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4 35. 기술개발 =========================================================================
“잘 때는 반드시 모기장을 치고 자도록 해. 물은 끓여 마시고. 괴혈병 안 걸리게 말린 과일도 매일 꼬박꼬박 먹어.”
“예, 전하. 하하! 교육 받는 석 달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멀리 떠나는 배를 국왕이 직접 선착장에 나와서 전송하는 자리였다. 이민호는 마치 막내며느리를 못 미더워하는 시어미처럼 잔소리를 해댔다.
“내가 걱정 안 하게 됐어? 해적선을 만나면 싸울 생각하지 말고 웬만하면 도망쳐. 그놈들이 누군지 살아 돌아와서 보고를 해야 내가 복수를 해줄 수 있어.”
“하하하! 예,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돌아와서 뵙겠습니다. 그간 강녕하십시오, 전하.”
김몽돌 대위를 비롯해 탐사대원들이 이민호에게 정중하게 군례를 올렸다. 마카오 대학에서 항해학과를 졸업하고 해군에서 일등항해사와 부장에 이어 탐망선장에 오른 김몽돌 대위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냈다. 이렇게 이민호의 속을 끓이며 탐사선 한 척이 선착장을 떠났다.
탐사선은 전선보다는 작지만 장거리 항해에 더 적합하도록 선체 폭이 좁고 길게 설계됐다. 그리고 기관 2기에 함포 2문이면 남쪽의 해적을 상대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아닌 탐사를 목적으로 떠난 배에는 온갖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탐사선의 목적지는 브루나이 넘어 현대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위치한 넓은 해역이었다. 말래카 해협에서 포르투갈이 장악한 요새 항구에 들렀다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사이 순다 해협의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는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임무였다. 순다 해협에 접한 반탐과 그 동쪽에 위치한 자야카르타 또는 순다끌라빠라는 항구도시에 차례로 입항해 고산국의 상품 약간을 거래하고 그 지역에 고산국 이름을 우호적으로 알리는 것이 세 번째 임무였다.
김몽돌을 비롯해 항해학과 출신들 중에는 전라좌수영이나 경상우수영 등 수영 관아에서 심부름하던 삼반하인인 군노(軍奴), 사령(使令), 급창(及唱)의 자제들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바다에 익숙한 이들에게 고산국 해군은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실제로 해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고향에 있던 가족들 전체를 고산국으로 이주시킨 사례가 많았다.
“브루나이가 정말 중요한 곳이에요, 주인님.”
“그럼! 덕택에 남방 항로가 확 열렸어. 다들 살아서 돌아와야 할 텐데.”
“너무 걱정 마세요. 탐사대원들이 잘할 거여요.”
이민호가 혜영과 함께 마차에 타고 선착장을 떠났다. 탐사선을 출항시킬 때마다 이민호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브루나이는 내연기관의 연료이며 다양한 화합물의 재료인 석유를 산출할 뿐만 아니라 남방 항로를 연결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고산국에서 출발한 외륜선이 남쪽으로 항해할 때는 바기오의 외항인 산토 토마스, 마닐라, 팔라완에 이어 브루나이에 이른다.
이곳까지는 고산국이 확실히 장악한 안전 해역이었다. 명나라 해적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해적들은 토벌당할까 두려워 섣불리 고산국이나 유구국 상선을 공격하지 못했다.
말라리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민호가 남방 항로 개척을 서두르는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아시아 진출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특히 네덜란드와 영국은 총칼로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그 지역을 일단 점령하고 봤다. 원주민과 평화롭게 무역을 하기에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지역을 점령하면 원주민들에게서 세금 명목으로 금품을 수탈하거나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서양 범선이 인도와 버마를 통해 말래카 해협으로 가려면 계절풍을 타야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동해안 중부 잔지바르 섬에서 적도 반류를 이용할 경우 사계절 어느 때라도 자야카르타까지 직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가 가장 걱정하는 곳이 바로 이곳 순다 해협이었다.
현대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동해안에 떠있는 잔지바르 섬은 12세기 아랍인들이 터를 잡을 때부터 노예무역을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1503년부터 잔지바르 섬을 점령해 이용하고 있었으나 18세기에 오만에게 빼앗기게 된다. 포르투갈은 또한 동아시아의 해상교통로에서 극히 중요한 지역인 말래카 해협을 1641년 네덜란드에게 빼앗긴다. 그 전에 네덜란드는 1619년에 자카르타를 손에 넣는다.
이민호가 막으려는 것은 1595년 순다 해협을 통과해 자바 섬에 도착하는 네덜란드 상선대였다. 이민호는 다른 것은 모르고 네덜란드 상선들이 인도네시아에 도착하는 연도만 기억했다.
린스호텐(Jan van Linschotenn)이 <동인도 항해지> 2권을 출간하기 전에도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은 동인도 항로에 높은 관심을 보였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분점한 동방무역을 빼앗고 싶어 했다. 향료 외에도 차, 칠기, 비단, 도자기는 유럽에 가져오기만 하면 확실하게 돈이 되니 어떻게든 동아시아와 무역을 하고 싶어 했다.
1594년 암스테르담에서 ‘먼 나라 회사’가 설립된 이후 수많은 무역회사가 생기고 서로 합병되거나 망했다. 지나치게 난립하는 바람에 경쟁이 치열해져서 의회의 압력을 받아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이 1602년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상선들은 그 전부터 동남아시아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남쪽 항로를 가로막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피해 북극을 통해 동아시아로 항해하려는 시도도 네덜란드가 했다. 그러나 북방항로를 개척하려는 네덜란드의 시도는 두 번 다 북극곰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1596년 바렌츠의 세 번째 시도도 얼음에 해로가 막히는 바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1595년에 순다 해협을 통과한 이들은 코넬리스(Cornelis)와 프레데릭 하우트만(Frederik Houtman) 형제였다. 이들은 포르투갈에서 출발한 네 척의 범선으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자바 섬 북서쪽 끝 반탐에 도착했다.
“히딩크 말고는 괜찮은 네덜란드 사람이 전혀 없어.”
“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네덜란드 때문에 앞으로 고생해야 할 것을 각오한 이민호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마차는 어느새 궁궐에 도착했다. 마차가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에 맞춰 국왕의 깃발, 태극기가 게양됐다. 왕실에서 벌이는 사업이 너무 많은 탓에 태극기는 아직 고산국의 국기가 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조선에서 꽤 많은 전현직 문무 관리들이 고산국으로 건너왔다. 특히 왜군이 울산에 주둔한 탓에 2년 동안 쑥밭으로 변한 경상좌도의 선비와 의병들이 이민을 많이 왔다.
이 과정에서 사관학교장 김학이 일가친척,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가족 단위로 초청해서 이민호에게 칭찬을 받았다. 여차하면 다단계나 인신매매 비슷해질까 봐 상금을 주지는 못했으나, 김학의 계급을 확실히 올려주었다.
7월 중순, 예국참판이 사절단을 이끌고 조선에 가려고 준비하는 시간에 중요한 사람이 방문했다. 함경북평사였다가 지금은 영흥부사로 일하고 있는 정문부가 휴가를 내어 잠시 고산국을 방문한 것이다.
직접 초청하지 않았는데도 정문부가 고산국에 오자 이민호가 전우를 환영한다는 핑계들 들어 직접 만났다. 다시 보게 된 정문부는 함경도의 대장이 아니라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새파랗게 젊은 선비였다.
함경도에서 날고 긴다는 거친 무관들을 지휘해 대첩을 거둔 사람이 올해 겨우 29세 청년이라는 사실에 이민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예나 지금이나 군복을 입으면 나이가 훨씬 더 들어보였다.
“정 부사 자허는 작년에 정말 대단했소. 덕택에 함경도에서 가등청정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소. 그 능력을 새로운 땅에서 펼쳐보는 게 어떻겠소?”
“제독총병관 대인, 아니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저를 잘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개 썩은 선비 나부랭이로서 군대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북관대첩을 이룬 장수가 하실 말씀이 아니오.”
“그거야 다른 장수들이 잘 싸우고 전하께서 도와주셔서 대첩을 이룰 수 있었지요. 그런데 고산국이 듣던 것보다 많이 발전한 것 같습니다.”
궁성 앞이 허허벌판일 때의 목격담이 아직도 조선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서울 안 가 본 사람이 가 본 사람을 이긴다고 했다. 사창신문을 통해 고산국의 풍물과 발전상을 조선에 꾸준히 소개했음에도 고산국을 아직 변방 개척지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나라를 세우느라 백성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런데 사람이 없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어요. 자허가 일 좀 도와주길 바라오.”
“저에게 장수가 되어달라는 뜻이 아니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더더욱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문재도 없고 내세울 만한 무재도 없는 무능력한 자라서 전하께 도움이 못 되어 드릴 것 같습니다.”
정문부가 시무룩해져서 대답했다. 정문부는 북관대첩의 주역이었으나 조선 조정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함경도 북도 병마절도사는 정현룡에게 돌아갔고 정문부는 겨우 영흥부사에 제수됐다.
함경도 백성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정문부는 지금은 그저 인구가 적은 시골의 수령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웅이 대접받지 못하는 세태가 주변 사람들을 몹시 안타깝게 만들었다.
“나는 정 부사 자허의 능력을 옆에서 직접 본 사람이오. 그래서 큰일을 맡기고자 하오.”
이민호가 동아시아 지도를 펼쳤다. 고산국 소속의 모든 배가 돌아다니는 곳마다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고 해안선을 측량해 예전보다 많이 정밀해진 지도였다.
“여기 지도를 보시오. 고산국 남쪽에 서반아가 비율빈이라는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소. 그런데 내가 이 루손 섬 북부를 그들로부터 얻어 다스리고 있소. 헌데 이곳을 다스릴 마땅한 사람이 없어 안심이 되지 않는다오.”
“설마 제게 이 넓은 땅을 맡기시려고요? 섬 일부라지만 고산국 전체보다 넓은 지역 아닙니까?”
“문재와 무재를 동시에 지닌 자허가 가장 적당한 것 같소. 여태까지 공석인 바기오 총독 직을 맡아주시오. 사법을 제외한 군사와 행정 양쪽 모두를 관할하는 중요한 직책이오. 임기는 3년이오.”
이민호는 아예 처음부터 임기를 못 박았다. 지방관이 토착 세력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명나라의 지방관 중에서 최고 관직인 순무와 총독들은 반란을 일으킬 의향이 전혀 없고 모함을 받지 않았는데도 북경으로 잡혀가 최후를 마치는 경우가 흔했다.
“제게 문무 양쪽의 권한을 주신다고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반란을 일으키려면 일으키시구려. 자허가 왕이 되든 말든 고산국하고 무역이나 계속하면 나는 상관없소.”
“농담입니다. 몇 가지 견제장치를 갖추면 앞으로 그럴 염려는 없어질 것입니다. 허나 열대지역에는 풍토병이 심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말라리아, 그러니까 학질을 치료할 약재가 이번에 입수됐소.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우선이겠으나, 혹시나 학질에 걸리더라도 완치될 가능성이 커졌소.”
마카오 대학 의학부에서 그 동안 말라리아를 집중 연구하다가 이민호가 넘겨준 현미경 덕분에 전염 경로와 발병 기제를 전반적으로 파악해냈다. 그 동안 치료제나 예방약은 개발하지 못했는데 더운 지역 원주민들이 개똥쑥을 민간요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문제는 개똥쑥에 수백 가지 성분이 혼합돼 있어 어느 것이 말라리아에 유효한 약리 작용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의학부 교수와 학생들은 개똥쑥에서 유효한 약재 성분을 추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말라리아에 결정적인 약리 작용을 하는 두 가지 성분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추출된 물질은 개똥쑥에서도 극미량이라서 정제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 약재 성분을 환자에게 투약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개똥쑥을 차로 다려 마시는 편이 치료 효과가 훨씬 좋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주 비싸면서 교훈적인 삽질을 했으나, 어쨌든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었다.
“학질을 치료하다니 대단하군요. 그렇다면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 정문부는 결국 가족을 이끌고 고산국에 정식 이민 수속을 밟았다. 정문부는 가족 수에 따라 공짜로 배분되는 농지 면적이 넓은 데에 놀랐다.
“전하! 제가 고산국을 잘 알지 못하니 잠시 중앙관서에서 일하면서 분위기를 파악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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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