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80화 (229/1,000)

00280  34. 종전  =========================================================================

태화강 중류 남쪽에서 산을 타고 넘어온 왜군들이 해병들이 진을 친 곳을 공격하고 있었다. 해병들은 이미 왜군의 배후 습격을 알아차리고 있었는지 기병포를 뒤로 돌려 응전했다. 해병들이 대별로 일제 사격을 할 때마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한꺼번에 확 피어났다 사그라졌다.

닻을 내리고 정박한 전선과 판옥선에도 불화살이 날아갔다. 전선에서 함포를 발사하고 수병들이 총동원돼 총을 쏘아 왜병들의 접근을 막아냈다. 돛에 불이 붙은 판옥선에서는 격군들이 동원돼 물을 끼얹어 화재를 막았다.

승마보병 일부를 빼서 도와줄 수도 없어 지금 당장은 해병과 조선 수군이 잘 막아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곳에 정박한 전선에서 함포 사격으로 지원해줘서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수군에 속한 외륜선 10여 척에 탄 간수군들이 2천여 명에 달해서 이들의 화력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 뻐엉~

거북선 아래 갑판에서 지자총통이 불을 뿜는 것을 이곳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산탄과 비슷한 조란환을 장전해서 발사하자 거북선과 판옥선으로 몰려오던 왜병들이 우수수 한꺼번에 쓰러졌다. 왜병들은 빤히 죽을 줄 알면서도 해병들이 숙영하는 진채와 수군 정박지를 향해 용감하게 돌격했다.

이민호는 산탄이나 기관총을 개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매번 전투할 때마다 아군은 적고 적은 많으니 항상 불안했다.

“비올레타 양은 전쟁이 두렵지 않으시오?”

“당연히 무서워요. 전쟁터에 나오면 가슴이 두근두근 뛴답니다. 하지만 싸울 필요가 있을 때는 싸워서 이겨야 해요.”

비올레타는 무쇠 철판을 두드린 갑옷을 단단히 입고 머스켓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멋있었는데, 화승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 탓에 그믐달에 비친 비올레타의 얼굴이 마치 처녀귀신처럼 창백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어두운데 뭐가 보이오?”

“거의 안 보여요. 발사 화염 같은 불빛만 보여요.”

역시 유럽인들은 밤눈이 어두운 편에 속했다. 원래 황인종은 백인보다 시력이 20퍼센트 좋아 이것이 야간 시력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번 전투의 교훈이 에스파냐에도 전해질 테니 그들은 앞으로 야습을 경계하게 될 것 같았다.

“백인들은 밤에 불편하겠소.”

“어머? 고산국과 명나라 사람들은 백인이잖아요. 고산국이 이렇게 문명이 발달했으니 당연히 국왕전하부터 백성들까지 모두 백인이지요.”

“뭐요?”

이민호가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인종을 구분할 때 문명의 발달 정도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아일랜드인은 황인종이고 중국인은 백인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어느 정도 있었다.

“전하께서는 정복해도 될 약한 나라를 정복하지 않는 이유가 뭐죠? 필리핀 같은 경우에도 에스파냐 사람들만 몰아내면 쉽게 정복할 수 있잖아요?”

“에스파냐 상인들은 좋은 거래 상대요. 그리고 정복하면 남은 백성들을 다 책임져야 하지 않소? 고산국이 아직 작아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런 거니까 달리 볼 필요가 없소.”

“원주민을 다 죽이거나 몰아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군요.”

“아무리 죽여도 오지에 숨어들어가 살면서 다시 불어날 테니 죽일 이유가 없소. 원주민을 학살하면 그들도 처절하게 저항해서 오랫동안 골치 아프지 않겠소?”

이민호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체첸 등 오지에 살면서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 고향을 지키는 소수민족들을 떠올렸다. 고산국이 확장하는 중에 그런 소수민족을 만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리고 다른 민족을 백성으로 받아들이거나 협력하는 편이 여러 모로 나으므로 몰살시키거나 추방하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울산 서쪽 언덕의 전투가 계속 진행됐다. 원정군이 언덕 지형을 점령하고 나자 전투는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왜군은 원정군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언양 쪽으로 이동하기 바빴다. 그러나 이동로 후미에 후위라 일컫는 소수 매복부대를 배치해 고산국 원정군의 추격 속도를 늦췄다.

- 타앙! 타탕!

- 타타타타탕! 펑!

소리만으로도 왜군이 쓰는 조총과 원정군이 쓰는 보병총, 기병총을 구별할 수 있었다. 매복을 충분히 예견하면서 추격하고 있기에 희생자는 많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추격속도가 확연히 떨어졌다.

언양에 도착한 왜군은 진행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계속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왜군 후위부대의 매복을 무시하고 급속 전진해서 따라잡을까 말까 이민호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도련님! 매복했다가 사로잡힌 왜군 사무라이입니다.”

시커먼 말을 탄 감불이 젊은 사무라이를 옆구리에 끼고 왔다가 이민호 앞에 툭 집어던졌다. 감불이 왜군이 매복한 곳을 우회해서 공격해 잡아왔다고 한다. 민희와 민영이 사무라이에게 총을 들이대는 중에 이민호가 물었다.

“너희들 이 밤중에 도대체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거야?”

“고산국 국왕전하이십니까? 비록 포로가 됐지만 무사의 명예가 걸려있으니 군기를 누설할 수 없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단정하게 무릎을 꿇어앉은 사무라이가 대답했다. 무장은 아직 해제시키지도 않았다.

“할복하게 해줄게.”

“감사합니다, 국왕전하! 양산을 거쳐 동래로 가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퇴각할 계획입니다.”

사무라이가 갑옷을 벗고 배를 드러냈다. 그리고 작은 칼을 뽑아 배에 댔다.

“뭐? 진주성을 공격할 계획이 아니었어? 할복하기 전에 먼저 대답 좀 해! 칼 잘 쓰는 장수한테 카이샤쿠 해주라고 할게.”

이민호가 눈짓을 보내자 남자 호위가 칼을 뽑아들고 사무라이 옆에 서서 높이 치켜들었다. 만족한 사무라이가 순순히 대답했다.

겐타로가 보낸 보고서에서는 풍신수길이 조선에 주둔한 왜군 다이묘들에게 진주성 공격을 명했다고 한다. 작년에 진주성에서 크게 패배한 것에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였다. 오사카가 그 모양이 됐어도 자존심 하나만큼은 여전히 강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풍신수길은 일본을 그토록 괴롭힌 고산국에 대한 보복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는지 보복을 포기하고 그 대신 협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금과 은을 합해 백만 냥을 바치느니, 천황의 여동생을 시집보내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지만 물론 이민호가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태합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라는 미친 명령을 내렸으나 영주님들이 회의를 해서 조선에서 퇴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선 수군에 의해 뱃길이 막혀 있는데?”

“조선에 남아있으면 어차피 죽을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는 중에 절반 이상이 죽을 각오로 배를 타기로 결심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래의 부산포를 향해 수천 척의 배가 몰려들고 있을 것입니다.”

“좋다. 할복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포로 대우를 받을 것이나, 다만 명나라에 가서 수모를 좀 당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어떠냐? 할복하겠느냐, 항복하겠느냐?”

“감사합니다, 국왕전하! 항복하겠습니다.”

사무라이가 이마를 땅에 대고 이민호에게 절을 올렸다. 사무라이가 갑옷을 다시 입고 칼 두 개는 호위에게 맡겼다.

할복이 무사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이라 하나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일본 사무라이들은 고산국 군대가 강한 것을 인정해서 패하거나 포로가 된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다시 추격하는데 왜군 쪽에서 사자를 보내왔다. 시간을 벌여보겠다는 수작이 빤했지만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기로 했다. 조선말을 아는 사자가 이민호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다음 일본 다이묘들의 말을 전했다.

“고산국 국왕전하! 저희들은 한성에서 물러난 이후 그저 울산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주변 민가에 폐도 끼치지 않고 조용히 지냈습니다. 풍세를 기다렸다가 순풍을 받으면 어련히 일본으로 돌아갈 것인데 어찌하여 저희들을 핍박하십니까?”

“침략자니까.”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으나 간단히 대꾸했다.

“저희들은 힘없는 무사들로서 그저 태합이 가진 힘이 무서워 조선에 끌려와서 싸웠을 뿐입니다. 일본에서 배가 올 수 있도록 조선 수군이 막지 말도록 명을 내려주시고, 가을에 순풍이 불면 평화롭게 일본에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여러 가지로 어이가 없다. 그런데 태합은 무섭고 나는 안 무섭지?”

“솔직히 말씀드려 지금은 고산국 국왕전하가 더 무섭습니다.”

마치 갓 전입해온 신병에게 어느 쪽 선임의 인상이 더 더럽게 생겼냐고 묻는 것 같았다. 일본 다이묘들은 만약 이런 상황이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차라리 일본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편이 생존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이민호가 조선군과 명군을 밑에 두고 지휘하는 것으로 왜군에게 잘못 알려져 있었다. 직위가 높고 실제 군사력이 강하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다.

“그쪽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아직 살아있나?”

“있습니다. 병력도 적게 동원한 주제에 괜히 큰소리만 치는 큐슈 시골구석의 영주입니다.”

이민호는 사실을 뒤섞고 꼬아서 장난을 쳐보기로 했다. 실패해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고산국 함대가 사쓰마를 여러 번 공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겠지?”

“예. 고산국에서 조선으로 가는 뱃길 주변에 영지가 있어서 공격을 자주 받은 것으로 압니다. 국왕전하께서 사쓰마에 원한이 있어서 집요하게 공격한다는 소문도 떠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사쓰마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만 나는 시마즈 가문과 원한을 진 사람이다. 그러니 시마즈 가문의 가주인 요시히로를 내게 넘기면 너희들이 부산까지 퇴각하는 동안 추격하지 않으마.”

“국왕전하의 분부는 동료를 배신하라는 뜻입니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만큼 다급하니 영주님들께 여쭤보겠습니다.”

사자가 말을 타고 돌아갔다. 함께 따라온 왜군 기마무사들은 용궁에 갔다 온 기분으로 자꾸 뒤돌아보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민호는 전군에 다시 전진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울산에 전령을 보내 함대와 해병, 유구국 왕자, 조선 수군을 지휘하는 부친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부산포 북쪽 기장으로 이동하라고 했다.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와 천지를 대충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길 주변에 매복한 왜군의 후위는 제대로 공격 한 번 못해보고 기마병에게 먼저 발견돼 박살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민호는 기마병을 선봉에 앞세우고, 승마보병을 이끌고 천천히 남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왜군의 본진이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조금만 더 넓은 지역에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추격할 계획을 세우고 아직은 몰이사냥을 하듯이 여유를 갖고 추격했다.

계속 남진하는 중에 조선군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추격전에 합류해도 되는지 물었다. 병력이 합류하기 전에 먼저 공장을 바친 장수는 경상좌수사 이수일이었다. 잠시 후 수사가 직접 인사하러 왔다.

“제독총병관 대인! 소장은 경상좌수사 이 모입니다. 경상좌수군도 추격전에 합류해도 되겠습니까?”

“상관은 없으나 수군에 말이 없지 않소?”

“전마는 아니더라도 승마용 말은 많습니다.”

“그럼 따라오시오.”

경상좌수군은 임진왜란 직전에 해안 성곽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고, 부산포진 성과 다대포진 성을 지키던 수군들은 끝까지 싸우다 전멸했다. 동래성 전투에서도 경상좌병영 군사들과 함께 지상전에 투입됐으나 동래성이 함락되기 전에 물러났고, 그 직후 수사 박홍이 근왕한다는 핑계로 한성으로 떠나버렸다.

이후 경상좌수군에 병력과 배가 없어 한동안 유명무실해졌으나 이수일이 경상좌수사로 내려가면서 급속히 수군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판옥선이 부족해 주로 지상전에 참가했다.

왜군이 양산에 도착하기 전에 경상좌병영 병력도 합류했다. 진주성에서 잘 싸웠던 곤양군수 이광악이 권응수에 이어 경상좌병사로 영전해 대구에 주둔하고 있다가 이번에 급히 출병했다.

기마병 3천이 따라붙었고, 그 외에 경상좌도의 의병 5천이 뒤를 따랐다. 추격군이 시간이 갈수록 군세가 늘어나니 왜군 쪽에서도 바짝 긴장했다.

“후후! 드디어 내분이 일어났구나.”

이민호가 비열한 악당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해가 동산 위에 떠오르고 왜군이 양산 외곽에 도착한 직후에 왜군 부대들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늦었어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