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7 34. 종전 =========================================================================
명군은 울산왜성을 공격하기 위해 다양한 화약무기를 동원했다. 불랑기포와 멸로포, 호준포 등 여러 가지 화포가 불을 뿜었고 화염방사기 같은 이화창, 신기전과 비슷한 화전, 대형 신기전을 넘어 마치 창을 쏘아 날리는 것 같은 주화창 등이 대량으로 사용됐다. 명나라는 조선이나 일본과 달리 화약을 대량 생산하고 있었으므로 왜성을 향해 각종 화약무기를 퍼부을 수 있었다.
- 두두두두~
왜성 동쪽의 넓은 벌판에서 명군 기마병 수천 기가 달리자 땅이 울렸다. 왜군도 목책을 열고 기마무사 집단을 내보내 대응했다.
그러나 왜군 기마무사 1천 기는 단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목책을 향해 정신없이 도주했다. 그러나 기마무사 절반 이상이 명군 기마병들에게 따라잡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명군만으로도 기마병으로서 충분히 우수하지만 그들 사이에 귀화한 여진인들이 많이 끼어있어 왜군 기마무사들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다.
“아깝다!”
싸움을 구경하던 이민호가 몹시 아쉬워했다. 왜군 기마무사들이 착용한 비싼 갑옷이 말발굽에 짓밟히면 상품가치가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군 중에서 기마병 비율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행주대첩 당시 행주산성을 초반에 공격한 것은 1만 기의 기마병이었는데 지금은 천여 기로 줄어들었다. 사실 왜군 기마무사들은 숫자가 많더라도 기마전투에서 제대로 승리를 거둔 적이 별로 없었다.
도주하는 기마무사들을 구하기 위해 왜군 진영에서 황급히 보병 방진 몇 개를 내보냈다. 그러나 방진이 미처 갖춰지기 전에 명나라 기마병들이 돌진해 왜병들을 칼로 마구 내려찍으며 조총병과 궁병 대열을 휩쓸었다.
왜군 장창병들만 홀로 남아 수천 기마병들에게 포위됐다.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장창을 내민 보병방진에 명나라 기마병들은 섣불리 돌진하지 못했다. 가끔 용감하게 돌격한 명나라 기마병들이 장창에 꿰여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민호는 이때 경상우병영 기마병들을 떠올렸다.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생각날 때마다 이민호는 몹시 화가 났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말을 방진으로 굴리는 것도 괜찮은 전술인 것 같았다. 명나라 기마병이 제대로 공략을 못하는 가운데 왜군 장창병들이 진형을 유지한 채 서서히 목책 쪽으로 퇴각했다.
“와아~”
함성이 울리자 이민호가 시선을 돌렸다. 아군 진영에 야포를 설치하는 중에 전황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왜성 뒤쪽 야산에서 명군이 목책 진지 일부를 돌파하고 있었다. 명군 기마병 일부가 동쪽에서 시선을 끄는 사이 주력은 북쪽 야산 공격에 투입했다. 그런데 그 주력이 보병이 아니라 기마병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명나라 기마병들이 왜군들을 몰아내고 언덕 정상에 올라왔다. 이제 기마병이 좀 더 모이면 언덕 아래로 쏟아져 내려오면서 왜병들을 짓밟을 일만 남았다. 이민호는 왜군이 오늘 전멸하는 건가 생각했다.
그러나 왜군도 필사적이었다. 예비부대가 투입돼 조총을 쏘고 창으로 찌르면서 명군 기마병을 몰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명군에서 꾸준히 병력을 보내 야산 정상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왜성의 건축 특성상 산노마루에 해당하는 그 야산이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 뻐벙! 펑!
판옥선들이 태화강 중류와 하류의 경계까지 올라와 왜성을 향해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화포 사거리 아슬아슬한 곳이라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이민호도 울산왜성 뒤쪽 평지에 세운 왜군 진채를 목표로 포병대에게 야포 사격을 하도록 지시했다.
현재 승마보병 5천 명이 태화강 남쪽 강변에 늘어서 있고 해병과 기마병들은 배후를 지키고 있었다. 왜성이 보병총 사거리가 넘어간 곳에 있어서 총격을 할 수는 없지만 만약 왜병들이 태화강을 넘어올 시도를 한다면 결과는 빤했다. 태화강 중류가 낮더라도 강폭이 200미터가 넘고 강변에서는 숨을 곳이 없었다. 왜군이 이쪽으로 몰려올 이유가 없었다.
“도련님! 북병이 의외로 잘 싸웁니다. 그런데 왜 남병은 가만히 있는 겁니까?”
강 건너 불구경하듯 전투를 구경하던 계복이 이민호에게 물었다. 요동과 만리장성에 주둔하는 기마병인 북병만 전투에 참가하고 절강성 이하 지역에서 왜구를 상대하던 보병인 남병은 진형만 갖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은 기마병만으로 빠르게 진격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보병이 도와주지 않아 효율이 떨어졌다. 야산을 보병이 아닌 기마병이 점령하는 것도 좀 웃겼다.
“이여송이나 북병 장수들 입장에서는 전투의 승패보다는 남병이 전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예? 그게 말이 됩니까?”
“평양성에서도 저러다가 혼쭐났었는데 아직도 버릇을 못 고쳤어. 명군의 고질이야.”
이질적인 조직들이 경쟁하는 것은 명나라뿐만 아니라 조선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많은 사례 중에서도 특히 남병과 북병의 경쟁의식은 지나쳤고, 뿌리가 깊었다.
외부의 적을 물리치기보다는 뇌물과 인간관계 등 부당한 수단까지 총동원해 내부의 경쟁자를 거꾸러뜨리는 일에 더 골몰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내부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다음 외부의 적을 물리쳐주면 좋겠지만, 보통 내부 경쟁에 능력이 특화된 자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대표적으로 원균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이여송의 경우 지휘 능력은 출중한 편이지만 남병과의 경쟁관계 때문에 이성을 잃었다고 볼 수 있었다.
조총 사격에 의해 인명피해가 누적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마병이 퇴각했다. 그 직후 명나라 보병이 왜성을 향해 진군했다. 기마병과 같이 진군했거나, 보병이 진입하는 사이 최소한 야산에서 기마병이 조금이라도 버텨줬다면 전황이 확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명군 지휘부는 그런 당연한 전술을 쓰지 않았다. 이여송 밑에서 남병은 항상 이렇게 버리는 말이나 총알받이로 투입됐다.
지금은 명군 기마병이 물러난 야산 높은 곳에 왜병들이 올라가 산 아래에서 진군해오는 남병들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군기가 엄정하기로 유명한 남병들이 묵묵히 전진하는 도중 무의미하게 죽어갔다. 그러나 동료들이 무수히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남병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왜군이 6만, 남병이 2만이면 결과는 나왔네요.”
이민호 뒤에서 중국어를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상아 공주와 왕명명은 고산국 궁궐에 있으므로 목소리의 주인공은 비올레타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번쩍거리는 에스파냐 갑옷을 입은 비올레타가 말에 타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세상 구경하러 나왔다고 했으나 사실은 동아시아 5개국이 개입된 전쟁을 지켜보라고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보낸 관전무관이나 다름없었다. 총독이 정식으로 요청했으면 이민호가 승인해줬을 텐데 아직 관전무관은 간첩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왜군이 명군을 추격하면 그때 강을 건너겠다. 기함에 연락해서 단정을 주교로 쓸 준비를 갖추도록 해!”
“예! 도련님!”
기마호위가 기함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남병이 잘 버티고 있었으나 불리한 지역에서 왜군에게 세 방향에서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저 상태로는 오래 못 버틴다. 남병이 무너질 경우 고산국 원정군이 태화강을 건너갈 필요가 있었다.
척계광 이래 화약무기와 원앙진, 엄정한 군기로서 남쪽의 왜구를 물리친 군대가 남병이었다. 그러나 남병이 아무리 잘 싸운다 해도 병력은 왜군이 세 배나 되었다. 그리고 왜성과 산성에 오른 왜군 조총병들이 아래를 향해 총탄을 퍼붓고 있었다.
잠시 후 남병이 퇴각했으나 다행히 왜군이 추격하지는 않았다. 왜군이 일부 무너진 목책을 보강하느라 전장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명군 지휘부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민호가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이여송이 가정들을 호위로 데려와서 남병 지휘관들을 결박해 곤장을 치려 하고 있었다. 패전 책임을 남병 지휘관들에게 지워 참수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어떻게 보면 관대한 처분이었다.
“역시 유격 왕필적이 고생하는군.”
이민호가 망원경을 눈에서 떼었다. 남병과 북병 사이는 예전부터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최고 지휘관이 북병의 대표적인 장수인 제독 이여송인 관계로 인해 남병이 지휘부를 불신하고 있었다.
평양성 전투를 앞두고 이여송은 성에 먼저 오른 병사에게 은 300냥 또는 도지휘첨사 벼슬을 상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남병들이 미처 식사를 하기 전에 전투를 개시하는 바람에 허기진 상태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평양성 성벽에 일찍 오른 병사들이 많았는데도 이여송이 포상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이 소수 기병만 몰고 갔다가 패퇴하고 이후 소극적인 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남병들에게 불만이 팽배했었다.
명군이 개성으로 진격했을 때 왕필적은 이여송이 지혜롭지 않고 신의가 없으며 어질지 않아 용병을 제대로 못한다고 장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비난했었다. 이여송은 즉시 은을 풀어 남병들에게 나눠줬으나 이미 신뢰를 잃은 다음이었다.
“어? 도련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창칼을 맞댈 정도는 아닌데 뭐.”
참다못한 남병들이 들고 일어나 무기로 이여송과 가정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남병 지휘관들이 말려도 그 동안 북병에게 핍박받았던 남병 병사들이 듣지 않았다.
잘못하면 적전분열하게 생겼다. 경략 송응창이 직접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남병과 북병의 갈등을 조정해줄 사람이 없었다.
“도련님! 저들은 북병이나 남병이나 명나라에서 알아주는 최정예 병력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 모양이라니 어이가 없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아주 만만해 보입니다.”
“그래서?”
“아니 뭐, 꼭 명나라를 도모해보라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잊어버리세요.”
계복이 얼른 얼버무렸다. 명나라 군대는 오래 전부터 징집체계와 보급체계가 엉망인데 만약 지휘체계까지 저 모양이면 정말 미래가 없었다. 이 당시 사병인 가정을 휘하에 많이 두었다는 이유로 총병관에 임명된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비올레타 양!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소?”
관전무관이 남의 전투를 편하게 구경했다면 지휘관에게 조언을 해줄 의무도 있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까지 온 비올레타는 군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유럽에서 이런 식으로 전투가 일단락됐다면 다음 날 새벽에 방어군이 전면적인 반격에 나설 거여요.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같은 날 야간에 기습공격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유럽에서는 야습을 잘 안 하지요?”
“예. 만약 유럽에서 야습을 하면 신사적이지 못한 행위로 비난받아요. 사람도 말도 밤에 쉬어가면서 싸워야 최선을 다할 수 있으니까요.”
“흠. 유럽인들이 밤눈이 어두워서 야습을 잘 안 하는 것 같소.”
“아니에요!”
이민호는 비올레타가 발끈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괜히 한 번 놀려봤다. 역시나 비올레타가 걸려들었고, 에스파냐 군이 용감하고 테르시오는 이 시대 최고의 방진이라는 등 자랑하기 바빴다. 이민호는 낄낄 웃으면서 맞다고 해줬다.
“도련님! 20리 서쪽에 말을 타고 건너갈 정도로 얕은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잘 됐군. 전령!”
감동이 태화강 상류까지 정찰한 다음 보고하자 이민호가 즉시 기마호위를 불렀다. 그리고 단정에 도하 설비를 싣지 말고 포병과 기병포를 실으라고 지시했다. 포병들이 이곳 진채에 배치된 기병포를 분해해 함대 쪽으로 수송했다.
왜군 지휘부는 판옥선이나 고산국 전선들이 얕은 태화강 중류에 못 들어온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탐망선과 단정은 가벼워서 충분히 강 중류에 올라갈 수 있었다.
오후 늦게 탐망선 네 척과 단정 10여 척이 태화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강 중류에 늘어선 배에서 왜성과 그 북쪽 야산 사이에 배치된 왜군 진채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판옥선이나 전선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에 배치된 왜군의 진채가 날벼락을 맞았다. 기병포 10여 문으로 포격을 퍼붓자 왜병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무너진 왜성의 잔해가 쌓인 바위산 뒤로 숨었다.
탐망선과 단정에 실은 포탄을 다 쓰고 나서 작은 배들이 강 하구로 되돌아갔다. 포격만으로 왜군을 전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곳에 강력한 위협이 있다는 사실만은 충분히 알린 셈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