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83화 (232/1,000)

00283  34. 종전  =========================================================================

옆 나라, 또는 적대적인 영주에게 땅을 빼앗기거나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군대를 길러야 하고, 군대를 보유하려면 군량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세금을 너무 많이 올리면 백성들이 영지 밖으로 도망가니 영주들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선정을 베풀지 않으면, 불안해진 가신들에 의해 영주가 암살당하거나 쫓겨난다.

이런 상황에서 영주들이 사치를 부릴 경제적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에게 비단 옷을 사 입힐 돈으로 차라리 화약 한 냥이라도 더 사는 것을 택했다.

영주들이 군자금으로 쌓아놓은 돈이 있을 리가 없고 상인들에게 빚만 안 져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화약이나 무기를 사려면 돈이 필요했고, 영지 안에서 팔아서 돈을 마련할 것이 별로 없으니 사람이라도 팔아야 했다. 큐슈의 다이묘들이 경제관념이 없어서 화약 한 통에 처녀 50명과 교환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도 나름대로 절박했다.

“그럼 다 죽이실 건가요? 주인님이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어요.”

“꼭 그런 건 아니야. 항복을 받아서 명나라에 보내면 황제가 알아서 쳐 죽이겠지.”

생각 같아서야 이곳 동래 땅에서는 물론 일본 땅에서도 왜인들을 바다로 싹 밀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긁어모은 1만 병력으로 가능한 일이 절대 아니었다.

만약 동래에서 항복을 받아들여주지 않고 왜군을 몰살시킬 경우 그 다음 일본 정벌에 애로 사항이 꽃 피게 되어 있었다. 이민호는 바로 이것이 마음에 걸렸다.

영주들이 동원한 왜병들은 물론 만약 농사짓던 왜인들까지 들고 일어나면 대책이 안 선다. 점령지가 늘어날 때마다 치안유지와 보급선 확보를 위해 어느 정도 병력을 떼어놓아 지켜야 한다. 전선에 투입될 수 있는 병력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럼 어느새 진격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왜군은 바다로부터 포격을 받지 않을 위치인 황령산 북쪽에 목책을 설치하고 있었다. 조선군 기마병들은 멀지 않은 거리에서 돌격 태세를 갖췄다. 이미 오후가 됐지만 숙영지 따위는 건설하지 않고 오늘 안에 사생결단을 낼 각오를 다졌다.

이에 반해 조선군 보병들과 명군은 왜군 진영에서 10리 북쪽에 진영을 세웠다. 전투가 오늘 안으로 끝나더라도 숙영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조선군과 명군은 고산국 원정군을 위해 가운데를 비워주는 예의를 차렸다.

이민호는 원정군 숙영지를 건설하지 않고 따로 대형 천막 한 개만 치도록 지시했다. 뒤만 빼고 세 방향이 열려 있는 회담용 천막이었다. 수군에서 보낸 전령이 달려와, 대마도 방향에서 왜군 함대가 보이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풍신수길도 저들을 포기한 건가?”

“배를 보내봤자 다 침몰할 테니까요.”

민희는 여진족 출신이라 그런지 고산국 함대와 조선 수군의 힘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전선이나 판옥선이 항상 부산 앞바다에 떠 있을 수도 없고 밤에 조선 해안에 파고드는 왜선들을 모두 막을 수도 없었다. 수군은 같은 숫자의 육군보다 훨씬 유용하나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기마 몇 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몇 사람이 말에서 내리더니 급히 천막으로 찾아왔다. 다들 흰색 상복을 입은 조선 관료들과 호위군관들이었다.

이민호는 이들을 보면서 혹시 왜군을 전멸시키거나 항복을 받을 시기를 놓친 것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별로 반갑지 않은 항복을 받아들였다.

“제독총병관 대인! 배신(陪臣) 조선국 병조판서 이 모가 인사 올립니다.”

“어서 오시오, 병판 대감. 주례를 거행할 겨를이 없으니 어서 앉으시오. 일단 차나 한 잔 하면서 숨을 돌리시오.”

“예가 아니지만 명을 받들겠습니다.”

급히 달려온 이항복이 숨을 몰아쉬는 사이 이민호가 다른 부대에 사람을 보냈다. 도원수 권율과 제독총병관 이여송이 곧 대형 천막에 도착해 이항복과 인사를 나눴다. 동지중추부사 이덕형은 제독접반사 자격으로 이여송을 따라왔다가 이항복과 눈인사를 나눴다.

“자! 최고 지휘관들이 오셨으니 병판 대감께서 말씀을 해보시오.”

“예! 대인. 저는 선대왕의 장례를 앞두고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원수인 왜적들과 잠시 휴전을 체결하라는 왕명을 받고 왔습니다.”

권율이 미리 귀띔해준 대로였다. 광해군도 명군이 조만간 울산왜성을 칠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이여송이 작전시기를 여러 번 연기하면서 더 이상 늦추지 못했다. 권율과 이여송이 섣불리 입을 열지 않자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이항복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잠시 이곳 상황을 살펴보니 제독총병관 주애공 대인과 이 제독께서 울산의 왜군을 동래로 몰아붙이고 왜병들 숫자도 제가 들었던 것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늦게 올 걸 그랬습니다.”

“아니오. 왕명을 받들었으니 병판은 최선을 다해야지요.”

이민호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상황이 참 더럽게 꼬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여기서 왜군이 도망가게 놔두지는 않겠다고 작정했다. 도원수 권율도 하필 이때 올 게 뭐냐고 사위인 이항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병조판서는 무관의 선발과 인사, 병기의 생산 관리 등 군정 전반을 담당하나 직접적인 작전권은 없고 그것은 도원수에게 있었다. 이항복은 병조판서로서 휴전회담을 주관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다만 외교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국왕의 사신으로 선발돼 왔는데 우연히 현재 직책이 병조판서였던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제가 급히 여기로 말을 타고 오다가 갑자기 탈이 났습니다. 당분간 왜군과 휴전회담을 진행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이구~ 배야!”

이항복이 땅바닥에 드러눕더니 떼굴떼굴 굴렀다. 마치 아이가 장난감 사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이었다. 권율을 비롯해 다들 어이가 없어 쳐다보고 있는데 이민호가 천막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군의 있느냐?”

“예! 전하.”

“병조판서 대감께 우환이 생기셨다. 어서 편히 쉬게 해드려라.”

“꾀병 같습니다만, 예! 전하.”

이민호가 인상을 팍 쓰자 군의가 병사들을 시켜 들것에 이항복을 싣고 천막에서 나갔다. 이민호가 권율과 이여송에게 눈길을 돌렸다.

“흐음. 급히 오느라 탈이 나신 모양이오. 그럼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왜군을 공격해볼까요?”

“흐흐! 역시나 화끈하십니다. 고산국 국왕전하를 따라 종군한 것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저처럼 운이 좋은 장수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기대가 됩니다.”

권율이 벌떡 일어섰고, 이여송은 통역을 통해 말을 알아듣고 안절부절못했다. 벽제관에 이어 왜군에게 두 번이나 혼쭐이 나고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이여송은 별로 의욕이 없었다.

“왜군에서 보낸 사절입니다.”

“하필 이때!”

기마정찰병들이 왜군 사절들을 호위해서 본진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하필 남대문 밖에서 궤변을 나불댔던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왜군 다이묘들을 대표해서 사절로 왔다.

이민호는 나베시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무슨 헛소리를 들어야 할지 몰라 벌써부터 피곤했다. 왜군이 항복할 기회를 주지 말고 왜군 진영에 쳐들어갔어야 했다.

이민호가 중앙에 놓인 의자에 다시 앉고, 양옆으로 권율과 이여송이 앉았다. 왜군 사절들은 선 채로 호위대가 총을 겨눈 가운데 회담이 시작됐다. 나베시마와 사무라이들이 먼저 인사부터 올렸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날이 갈수록 헌앙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나베시마 공 오랜만이오. 용건만 간단히 하시오. 시간이 없소.”

이민호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심한 모욕일 수 있지만 나베시마는 꾹 참았다.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해가 지면 내일 아침에 다시 뜰 것이요, 북쪽 하늘로 날아간 기러기 떼는 겨울이 되면 다시 따뜻한 남쪽 나라로 찾아올 것입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귀하께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오. 동래에 있는 모든 왜인들은 다 마찬가지요.”

“저희 다이묘들의 목을 베더라도 부하들만은 살려주십시오, 전하!”

이민호가 왜군 모두를 죽이겠다는 뜻을 밝히자 나베시마가 무릎을 꿇었다. 사절단으로 따라온 다른 사무라이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침략자들을 돌아가게 해줄 수는 없소. 모두들 이 땅에 몸을 눕혀야 할 것이오.”

“돌아가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겠습니다. 항복하겠습니다! 다만 명나라로 보내지만 말아주십시오.”

지난 2월에 행주대첩이 있었고, 그때 포로로 잡힌 왜장들을 북경으로 보냈다. 왜장들은 북경 저자거리에서 실컷 놀림감이 된 다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두 참수당해 효수되었다. 그 소문이 왜군 다이묘들에게도 퍼진 모양이었다.

“조선 국왕전하께서 그대들을 살려줄 거라 믿소?”

“야만적인 일본과 달리 조선은 예로써 다스리니 조선국 대왕께서 아량을 베풀어주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가 포로들을 북경으로 보내라고 하면 보내야 한다. 조선 국왕에게 결정권은 없었다. 그리고 이번 전투를 이끈 이민호도 포로들에 대한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대들을 구하기 위해 왜선들이 온다던데, 아직 안 온 거요?”

“태합이 배를 수천 척이나 보낸다고 큰소리쳤는데 약속한 시일이 이미 지나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전령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수길 그 놈이 우릴 버린 것 같습니다.”

막판이라 생각했는지 나베시마가 풍신수길에 대해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동래에 모인 왜군은 풍신수길에게 확실히 버림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배를 보내 구원을 해주고 싶어도 조선 수군이 가로막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이민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권율과 이여송에게 왜군의 처우에 대해 물었다. 두 사람은 당연히 왜군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난이 일어난 이후 왜적들은 무사뿐만 아니라 가장 밑바닥 병졸과 하인들까지 조선인들에게 온갖 패악을 일삼았습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한 자들을 남김없이 처형시켜야 합니다.”

“밥을 먹이고 병사를 동원해 지켜야 하는 포로보다는 깔끔하게 수급으로 만들어 운반하는 편이 낫습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그대로 대답이 나왔다. 이민호도 의견을 냈다. 지금 당장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감안해야 해서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이묘와 병사들 모두 이곳에서 처형시키는 편이 낫소. 그러나 앞으로 일본을 정벌할 계획이라면, 항복하겠다는 적은 포로로 잡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오. 포로가 된 왜적들에게 일을 시키거나 가둬두어 일본에 소문을 내고, 조만간 일본을 정벌할 때 적에게 항복을 권유하면 쉽게 항복하지 않겠소?”

“노야께서는 쉽게 원정을 다니시지만 다른 나라에게 원정이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군자금과 병력과 배가 있어야 하고 그 전에 간세를 파견해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과연 대명에서 그런 일을 추진하고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은 복건순무가 일본에서 정보를 캐는 일을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배에 타고 일본에 도착한 간첩 여러 명이 활동 중이었다. 명나라 황제는 아직까지는 확실히 일본을 정벌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적을 이간질 시키는 방법도 있소. 영주나 가문의 수장을 이곳에 잡아두고 있으면서 일본 땅에 있는 후계자에게 매년 은 몇 만 냥씩을 바치라고 하는 거요. 제대로 바치면 영지가 파탄 날 것이며, 제대로 바치지 않아 영주나 가주가 죽으면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오.”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만, 다 죽여 버리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게 편하긴 하오.”

논의를 할수록 짜증이 나서 이민호는 왜군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권율, 이여송과 함께 논의하는 중에 민희가 급히 보고했다. 보고한 자는 기마정찰병이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서 이민호를 호위하고 있던 민희였다.

“주인님! 바다에 왜선 수천 척이 몰려와요!”

“뭐야? 잠시만.”

이민호가 천막을 펼친 곳은 금정산과 윤산 사이였다. 이 위치에서도 바다가 보인다지만 좁은 각도로 제한됐다. 그러나 그 바다를 돛을 활짝 펼친 왜선들이 가득 메우고 부산포로 들어오고 있었다. 화가 치민 이민호가 나베시마에게 고함을 질렀다.

“나베시마 공! 어떻게 된 거요? 오늘 배가 들어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소?”

“으하하하! 늙어 죽느니 이렇게 장렬하게 죽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시간을 끌어 동료들이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보람을 느낍니다. 하하하!”

============================ 작품 후기 ============================

점점 늦어지네요. ㅠ.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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