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9 35. 기술개발 =========================================================================
이민호는 여기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 총알을 그대로 써서 긴 사거리와 큰 충격량을 갖게 할 것인가, 아니면 총알 크기를 줄여서 실탄 휴대량을 늘릴 것인가. 이민호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대규모 전투를 벌이더라도 화승총 사수가 하루에 열 발도 쏘기 어려웠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시간이 짧은데 반해 장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산 전투에서 봤듯이 보병총을 사용하면 한 전투에서 병사 한 명이 200발을 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고산국 원정군은 항상 소수로서 다수의 적을 상대하다 보니 이런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보병총은 현대 돌격소총은 물론 그 이전 시대 주력 소총의 구경인 7.62밀리미터보다 커서 실탄 200발을 병사가 휴대하려면 허리가 휜다. 부대의 이동 속도를 희생시키거나 다른 장비 무게를 더 이상 줄일 수 없었으므로 200발은 휴대 불가능한 양이었다.
현재 보병총으로 무장한 해병의 기본 탄약 휴대량은 60발에 불과했고 유탄발사기 사수는 총탄 40발과 유탄 6발을 휴대했다. 물론 승마보병과 기병은 말에 예비 탄약을 갖고 다니고, 해병은 보통 전선에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아 탄약이 부족할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일선에서 직접 총을 쏘는 병사들은 항상 기본 휴대량이 부족하다고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상급자에게 건의하는 바람에 이민호는 귀가 아플 정도로 반복해서 건의사항을 보고받았다. 그러나 만약 총기 구경을 줄여 탄약 휴대량을 늘이면 총이 약하다고 항의할 것이 분명했다.
“에이! 몰라!”
이민호는 소구경 총탄을 개발하고 시험할 시간이 아까워서 기존 총탄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고산국이 상대하는 적이 일본이나 여진족처럼 갑옷을 중시하는 전쟁문화라서 총알 크기를 줄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탄약 휴대량을 20발 더 늘려줬다. 무겁더라도 병사들이 원해서 하게 된 고생이니 달게 받아들일 것 같았다.
신무기 개발은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시간과 비용은 이민호가 감당할 문제였고, 노력은 장인들이 해야 했다. 이민호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장인들을 쭉 훑어보면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장인 대표는 이민호가 또 무슨 일을 시킬까 두려워 그저 오들오들 떨 뿐이었다.
“야간 전투를 자주 하다 보니 총탄의 궤적을 보여주는 예광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리고 일본은 목조건물이 대부분이라 소이탄을 쏘면 쉽게 불을 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나 두 가지 탄약을 모두 갖고 다니기 어려울 테니 이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탄을 만들어봅시다. 이 기회에 함포용 소이탄도 만듭시다.”
“예, 전하. 훌쩍~”
무기는 생산보다 개발 과정이 훨씬 어려웠다. 장인들은 당분간 집에 들어가기 힘들 것 같았다.
7월에 접어들어 이민호가 낮이나 밤이나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일본에서 보낸 사절단이 궁성을 방문했다. 왜선이 해중국 요새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대포에 맞을 뻔했으나 마침 유구국에서 돌아오던 중형 외륜선을 만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돛 외에도 수부들이 노를 젓는 사신선은 아리수 강 하구를 통해 포구까지 올라왔다.
다이묘 하나와 사무라이들이 주축인 일본인들은 포구에 내릴 때 어리둥절했다. 인구는 겨우 5만여 명에 불과했지만 고산국 수도의 장엄함에 놀란 것이다. 도로는 넓게 잘 닦이고 벽돌이나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도로변 건물은 주로 2층이나 3층의 대형 석조 건물이었다. 지진 때문에 성곽 외에는 목조건물만 짓는 일본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호위대가 포구까지 사신들을 마중 나가서 궁성 알현실로 안내해 기다리게 했다. 이민호는 일부러 5분 정도 늑장을 부리다가 알현실에 나타난 다음 느긋하게 옥좌에 올랐다.
“저번에 봤던 얼굴이군. 일본국 태합전하께서 보내셨다고?”
“그렇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 전하께 일본국 무사 등당고호가 삼가 인사를 올립니다.”
토도 다카토라(藤堂高虎)는 오사카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야스(豊臣秀保)의 가신이었다. 풍신수길 밑에서 외교를 담당하던 센리큐는 이미 할복했고 행정을 담당했던 이시다 미쓰나리까지 조선에서 죽었다. 결국 이민호와 안면이 있는 토도 다카토라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 전에 저희 주군 도요토미 야마토 추우나곤(大和 中納言) 히데야스 님을 살려주신데 대한 감사 표시로 소소한 물품이나마 준비했으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뜻밖에 예의를 아는 사람들이었군. 잘 받도록 하지.”
토도 다카토라가 두루마리를 바치자 이민호가 호위를 통해 받아 예물 목록을 읽었다. 금과 은, 진주와 비단부터 시작해서 전복 말린 것과 각종 건어물, 버섯 등등 종류도 많았다. 금액으로 따지면 금이나 다른 물건은 소액에 불과했고 은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100만 석 다이묘에게 은 10만 냥이라면 적지도 많지도 않은 금액이었다. 빠듯한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민하는 다이묘에게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고, 백성들을 쥐어짜며 사치나 즐기는 다이묘에게는 적은 금액이었다.
“태합전하께서 고산국 국왕전하의 역량에 감탄하시면서 화의를 제안했습니다. ‘조선에 파병된 일본군이 아쉽게도 모두 전멸했으므로 전쟁은 이만 그치는 게 어떨까 한다. 그러니 고산국왕전하께 삼가 내 말을 전하라’고 태합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대로 침략했다가 마음대로 전쟁을 끝내?”
이민호의 기억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이라는 유명 만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물론 일본에서 먼저 공격했으니 사죄를 해야 마땅하나, 정치라는 것이 또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니 사과와 유사한 다른 해결책을 모색했으면 합니다.”
“글쎄. 사과 문제라면 침략을 당한 조선이나 그 종주국 명나라와 해결해야 할 일 아닌가? 여긴 뭐하러 왔나?”
이민호도 좀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분명히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으니 조선에 가서 사과를 해야 이치에 맞았다. 그러나 일본 사신이 조선이 아닌 고산국에 와서 사과 운운하는 이유가 있었고, 누구나 빤히 아는 사실을 사신에게 직접 말하도록 강요했다.
“아주 솔직히 말씀드려서 일본 입장에서는 사실 조선이나 명나라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태합전하께서 두려워하시는 것은 고산국이 가진 함대와 그 화력입니다. 언제든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에 일본인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놀라기만 했어?”
“일본인들이 상하 모두 다르지 않게 고산국의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좀 솔직히 이야기하는군.”
이민호가 자꾸 비꼬자 토도 다카토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러나 이 사신은 맡은 바 임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꽤나 성실한 사람이었다.
“태합전하께서는 고산국과 일본국이 지나간 은원을 모두 잊고 돈독하게 우의를 쌓는 건실한 관계가 되길 바라고 계십니다. 언제든 고산국 상선이 나가사키에 입항해서 무역을 해도 좋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누구 맘대로? 내가 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군자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여기서 멈추면 나는 손해만 보라고?”
“적당한 한도 내에서는 배상금을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대신에 공식적인 사과는 하지 않는 걸로 해주십시오.”
이와미 은광을 두 번이나 털어먹고 기마무사들의 갑옷을 북경에 팔아먹었지만 큰 금액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고산국에서 이번 전쟁에 들인 비용이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과연 일본에서 전쟁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런데 덕천가강은 죽었나?”
“예.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내대신(內大臣)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사카 성의 방어를 진두 지휘하셨습니다. 천수각이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오지 않으시고 불타는 천수각 안에서 가신들과 함께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셨습니다.”
그러나 이민호는 직접 참전했기에 오사카 성의 천수각이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토도 다카토라가 덕천가강의 마지막 장면을 얼버무리면서 가짜로 꾸미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최후가 부끄러울 정도였던 모양이었다. 덕천가강이 전투 내내 우왕좌왕 도망 다니거나 어디에 숨어 있다가 질식한 다음 불에 타 죽었을 것이라고 이민호는 예상했다.
“그 분은 정말 장렬하게 전사하셨군. 무사는 그런 멋진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네. 덕천 내대신의 최후를 그림으로 그리거나 동상을 세워 후세에게 알린다면 어떨까?”
“쿨럭! 그것도 내대신의 명예를 드높일 좋은 방법이겠습니다. 하온데 전쟁비용이 혹시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됐네. 어차피 배상금을 받고 이번 전쟁을 그만두지 않을 테니 그 비용이 자그마치 2천만 냥이나 된다고 말해줄 필요가 없겠지.”
“허억!”
하마터면 외국 사신이 심장마비로 알현실에서 죽을 뻔했다. 이민호의 과장이 아주 약간 심했다. 놀란 토도 다카토라는 고산국에 단 하루도 머물지 않고 허둥지둥 일본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 날 늦게 겐타로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고산국에 전쟁배상금으로 은 5백만 냥 정도를 지불하는 선에서 끝내려고 한다는 소식이었다. 일본 전체를 통틀어 석고수가 천만 석 약간 넘는다고 보는데 이민호가 그 이상을 달라고 했으니 화의는 깨진 셈이었다.
그리고 겐타로는 만약 고산국과의 화의가 결렬될 경우 일본이 먼저 고산국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했다. 일본에 과연 배를 만들 목재가 남아있을까 싶었지만, 신궁을 뜯어서 배를 만들기도 했던 미친놈들이니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유구국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온다면 그리 큰 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사신이 돌아가고 나서도 고산국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궁성에서 군사관계자들이 모인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주인님은 반드시 일본을 징치하시겠다는 뜻을 일본 사신에게 정면으로 밝히셨어요. 풍신수길의 성격상 조만간 그가 먼저 기습을 해올지도 몰라요. 아직 죽지 않았다면요.”
“혜영이 한 말이 맞아. 왜군의 침략에 대비해야지. 만약 왜군이 고산국을 기습 공격한다면 아리수 하구보다는 해중국 요새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겠어. 이번에 사신선이 중간에 있는 유구국 모르게 갑자기 해중국 앞바다에 나타난 거잖아? 동원체계를 다시 점검하고, 해군을 유구국 주변에 전진배치 시켜야겠다.”
이민호는 유구국에 경고를 전하는 국서를 보내고 전선 여섯 척을 급히 유구국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이 명나라를 치러가는 길을 빌리겠다는 이유로 조선을 먼저 공격했듯이, 일본이 고산국을 치려면 중간의 유구국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해병 750명이면 왜군의 선발부대가 상륙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 사이에 본진이 소집되어 이동하기로 했다.
군사지휘관들이 부대로 돌아가려고 바삐 움직이고 이민호도 대장간으로 가기 위해 회의실에서 급히 나왔다. 눈앞에 어디서 자주 보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아직 고산국 궁성에 남아있었다.
“다들 왜 그리 바쁘세요?”
“일본이 고산국에 쳐들어올 가능성이 높아서 대비하려는 거요.”
“이 한여름에요? 바람 방향이 반대라서 힘들 텐데요. 일본은 고산국이 아니에요.”
“맞소.”
허탈해진 이민호가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여름이었다. 그리고 일본에는 배도 없고 아직 수부를 대규모로 동원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배를 대량으로 만들거나 노잡이들을 징집할 때마다 겐타로에게 포착됐었다. 만약 그런 정황이 발견된다면 겐타로가 먼저 보고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본 사신선이 유구국 모르게 온 것은 유구국이 일본에게 적대지역이기 때문에 북쪽으로 약간 우회한 탓이었다. 그러나 모든 왜선이 이런 항해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조선에 왔던 수천 척에 달하는 왜선들 중에서 전투선은 적은 비율에 불과했다. 대부분 왜선은 병력이나 군량을 실어 나를 때 수부들이 노를 젓지 않고 돛만 이용해 항해했다. 군량을 운반하는 수송선에도 수부들을 배치해 노를 저어 항해한다면 일본은 도저히 식량을 감당할 수가 없다.
지난번에 부산포에 투입됐던 왜선들에는 전원 노잡이들이 배치됐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예외에 속했다. 풍신수길이 부하 다이묘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무리해서 수부들을 징발한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그러니 천 척이 넘는 왜선들이 유구국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해중국 앞바다에 나타날 일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