이상 강화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현재 좌승함의 장갑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예외가 대형 캐넌인데 장거리 포격을 우선하는 고산국의 해군 전술에 비추어 볼 때 에스파냐 군함이 단거리 직사화기로 사용하는 캐넌에 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 시대 영국 해군의 주력 화포인 컬버린에 명중한다면 어느 거리, 어느 방향에서도 절대 좌승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

1859년 건조된 최초의 증기 장갑함이며 1축 스크루로 추진하는 글르아르호(La Gloire)의 장갑판은 11.4cm의 철판, 남북전쟁에서 활약한 모니터함은 12cm 강철판을 둘렀다. 이 정도면 같은 시기에 사용된 작렬탄을 대부분 막아내는 수준이었다.

좌승함의 방어력은 판옥선보다 강했으나 19세기 장갑함보다 약했다. 그러나 19세기 장갑함의 장갑 두께는 강선포와 작렬탄이 나온 이후 이것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방어력이었다. 좌승함이나 전선을 19세기 장갑함과 비슷한 수준으로 방어력을 올릴 수도 있었으나 현 시대에는 과잉 방어력이며 철이라는 귀한 자원의 낭비일 뿐이었다.

“좌로 선회! 적 함대 중앙으로 파고들겠다. 함포 자유 사격!”

- 쿠쿵!

함장의 명령을 받은 전령이 함교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함포가 발사되면서 함 전체가 진동했다. 그러나 여기서 배 바깥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함교에서는 오직 함장만 반사경을 이용한 잠망경을 통해 바깥 상황을 살피면서 명령을 내렸다.

“조타수! 우로 2도.”

“우로 2도 잡습니다!”

함교창을 가린 덕택에 함장 혼자서만 바쁘게 됐다. 좌승함의 함포는 전선에 탑재된 개방형 포탑이 아니라 위까지 덮인 폐쇄형 포탑 안에서 수병들이 포탄을 장전하는 식이었다. 해병들은 안전한 갑판 안에서 총안에 총구만 내민 채 해적선을 향해 보병총을 발사했다.

“전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바깥 구경을 하겠소?”

이민호가 왼팔을 내밀자 비올레타가 팔짱을 꼈다. 임시 호위대장 민영이 앞장서고 이민호는 비올레타와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쯤 올라가는데 배에 꽤 큰 충격이 오자 비올레타가 휘청거렸다.

- 쿠쿵!

“이건 뭐죠? 혹시 배가 좌초된 건가요?”

“좌승함이 해적선을 들이받은 것 같소.”

이민호가 전혀 신경 쓰지 않자 비올레타도 안심하는 것 같았다. 계단 위로 올라가니 자그마한 공간이 나왔다. 원래 견시가 근무할 공간인데 유선전화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견시용 관측창도 현재 전투 중이므로 두꺼운 목재와 얇은 철판의 이중 장갑재로 막혀 있었다. 그러나 함장이 사용하는 것보다 길이가 훨씬 짧아서, 마치 이차대전 때 참호전에서 사용한 육상형 잠망경 같은 것이 천장에 달려 있었다.

“이건 잠망경이라고 하오. 손잡이를 잡고 원하는 방향으로 돌려서 볼 수 있소. 보시겠소?”

자리에 앉은 이민호가 잠망경을 올렸다. 그리고 접안구에 눈을 대고 잠망경을 사용해 외부를 관측하는 시범을 보였다.

이민호가 잠망경을 통해서 본 바깥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함포에 맞거나 충각공격으로 인해 부서진 배의 잔해가 바다에 가득 널린 가운데 불타는 배에서 해적들이 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다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해전용으로 해병들에게 소이탄을 많이 지급했더니 전근대 선박에게 확실히 효과를 발휘했다. 돛이나 선체 어느 곳도 불에 잘 탈만한 재료로 만들어진 해적선은 총탄 몇 발만 맞아도 곳곳에서 불길이 일었다.

“어머! 세상에! 한 척으로 해적선 수백 척을 휩쓸고 있어요. 앗! 들이받기 직전이에요!”

- 쿠웅! 까드득! 우직끈~

비올레타가 잠망경을 통해 바깥을 보는 틈을 타서 이민호가 민영을 살짝 끌어안았다. 요 며칠 할아버지를 잃은 비올레타에게 신경을 써줬더니 민영이 이해하면서도 섭섭한 듯했기 때문이다. 민영이 이민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재미없게 민영도 흉갑을 입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매력적인 여성이긴 하지만 조만간 마닐라로 돌아가야 할 여자였다. 이민호도 더 이상 여자를 늘리지 않기로 했으니 욕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결심이 지금까지 한두 번 무너진 것이 아니라서 아무도, 심지어 이민호도 믿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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