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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75화 (224/1,000)

00275  34. 종전  =========================================================================

“남들은 소승을 그렇게 부르더군요. 만국의 도성은 개미굴이요, 일천여 호걸은 날파리 같네. 창에 비친 밝은 달 아래 청허하게 누우니, 끝없이 부는 소나무 바람 운치가 별다르다. 소승은 인세에 지옥이 펼쳐질 것을 예상해 승병을 일으켰답니다. 허나 전하 덕택에 불제자들이 살생을 하지 않게 되어 무척 다행으로 여기며, 전하께 감사드립니다.”

이민호가 알던 것보다 임진왜란에서 승병의 활약이 적었다 했더니, 서산대사가 알고 승병들이 전투에 나서지 못하게 막은 탓이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여러 곳에서 승병부대가 활동하며 왜군의 진격로 주변 마을을 지킴으로써 왜군들이 살육을 못하게 막은 사실은 이민호가 알지 못했다.

승병들은 죄 없는 백성들을 왜군의 살육에서 구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살계를 범했다 해도 파계했다고 스스로 판단해서 전쟁이 끝난 다음 환속했다. 조정이나 승병 지휘부 큰스님이 말려도 승병 개개인이 알아서 환속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병이 왜병을 창으로 찌르는 순간 왜병의 생물학적 생명과 승병의 사회적 또는 종교적 생명까지 합해서 두 사람이 죽게 된다.

스님들은 일반적인 의병들보다 더 큰 희생을 각오하고 승병으로 나선 셈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많은 스님들이 승병으로 나서서 싸우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환속하게 됐으나, 이민호 덕택에 환속하는 스님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꼬마를 받아들여서 나한테 좋은 게 뭐가 있겠소? 내게는 이미 좋은 여자가 충분히 많다오.”

능력을 떠나서 혜영과 주상아 공주, 민희와 민영, 미카와 파티마 정도면 더 이상 여자를 늘릴 이유가 없었다. 다른 여자들도 이민호가 좋으니까 안지, 싫은데도 안고 싶지 않았다. 조금 짜증나던 주상아 공주의 시녀들도 신분이 안정된 지금은 아주 훌륭한 여자들이 되었다.

“그 시주가 고산국으로 시집갈 경우 전하께서 최소한 손해는 안 보실 것입니다. 제가 드릴 건 없고, 천기를 조금 읽을 수 있으니 앞으로 있을 일을 말씀 드리지요.”

“무엇이든 물어봐도 되겠소? 어흠! 그게, 아직 후사가 없어서 다들 걱정이 많다오.”

“전하께서 밤에 후궁들을 좀 더 기쁘게 해드리면 조만간 좋은 소식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너무 일반론 같지만 그 동안 걱정했던 것이 사라져서 안심이 되었다. 앞으로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급히 서산대사에게 물어봤다.

“스님! 그 꼬마 아가씨가 왕비만 되면 되지요? 그러니까 반드시 제가 데리고 살 필요는 없지요?”

“후후! 물론입니다. 하지만 조선에서라면 몰라도 고산국에서는 왕비나 황후로 책봉해도 충분히 훌륭한 분이 되실 텐데요.”

서산대사가 묘하게 입술을 비틀어서 마치 장난꾸러기 노인 같았다. 이민호는 바로 이것이 정답이다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주상아 공주가 낳은 자식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황제의 요구를 고산국을 포기할 각오까지 하면서 거절했는데, 서산대사의 요구를 억지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이민호는 그 꼬마가 싫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폭탄을 떠맡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이민호는 몹시 기뻤다. 이민호는 말이 통하는 평범하고 합리적인 보통 사람들하고만 살고 싶었다. 개성이 아니라 소통이 문제였다. 만약 임해군 같은 사람과 가까이 살게 된다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약속대로 그 꼬마 아가씨는 왕비를 시켜주기로 하지요. 그러나 남편이 누구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어느 나라 왕비가 될지 아직 알 수 없소이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조선에서만 문제가 되니 걱정 마십시오.”

작다 하더라도 해중국을 떼어 주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렇다고 여송인 상왕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면 거절하거나 이민호에게 원한을 품을 것 같았다.

이민호는 얼마든지 서류상의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적당히 섬 하나 떼어 왕국의 왕비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꼬마한테 심한 것 같았지만 인목대비라는 정체를 알고 나니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국상 기간이라서 혼사 문제가 제대로 진행될 리도 없었다. 이민호는 잘 됐다 싶어서 나중으로 미뤘다. 그러나 잊지 않고 다른 나라 왕비로 시집보내기로 했다. 고산국왕이 소개해주는 여자라면 좋다고 왕비로 삼을 라자나 술탄이 많을 것 같았다. 백성들을 데리고 집단 이주한 술루술탄국 술탄도 후보로 떠올랐다.

“하나 더 스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소이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맞는 것입니까?”

“하늘의 뜻을 미욱한 땡초인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시주께서, 아니 국왕전하께서는 마음이 올곧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따뜻한 분이시니 믿는 대로 자신 있게 행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무거운 책임 때문에 힘겨워하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좀 더 국왕전하 본인만을 위한 시간을 내어 여유를 즐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충고해주셔서 고맙소이다.”

“고산국 곳곳에 절을 지어주시고 승려와 신도들을 보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든 종교를 똑같이 대우해주시는 분은 국왕전하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소승은 물러나겠습니다.”

이민호가 일어나서 서산대사에게 합장으로 인사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산대사는 어느새 사라졌고, 저택 쪽에서 민희와 민영이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둘은 쟁반에 받친 얼음물을 흘리지도 않고 잘만 달려왔다.

“빙수 좀 가져오는데 왜 이리 늦었어? 손님이 벌써 가셨잖아.”

“예? 마침 빙고에서 가져온 얼음이 있어서 금방 가져 왔는데요? 시계를 보세요. 시간은 별로 안 걸렸어요.”

“그런가?”

이민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시간을 잰 것도 아니면서 괜히 왼쪽 가슴주머니에 넣어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스님과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대화한 것이 맞았다. 그러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민호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스님이 뭐라 말씀하셨어요, 주인님?”

“응. 별로 중요한 내용은 없고, 좀 더 인생을 즐기래.”

“어머머! 훌륭하신 스님이셨군요.”

서산대사는 이민호에게 여유를 즐기라, 즉 쉬라고 했지만 이민호는 조금 다르게 놀라는 식으로 받아들였고, 더 이상한 쪽으로 받아들인 민희가 반색을 했다. 민영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민희가 귓속말을 해서 알려주자 표정이 활짝 피어났다.

요즘은 고산국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안아주는데도 둘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모양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두 번도 힘겨워 하더니 요즘은 침대에서 힘이 넘쳤다.

일단은 법력이 높은 스님인 서산대사가 권한 대로 인생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그래서 남자 호위에게 바둑을 배웠다. 몇 판 두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아주 잘 흘러갔다.

그러나 민희와 민영은 물론 그 순종적인 미카까지 별로 안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해 금방 관뒀다. 호위에게 자꾸 져서 흥미가 떨어진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여송에게서 다시 서신이 왔다. 5월 말에 울산왜성을 공격할 테니 구경하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정확히는 명군이 성을 공격하는 중에 고산국 원정군은 태화강과 그 건너편을 차단해서 왜적의 도주나 지원을 막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여름철에 태화강을 맨 몸으로 건널 수 없으니 그게 그거였다.

광해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한성을 떠나려 했는데 광해군이 잠시 붙들었다. 그리고 저번에 만났을 때는 경황이 없어 실수했다고 먼저 정중히 사과를 해왔다. 조선에서 홀대를 받아도 그러려니 했던 이민호 입장에서는 전혀 뜻밖이었다.

“금광이나 은광에 대해 잘 몰랐는데 알아보니 조정에서 고산국에 진 채무 대신에 선왕께서 넘기신 것이더군요. 광산 네 곳은 당연히 고산국의 재산입니다.”

이민호는 광해군이 뭔가 보따리를 더 풀 것으로 기대했다. 김개똥이라는 상궁이 현실 파악을 잘한다더니 이럴 때도 광해군의 참모로서 큰 힘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동안 고산국이 수차례 원정군을 보내주셨음에도 이에 대한 보상을 전혀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명군이야 천조국에서 보냈으니 황제폐하께 계속 충성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고산국은 형제의 나라이니 조금 다르지요. 다만 전쟁 중이라 재화로 갚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조선에서는 최근 태평성대를 몇 대나 보내면서 인구가 크게 불어났습니다. 전쟁 중에도 고산국 원정군 덕택에 백성들이 그리 많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고산국으로 조선 백성들이 이민하는 것을 좀 더 편하게 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고맙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광해군은 고산국에 이민 가는 자격을 지금까지는 농토가 없는 유랑민과 소작농 위주로 제한했다가 이번에 그 제한을 확 풀어주기로 했다. 물론 이 시대에도 영토와 국민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지만 인구 증가로 인한 압력을 양반과 지주들이 더 심각하게 느끼던 시기였다. 아무리 토벌을 해도 화적들이 끊임없이 준동하는 것도 심상찮았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임진왜란 시기에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가 급감해야 하나 이민호가 쌀을 퍼붓는 바람에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선에서 인구를 어느 정도 방출할 여력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사회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시기였다.

인구 부족은 이민호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던 문제였다. 새삼 김개똥의 능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정치적 반대세력의 음해가 아니라도 분명히 문제가 있는 여자였지만 능력만큼은 혜영에게 뒤지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조정 대신들과 협의하셨습니까? 반발이 심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 비변사에 어지를 내려서 신료들에게 두루두루 물어보았습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광해군의 약속이 공수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조선에서는 국왕이 아무리 권력이 강하다 해도 신료들이 집요하게 반대하면 두 손 들 수밖에 없는 정치체제였다.

“조선 백성들도 거친 함경도에 사민 당하는 것보다는 고산국으로 가는 것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삼남의 농민들을 함경도로 사민 보내는 문제를 공론에 붙여서 백성들에게 긴장감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오! 그렇게까지 해주시면 이민하는 자들이 많이 늘어날 것 같습니다.”

광해군이 팍팍 밀어주니 그 동안 힘겹게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던 이민호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리고 말입니다. 고산국에서 땅을 공짜로 나눠준다 해도 세금과 소작료를 포함해서 7할 5푼이나 뗀다고 하면 농민들이 싫어합니다. 고산국 땅이 충분히 넓어서 조선에서보다 생활이 낫다고 하더라도 소출의 4분의 3을 나라와 땅 주인에게 빼앗기기 싫다는 이유로 이민을 꺼리더군요.”

“하지만 실제로는......”

고산국 농민이 직접 경작하는 땅의 세율은 5할이었고, 다른 직업을 가진 자의 경지에서 산출되는 소출에도 똑같이 5할을 세금으로 받았다. 농민이 세율을 7할 5푼으로 느끼는 것은 다른 직업을 가진 자의 농지를 소작했을 경우 세금을 제외하고 반으로 나눈 양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체 세율로 둔갑해 버렸다. 이민호는 억울했으나 고산국과 관련해 조선에 퍼진 소문은 그런 식이었다.

고산국은 조선과 달리 부역과 공납도 없고 심지어 군역도 없었다. 이 모든 백성의 부담을 쌀로 환산한다면 고산국보다 훨씬 높은 비율을 국가에 바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조선의 토지 세금인 전세는 1할도 되지 않았다. 조삼모사에 불과했지만 농민들이 세금 문제에서는 조선이 훨씬 낫다고 느낄 수 있었다. 1할과 7할 5푼은 비교할 수 없는 장벽이었고, 이 시대 백성의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실제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지요.”

“끄응! 맞습니다.”

이민호가 광해군에게 많이 배웠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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