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1 34. 종전 =========================================================================
사자가 돌아간 직후부터 사쓰마 군 본진에 기마전령들이 숱하게 들락거렸다. 원 안에 열십자가 들어간 사쓰마 군의 군기를 등에 멘 병사들은 대략 3천에 달했다. 적지도 않지만 많지도 않은 수였다.
사쓰마 군을 포함한 여러 부대의 고위 사무라이들 몇 명이 뭔가 교섭을 하는 것 같다가 갑자기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사무라이들이 누군가를 납치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쓰마 군이 주군을 구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여 막아섰고, 그 직후 사방에서 다른 왜군 부대들이 사쓰마 군을 향해 조총을 겨누고 창을 들이밀었다.
“전군, 정지! 싸움 구경이다!”
이민호가 명령을 내리자 전령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여러 부대로 흩어져 명령을 전했다. 이민호는 말안장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이때 괜히 접근해서 왜군의 내분을 봉합해줄 필요가 없었다.
“설마 자기편끼리 싸우겠어요? 싸워봤자 결과도 빤하잖아요. 아마도 도진의홍이 스스로 결박하고 주인님께 찾아올 거여요.”
“과연 그럴까?”
일본 전국시대 때 전쟁의 승패가 결정 나면 패한 쪽 다이묘가 패전 책임을 지고 할복하는 대신 나머지 가신, 사무라이, 병사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사무라이 못지않게 다이묘들도 언제든 할복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했다. 실제 역사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가 결정된 다음 시마즈 요시히로가 처음에는 할복하려고 했다가 조카 토요히사와 가신들의 권유로 퇴각한다.
이민호는 민희의 예상이 맞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원정군 입장에서야 왜군에 내분이 일어나 서로 싸우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를 생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요시히로를 산 채로 데려가면 지금 기함에 남아있는 미카와 시녀들이 무척 기뻐할 것이다. 여자들이 시마즈 요시히로의 살을 저미고 포를 뜰 것 같았다.
“민희 말대로 되겠는데?”
“동래까지 70리 거리를 다이묘 하나의 목숨으로 해결한다면 정말 싸게 먹히는 거죠.”
역시나 민희가 예상한 대로 해결됐다. 사쓰마 군 병사들이 흐느끼는 가운데 몇몇 무사들이 말에 올랐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항복하러 오기 직전이었다.
- 타앙!
그러나 총소리가 울리면서 예상이 깨졌다. 사쓰마 군 일부가 시마즈 요시히로의 반강제적인 투항에 반발해서 다른 부대를 향해 조총을 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부대에 있던 왜병이 조총을 발사했고, 총탄에 맞은 사무라이 하나가 말에서 떨어졌다. 이민호는 처음에는 단순한 오발이라고 생각했다.
- 타타타탕!
- 탕탕! 타탕!
그러나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두 부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를 향해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양쪽 부대에서 동시에 치솟아 오른 하얀 연기가 방금 총격이 단순한 사고나 오발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조총병들이 장전하기 위해 빠르게 손을 움직이는 사이 궁병들이 화살을 날리고, 창병들이 장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왜 저러지? 아! 다치바나 군이구나.”
사쓰마 군과 싸우는 부대는 군기가 아래 3분의 1은 검은색, 위 3분의 2는 흰색이었고 위쪽에 오토모 가문과 같은 살구 잎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민호가 땅콩을 까먹으며 왜군 부대끼리 벌이는 싸움을 구경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오토모 소린의 가신인 다카하시 쇼운의 장남이었다. 그는 오토모의 또 다른 가신 다치바나 도세쓰의 사위로 들어가 다치바나 가문을 이었다.
그런데 오토모 가문과 시마즈 가문은 오랜 세월 큐슈의 주도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다카하시 쇼운이 사쓰마 군을 막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 겨우 몇 년 전인 1586년이었다.
사쓰마 군과 다치바나 군은 평소에 원수 사이였다가 급하게 퇴각하는 중에 부대가 뒤섞이면서 거리가 가까워지자 서로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시마즈 요시히로가 스스로 포로가 되기 위해 말에 오르는 순간에도 다치바나 군에서 끝없이 야유를 했다. 당연히 사쓰마 군 병사들도 다치바나 군에게 분노가 가득 담긴 욕설을 퍼부었다.
아직 젊은 무장이면서도 대인의 풍모를 가진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부하 병사들을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다이묘의 친부가 사쓰마 군에게 죽은 것과 상관없이 다치바나 군의 아시가루들 중에서 아버지나 형제를 사쓰마 군에게 잃은 자들이 많았다. 그 와중에 조총병 하나가 복수를 위해 과도한 짓을 해버렸다.
다치바나 무네시게 휘하 병력은 1400명이었고 지원 인력 1600명까지 합해 3천 명이었다. 조선과 가까운 큐슈에 영지를 두고 있어서 조선 수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는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 중에서 기마무사는 150명에 달했고 뎃포 아시가루는 200명이었다.
두 부대의 거리가 가까워 일제 사격은 딱 한 번으로 그쳤고 싸움은 금방 백병전으로 변했다. 다치바나 군은 정예군답게 아주 잘 싸웠다. 그러나 사쓰마 군은 공성전이 아닌 야전이라면 더 잘 싸웠다.
“께에이이~ 야!”
기합 소리가 우스웠지만 이민호나 구경하던 다른 병사들은 절대 웃지 못했다. 사쓰마 군 병사들이 기성을 지르며 칼을 내리칠 때마다 다치바나 군 병사들이 내려 베기 공격을 막으려고 들어 올린 칼이나 창과 함께 상체가 두 조각났다. 아시가루들이 입는 간단한 병사 갑옷인 오카시구소쿠(御貸具足)도 함께 잘렸다.
“뭐 저런 검술이 다 있어요?”
“그러게 말이다. 그야말로 혼을 실어서 베는구나.”
시현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시기였지만 그 기반이 되는 몇 가지 유파가 사쓰마 지방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인 내려 베기에 모든 것을 걸고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검술은 일견 야만적이었으나 전장에서는 잘 통했다. 아주 잠깐 사이에 다치바나 군이 곧 몰살당할 위기로 형편없이 몰렸다.
- 타타탕!
이때 다른 부대들이 싸움에 개입했다. 큐슈 정벌을 하는 과정에서 사쓰마 군은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다른 다이묘들이 경고 사격을 하라고 했지만 사쓰마 군 병사들을 노리고 조총을 쏘는 자들이 많았다.
사쓰마 군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다치바나 군을 쳐부순 사쓰마 군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나베시마 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나베시마 군은 류조지 가문의 지배하에 있을 때부터 사쓰마 군과 오랫동안 싸워왔다. 지장으로 알려진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싸움을 피하려 했으나 대대로 원한이 쌓인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사쓰마 군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그럼 아까 말에서 떨어진 놈은 누구야?”
“모르겠어요. 죽은 것 같은데요?”
사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몹시 억울한 처지였다. 전체 왜군의 안전한 퇴각을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로 작정했는데 다른 부대 병사들에게 욕을 먹고 심지어 셋째아들인 다다무네가 다치바나 군 병사가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다다무네는 요시히로의 형인 요시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시마즈 가문 전체를 이을 예정인 중요 인물이었다.
분노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병사들을 몰아 병력이 두 배나 많은 나베시마 군을 향해 돌격시켰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싸움을 말리려 하다가 인명피해가 커지자 결국에는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베시마 군은 창의 숲으로 사쓰마 군의 돌격을 제지하면서 조총을 쏘아 꾸준히 사쓰마 군 병력을 줄여나갔다. 여기에 다른 부대도 사쓰마 군을 공격하는데 협력했다. 포위당한 채로 최후의 항전을 하던 사쓰마 군은 마지막으로 시마즈 요시히로 하나만을 남기고 전멸했다.
“으아아아아~”
시마즈 요시히로가 칼을 높이 들고 나베시마 군을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나베시마 나오시게로부터 생포하라는 명을 받은 병사들이 창대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다리를 후려쳐 쓰러뜨렸다. 사무라이들이 시마즈 요시히로를 밧줄로 묶었다.
“비열한 놈들! 나를 적에게 팔아먹는 것으로 모자라 과거의 원한 때문에 같은 편을 몰살시키다니! 사무라이라는 자들이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
시마즈 요시히로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시마즈 가문은 큐슈 통일을 목표로 하면서 그 동안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내뱉는 말에 공감하는 왜병은 아무도 없었다.
나베시마 군 사무라이들이 시마즈 요시히로를 말에 태워 데려왔다. 그 사무라이들이 시마즈 요시히로를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렸다.
“고산국 국왕전하! 원하신 대로 도진의홍을 생포해 왔습니다. 전하께서는 약속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좋다. 나는 왜군이 동래에 도착할 때까지 추격하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경상우병영이 출동하면 어떨까?”
왜군 진영으로 돌아가려던 사무라이 전령이 놀라서 턱이 빠질 정도였다. 텅 빈 줄 알았던 양산성에서 조선 기마병 4천이 갑자기 쏟아져 나와 왜군의 후미를 덮치고 있었다. 조총도 창도 미처 견제를 못하는 동안 왜군 진영이 기마병 4천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험준한 길이라는 황산잔도를 지나온 경상우병영 기마병 4천은 양산읍성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경상우병사는 이민호가 가장 싫어하는 조선 무장인 유숭인이 여전히 맡고 있었다.
“경상좌병영도 있소이다! 돌격하라!”
경상좌병사 이광악이 기마병 3천을 이끌고 원정군을 지나 왜군을 향해 돌격했다. 경상좌수사 이수일도 1천에 달하는 말 탄 수군을 이끌고 달려갔다. 다만 남병으로 구성된 명군 패잔병 3천은 고산국 원정군의 보호 아래 치료를 받고 있었다.
하룻밤의 전투로 병력이 줄어들고 내분까지 겪은 왜군은 평지에서 조선 기마병 7천 이상의 공격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왜군은 조선 기마병의 말발굽에 짓밟히면서 유일한 살 길을 따라 황급히 도주했다.
왜군은 양산성 앞을 지나 현대의 경부선이 지나는 영남대로를 타고 언덕길을 올랐다. 뒤에서 조선 기마병들이 활을 쏘며 계속해서 쫓아왔다.
왜군 창병이 급히 방진을 짜면 경상우병영 기마병들이 말을 방진으로 뛰어들게 해서 방진을 짓밟아버렸다. 조선 기마병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단체로 말을 굴리니 버틸 수 없게 된 왜군 창병들은 방진을 허물고 서둘러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말 굴리기는 경상우병영 고유의 전술로 정착되었다.
계속되는 추격전으로 인해 내송천 주변에 왜병들 시체가 쌓여 물길이 막힐 정도였다. 왜군은 추격전 과정에서 무수한 시체를 뒤로 남기며 도주했다. 조선의 기마병이 강하다지만 이렇게까지 압도적으로 밀린 경우가 없어 왜병들은 충격을 크게 받았다.
왜군은 사뱃재 고개에 오른 다음에야 조선 기마병들을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병력이 1만 5천 남짓으로 줄어든 다음이었다.
그 사이 양산성까지 내려온 이민호가 혀를 찼다. 조총병이 다수 포함된 보병 1만 5천이라면 반수 정도의 기마병을 언덕길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조선 기마병은 먼저 왜군의 퇴로를 차단했어야 했다.
조선 기마병이 사뱃재에서 물러나면서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민호는 오랜만에 유숭인과 만나 인사를 나눴다. 바로 그때 왜군 쪽에서 사자가 달려왔다.
“고산국 국왕전하! 어째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방금 너희들을 공격한 건 조선군이잖아?”
왜군 전령은 이민호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민호가 눈을 찡긋 하며 사악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예전에 남대문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당했던 억지를 이번에 되갚아준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좋았다. 혈압이 오른 왜군 전령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이이이!”
“왜? 속은 것 같아? 그럼 약속 취소하고 물러줄까? 내 입장에서는 그게 훨씬 좋아.”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왜군은 병력도 없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돌려받아도 아무런 이익이 없었다. 그러나 고산국 원정군이 공격에 나선다면 왜군은 바로 끝장이었다. 기마전령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왜군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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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갑니다.
오전에...가능한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