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303화 (252/1,000)

00303  36. 소 해적시대  =========================================================================

잠시 기다려도 에스파냐 귀족 페드로는 이민호에게 알현을 신청하지 않았다. 공 점주가 돌아가고 나서도 이민호는 집무실에 남아서 기다렸다. 궁성에 들어온 에스파냐 귀족이 본궁 대기실에 있다고 민영이 귓속말로 보고했다.

“고이티 남작 페드로 씨가 주상아 공주님의 별궁에 거주하는 비올레타 양에게 면담을 신청했어요.”

“설마 구혼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마닐라에 거주하는 모든 에스파냐 청년들과 귀족들이 틈만 나면 비올레타 양에게 구애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설마 고산국 수도까지 비를 쫄딱 맞고 와서 후줄근한 차림으로 구혼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페드로는 30대 유부남이었다. 유럽인들이 연애질할 때 그런 사소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지만 페드로는 책임감이 강한 귀족이었다.

“아무래도 총독의 안위에 이상이 생겼나 보군.”

이민호는 다스마리냐스 총독의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아마도 노환으로 별세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페드로가 국왕인 이민호가 아닌 총독의 손녀 비올레타에게 소식을 전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바깥 비서실로부터 통보를 받은 민영이 정식으로 보고했다.

“전하! 에스파냐 고이티 남작 돈 페드로와 필리핀 총독의 손녀 비올레타 다스마리냐스 양이 함께 국왕전하께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집무실로 불러오도록.”

귀족 신사로서 항상 옷차림에 최대한 신경을 쓰던 페드로의 상태는 평소와 전혀 달랐다. 빗물에 흠뻑 젖은 페드로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 비올레타 양이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 이민호는 총독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음을 확실히 알아챘다.

“돈 페드로, 오랜만이오. 마닐라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소?”

“마닐라에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전하. 그러나 향료 제도로 원정을 떠났던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살해당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몰루쿠 제도에서 전투 중에 전사하셨소?”

에스파냐 함대가 향료 제도로 원정을 떠나더라도 향신료가 나는 작은 섬들을 군사적으로 점령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지 않기로 예전에 포르투갈과 약속했었다. 그러나 결국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라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브루나이에서 한 것처럼 몰루쿠 제도의 술탄들에게도 대포를 팔아먹었다. 이것은 당연히 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마닐라를 공격했던 명나라 해적들 일부가 포르투갈 대포와 총기로 무장한 사례도 있었다.

반대로 에스파냐는 버마에서 용병으로 일하는 포르투갈 모험가들을 엿 먹이기 위해 시암에 화승총을 판매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가끔 협상을 벌여 직접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면서도 다른 방법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총독이 마닐라에서 출항하고 이틀 후에 중국인 노잡이들이 선상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새벽에 총독과 에스파냐 병사들을 살해하고 갤리선을 탈취한 다음 중국 방향으로 도주했습니다.”

“이런!”

고산국 함대가 에스파냐와 함께 술루왕국을 치러 갔을 때, 명나라 해적들이 노잡이로 일하면서 총독을 노리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 이민호가 막아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와 똑같은 술수에 총독이 당했다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노잡이들이 발목이 묶인 노예가 아니라 총독부에 고용된 자유민이며, 당연히 개인 무장도 허용돼서 이런 선상반란이 가능했다.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몇 달 동안 준비를 통해 몰루쿠 제도로 원정을 떠날 대규모 함대를 구성했다. 200척 가까운 본 함대를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함장에게 맡겨 먼저 출발시킨 총독은 그 다음 날 갤리선 몇 척만 이끌고 따로 출발했다고 한다. 그런데 총독이 탄 갤리선에서 선상반란이 일어났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새벽 마지막 불침번 시간에 노잡이로 위장한 해적들이 새벽잠에 빠져든 에스파냐 병사들을 죽이고, 소란 속에서 잠이 깬 총독이 비무장으로 선실에서 나오는 순간 명나라 해적 여러 명이 기습해서 살해했다고 한다. 선상반란이 일어난 줄 모르고 단순히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투구를 쓰지 않고 나선 총독은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지난번과 달리 총독께서는 신중하게 노잡이들을 선택했습니다. 특히 기함에 고용된 노잡이들은 10년 넘게 필리핀 총독부에 협력했던 자들로만 골랐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동시에 해적들과도 끈이 닿아있던 자들이란 사실을 저희들은 몰랐습니다.”

“해적들은 어디로 도망갔소?”

“총독 일행을 살해한 해적들은 살아남은 에스파냐 병사들이 물에 뛰어들어 탈출하자 본 함대가 몰려올 것이 두려워 일제히 북쪽으로 도주했습니다. 국왕전하! 원수들을 잡도록 도와주십시오! 바다가 넓어 해적들을 찾지 못해 이렇게 국왕전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탈출한 선원들 외에 총독의 비서 후안 데 쿠엘라, 그리고 프란치스코회 신부 몬티야가 선실에서 사로잡혔다. 해적들은 이들을 해안에 내려놓고 떠났다고 한다.

마닐라에는 수십 년 동안 에스파냐, 명나라, 필리핀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꾸준히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때 수천 명이나 되던 일본인 거주자들이 고산국으로 이주하거나 안남이나 시암으로 떠난 다음이라 그나마 덜 불안하고 덜 복잡해진 것이 이 정도였다.

에스파냐 인들이 마닐라에 인트라무스라는 성벽도시를 세운 것은 바다로부터의 공격을 막을 뿐만 아니라, 마닐라에 거주하는 최대 수만 명의 중국인 거주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에스파냐인들은 명나라 국적자들을 일정한 지역에만 거주하도록 제한하고 밤에는 성벽 밖으로 내보내면서 안전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이렇게 마닐라 밖에서 문제가 생겼다.

“전하! 제발 도와주세요!”

“알겠소. 해군을 출동시키겠소.”

비올레타가 눈물로 호소하자 이민호가 요청을 수락했다. 에스파냐는 명나라에 이은 두 번째 고객이라 서비스를 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 넓은 바다에서 갤리선 세 척을 찾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다만 이순신이 여러 가지 다양한 훈련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차에 해상수색 작전이나 해상봉쇄 작전 연습을 한 번 하는 셈 쳤다. 사실 고산국 함대의 막강한 화력이라면 바다에서 갤리선을 찾는 것보다는 왜선 수백 척을 쳐부수는 것이 훨씬 쉬운 임무였다.

“민영이 해군에 연락해서 긴급 출동 태세를 갖추라고 전해.”

“해군 함대 전원 출동하는 것입니까?”

“그래. 휴가자가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빼고 한 시간 후에 전 함대 출동이다. 나도 가겠다.”

외국으로 원정 가는 것이 아니라서 이민호도 오랜만에 나가보기로 결정했다. 배가 부른 아내들을 남겨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작전이 며칠 걸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얼른 뛰어가 군복으로 갈아입고, 아내들과 작별 인사를 간단히 마친 이민호는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과 함께 빗속에서 말을 달렸다.

아리수 하구에 위치한 해군 함대 선착장에서 출항준비가 한창이었다. 모자라는 보급품은 나중에 해상보급을 받기로 하고 바로 기본적인 연료와 사흘 치 식량과 식수만 확인하면 바로 출항시킬 예정이었다.

이민호는 호위들과 함께 아직 부두에 계류된 해군 기함에 도착했다. 함교 뒤 함대사령부실에서는 이순신이 조선에서 데려온 송희립 등 군관 몇 명과 마카오 출신 항해사 몇 명으로 함대사령부를 구성해 해도를 살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명나라 해적을 잡는 임무라고 들었습니다.”

다른 해군 승조원들처럼 근무복을 입은 이순신이 이민호를 맞이했다. 원래 키가 크고 최근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이순신은 근대 해군 복장과 비슷한 해상근무복을 입어도 잘 어울렸다.

“선수에 함포가 달린 에스파냐 갤리선 세 척이 필리핀 해역에서 명나라 해적들에게 탈취당했습니다. 그것들을 잡는 것이 이번 출동의 목표입니다. 목표 배들이 마닐라 근해에서 북쪽으로 향했다고 하니 광저우나 복건으로 향하는 1500리에 이르는 바닷길을 막아야 합니다. 함대를 일렬로 편다면 너무 넓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총함장님?”

“전선 한 척이 50리를 담당하더라도 30척이 소요됩니다.”

“한 척이 50리씩이나 담당할 수 있을까요?”

“오해하셨습니다, 전하. 낮에 비가 오지 않아 시계가 좋을 경우 망루에서 사방으로 70리 넘게 관측이 가능합니다. 전선 11척만 동원해도 명나라 남해안을 완전히 봉쇄 가능합니다만 현재 파도가 높고 시계가 불량하여 전선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전선에서 가장 높은 깃대 망루에서 한 방향으로 20km만 관측해도 좌우 40km, 100리였다. 전선은 갤리선보다 속도가 훨씬 빠르므로 만약 발견만 되면 추격해서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럼 바로 출발합시다. 열 척은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30척으로 되겠습니까?”

“더 촘촘하게 배치시키고도 남습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전하.”

“고맙습니다, 총함장님.”

이민호는 해군 기함에서 내려 국왕어승함에 탑승했다. 그리고 전선 9척과 탐망선 1척을 이끌고 먼저 출항했다. 수송선들은 보급품 적재를 마치고 나중에 출항하기로 했다. 동사도를 보급거점으로 지정해 연료나 식량이 떨어진 배는 그 등대섬에서 보급받기로 했다.

넓은 바다로 나오고부터 파도가 요동치며 배 내부를 뒤흔들었다. 태풍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민호가 함교에서 국왕 집무실로 가는 짧은 거리를 벽을 짚으며 걸어야 했다. 집무실에 도착하니 민영이 이민호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비올레테 양을 좀 달래주세요.”

“응? 이 배에 탔나?”

페드로는 다시 갤리선을 타고 출항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작은 갤리선을 타고도 태풍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총독의 죽음으로 인해 에스파냐 사람들이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이민호는 마닐라에 남아있는 명나라 사람들이 보복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1만이 넘는 명나라 상인들이 이미 다 죽임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이민호가 문을 두드린 다음 비올레타가 머무는 방에 들어갔다. 소파에 앉은 비올레타 양이 펑펑 울고 있었다. 주상아 공주가 보낸 시녀가 비올레타 양을 달래다 벌떡 일어나 이민호에게 인사했다.

“비올레타 양!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내가 반드시 할아버지의 복수를 해주겠소.”

“어서 해적들을 잡아주세요. 흑흑~”

품으로 안겨든 비올레타를 끌어안은 이민호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젊은 여성의 달콤한 체향이 이민호의 후각을 자극했으나 불쌍해서 비올레타에게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후 내내 울다가 지친 비올레타가 어느새 잠이 들어 이민호가 그녀를 안아들어 침대에 뉘였다.

할아버지는 총독, 아버지는 총함장, 비올레타는 통역 겸 외교관으로서 집안 식구들 전체가 한 가지 가업에 종사하고 있는 가문의 딸이었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와 부모를 따라 범선을 타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까지 온 것만으로도 비올레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민호에게는 노예로 고산국까지 팔려온 백인 궁녀들이 더 불쌍하게 여겨졌다.

함대는 밤새도록 항해해 아침에 동사도를 지났다. 함교에 오른 이민호가 망원경을 들었다. 현대 이름 동사군도는 둥그런 환초 모양이었고, 올 봄에 서쪽 섬에 세운 등대가 하얗게 반짝였다.

조선에서 수입한 시멘트는 별로 아깝지 않은데 굵은 철근을 3톤 넘게 들여야 해서 등대를 세울 때 이민호의 속이 몹시 쓰라렸던 곳이었다. 다른 곳에 세워진 등대는 철근을 아끼기 위해 벽돌로 지었지만 이곳은 섬의 해발고도가 낮아 등대가 해일에 휩쓸릴 것이 우려돼 어쩔 수 없이 철근 콘크리트로 세웠다.

그러나 등대를 만들어놓으니 여러 모로 활용할 수 있었다. 등대는 주변을 항해하는 선박들에게 항로 정보를 제공하고 인산염을 캐는 노무자들이나 주변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에게 안전한 숙소가 되었다. 동사군도 산호초에 5~6미터씩 쌓인 인산염은 아주 좋은 비료였다.

“동사 등대에 변고가 발생했습니다!”

“함장! 등대섬으로 향한다.”

망루에 오른 무상이 보고하는 동시에 이민호가 명령을 내렸다. 다시 망원경을 들어서 확인해보니 등대 꼭대기 깃대에 게양한 깃발이 빨간색이었다. 등대에는 해병 겨우 1개 분대가 방어하고 있어서 일정 규모 이상의 적에게 함락될 가능성도 있었다.

============================ 작품 후기 ============================

또 늦어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