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74화 (223/1,000)

00274  34. 종전  =========================================================================

“대행 대왕의 묘호(廟號)를 선종(宣宗)으로 결정하셨다고요?”

승하 직후에 지어진 묘호가 이민호가 익히 알던 선조가 아닌 선종이라서 조금 의아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전임 국왕인 선왕이 아직 시호가 정해지지 않은 시기의 칭호였다. 선왕의 시호는 새 국왕의 책봉사가 명나라에 가는 길에 함께 받아오는 것이 이 당시 관례였다.

“그렇습니다. 창졸간에 이런 큰 일이 생겨 경황 중에 제대로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행 대왕께서 백성들에게 많이 베푸시고 선정을 펼치셨으니 묘호를 정말 잘 지으셨습니다. 다만 대행 대왕께서는 조선의 인재를 모아 문물을 창달하셨고 왜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큰 공렬을 세우셨으니 묘호로서 종보다는 조가 낫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빈청의 대신들이 예조를 통해 아뢰길 선양을 받은 세조 대왕과 달리 대행 대왕께서는 대를 이어 수성하셨으므로 조가 아닌 종으로 일컫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핏줄이 달라져야 묘호에 종(宗)이 아닌 조(祖)가 붙는다는 뜻이었다. 이민호가 아는 선조 임금은 명종의 양자로 입적했으므로 신하들이 선조가 아닌 선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묘호에 조가 들어가는 왕은 아직 태조와 세조밖에 없었고, 전임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연산군은 임금 자리에서 쫓겨났으므로 후임자인 중종은 성종의 아들 자격으로 왕위를 이은 것으로 간주돼 종을 묘호로 받았다.

그러나 1616년에 선종은 선조로 묘호가 개칭됐다. 후대로 가면서 핏줄이 연속 이어지더라도 큰 공을 세운 국왕에게는 종 대신 조가 묘호로 선택되는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선왕의 공과에 대한 판단은 백성이나 역사가 아닌 당대 관료들이 했다.

“앞으로 고산국과 좋은 관계가 유지되길 바랍니다. 조선국은 고산국의 뿌리이니 혹시라도 고산국의 힘이 필요하실 경우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당연합니다. 두 나라 모두 독립을 공고히 하면서도 서로 우애를 잃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광해군은 왜적들로 인해 전화에 휩싸인 나라를 복구하기 위해 자금이 많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고산국에 위임했던 홍삼 판매권을 절반으로 줄이자고 제안했다. 앞으로 홍삼 절반 물량을 조선에서 직접 명나라와 교역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민호는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양자강을 기준으로 강남과 강북으로 판매권을 나누자고 제안했고, 광해군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아무래도 내수사 전수나 김개똥이라는 상궁이 광해군에게 귀띔한 것 같아 이민호는 속이 많이 상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선조 임금이 넘겨준 금광이나 은광에 대해서는 고산국의 권리를 인정해줬다. 당연한 건데 광해군은 마치 인심이라도 쓰는 듯이 말해서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나머지 군사, 무역, 이민 등의 문제를 간단히 협의하고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실무자들이 협의하도록 넘겼다.

국상 중이라 모든 것이 어지럽고 행궁이 비좁아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아직도 전쟁 중이라 제대로 상을 치를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이민호는 비단과 금, 은, 백미 등으로 부의를 충분히 해서 형제국 국왕으로서 후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광해군이나 조선 조정의 대신들은 이를 당연히 받아들였다. 마치 못 사는 형의 살림을 도와주고도 고맙다는 소리도 못 듣는 동생 입장이 된 기분이었다.

유구국 조문사절도 임무를 잘 수행했다. 특히 쇼호 왕세자는 조선 조정 대신들과 연줄을 만들고 국상 중에도 무역을 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고산국과 입장이 다른 유구국 왕자로서 잘하고 있다고 이민호도 인정해줬다.

광해군을 만나 조금 안심하고 조금 불쾌해진 이민호가 정릉동 행궁에서 나왔다. 이민호가 병사들을 이끌고 지나면서 왜군이 반 년 동안 점령했던 한성 시가지를 찬찬히 살폈다.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절반쯤 불타고 무너진 시가지 건물 잔해를 백성들이 치우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호객행위를 하며 물건을 팔았다. 한성 백성들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큰 불행을 당했어도 슬퍼 주저앉지 말고 엄숙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라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서소문에 며칠 머무르다가 이여송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요동에서 보내기로 한 화기가 도착하지 않아 울산왜성에 대한 공격을 며칠 미룬다는 소식이었다. 이민호는 이럴 줄 알았다.

비밀 작전이라는 것도 웃겼다. 조선군도 모르게 실시하는 기습작전이라고 하는데 5만에 달하는 대군이 대구와 경주 등에 모여들고 있으니 조선 조정에서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당연히 왜군도 알고 단단히 대비하는 중이었다.

“고산국왕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오! 김 씨 아가씨 아니시오? 여기 앉으시오.”

동네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 동네에 살면서 안면을 익힌 꼬마 아가씨가 이민호에게 인사했다. 이민호는 옆자리를 내주며 돌 위에 비단 수건을 깔아주었다.

“전하께서 승승장구하심을 경하 드려요. 역시 이렇게 되실 줄 소녀는 미리 알고 있었어요.”

“고맙소. 그 동안 잘 지냈소? 집안에 별 탈 없는 것 같아 다행이오.”

꼬마 아가씨가 네 살 때 이민호가 처음 본 것 같은데 어느새 열 살 정도로 컸다. 그 어린 나이에 권력지향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서 이민호가 몹시 놀랐던 기억이 났다.

머리가 보통 꼬마가 아니었으나, 만약 성인이라면 이민호가 몹시 싫어할 만한 유형이었다. 그래도 아직 어려서 이민호는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저희 아버지께서 의병장이 되셔서 평양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셨어요. 그 과정에서 병졸들이 많이 죽었지만 천한 백성으로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은 분수 넘치는 영광이지 않겠어요?”

“그런가요? 훌륭하시오.”

“아버님 함자가 김 제자 남자라고 하는데 다들 알아줄 정도로 유명해요. 조만간 문과에 합격하시면 크게 출세하실 거여요. 처음에는 목민관을 하시다가 중앙 조정에 진출하면 금방 승진하시겠죠. 멍청한 백성들은 조금만 위해주는 척을 해도 감격할 테니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중신들 사이에 끼어 권력을 차지하려면 능력보다는 폭넓은 교우관계가 더 중요해요.”

“그렇군요. 아가씨께서는 현실을 많이 아는 것 같소.”

이민호는 속으로 한숨만 나왔다. 그러나 꼬마 아가씨의 자기 자랑은 끝이 없었다. 여자들이 어려도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이민호는 얼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어렸을 때 점쟁이가 그러는데 저는 왕비가 될 운명이랬어요.”

만약 점쟁이가 남자에게 왕이 될 운명이라고 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겠지만 왕비라니까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민호는 그 점쟁이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렇소? 하지만 새로 즉위하신 금상전하께 아직 원자가 생산되지 않았다오. 아가씨가 왕비가 되신다면 어린 부군과 열 살 넘게 차이가 나겠구려.”

“혹시 알아요? 지금 왕후께서 돌아가시고 제가 계비가 될 지도 몰라요. 운명이란 알 수 없어요.”

“멀쩡히 계신 왕후마마가 돌아가시다니, 좀 심한 말씀이오. 만약의 경우 선대왕께서 돌아가시지 않고 대비마마께서 먼저 돌아가신 다음 아가씨가 대행 대왕 전하의 계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소?”

“그런 늙은 분에게 시집간다고요? 으앙~ 너무해요!”

꼬마가 울면서 집으로 뛰어가고, 몇 년 새 팍 늙어버린 계집종이 뒤따랐다. 옆에서 듣고 있던 민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아가씨께 농담이 과하셨어요. 대행 대왕 전하와 나이 차이가 자그마치 몇 십 년이에요.”

“그래. 농담이 과했지. 농담이야. 대행 대왕께서는 이미 붕어하셨잖아.”

그러나 원래 역사대로라면 저 꼬마 아가씨가 선조 임금의 계비가 되고,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낳아 광해군과 관계가 꼬이게 만든다. 광해군 때는 영창대군의 역모사건에 휘말리면서 폐서인된 다음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몰아내는데 앞장서게 되는 인목대비였다.

이민호는 스물 넘은 나이에 그 지위에 맞지 않게 철없이 행동하는 여자를 용납해줄 정도로 마음이 넓지 못했다. 사람은 나이가 먹어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민호가 아는 인목대비의 성정은 저 꼬마 때와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열 살짜리 꼬마한테서 불쾌한 감정을 느끼리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나 오늘 그런 일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주변 공기가 갑자기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민희와 민영의 손이 권총에 가 있었으나 섣불리 뽑지 못했다. 바로 앞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스님이 서 있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가 분명한데 나이에 비해 몹시 정정했다.

“남쪽 나라의 왕이시여. 저는 청허(淸虛)라고 하는 한낱 늙고 병든 땡중입니다.”

“고명한 스님이시군요. 저는 이민호라고 합니다. 어떤 좋은 가르침을 내려주시려고 직접 오셨습니까?”

이민호가 일어나서 합장하면서 인사했다. 그런데 노승이 나이답지 않게 떼를 썼다.

“오늘은 날이 몹시 더워서 다리에 힘이 빠지는군요. 이럴 때는 그저 시원한 얼음물 한 잔이 생각납니다. 귀한 신분의 여인 두 분이 시원한 빙수라도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민희와 민영은 빙수를 준비해 와서 스님께 대접해라.”

“저, 주인님! 예, 주인님.”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는 민희와 민영을 억지로 저택으로 보내고 이민호가 옆 자리를 스님에게 내줬다. 그러나 아까 꼬마 아가씨에게 해줬던 것과 달리 비단 수건을 깔아주지는 않았다. 스님이 그것 때문에 살짝 토라진 것 같았다.

“사람 차별하는 것 아닙니다, 고산국 국왕전하.”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흥! 노승의 엉덩이 냄새 따위가 묻을까봐 싫다는 게로군요. 저는 사실 국왕전하보다는 그 꼬마 아가씨 때문에 왔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스님께서 저 꼬마 아가씨가 왕비가 되실 거라고 꼬드기셨습니까?”

“저는 천기를 누설하지 않았습니다만, 다른 점쟁이가 그런 소리를 입 밖에 낸 모양입니다. 운명이란 그런 것입니다. 원래 정해졌지만 바뀔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동안 국왕전하께서 여러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셨습니다. 심지어 그 강하다는 이 나라 지배자의 운명까지 말입니다.”

노승은 선조 임금이 원래 역사보다 일찍 승하한 것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이민호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저도 어느 정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왕전하께서 의도적으로 그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조선의 많은 생령들을 구하시고 또한 좋은 쪽으로 운명을 바꾸셨지요. 나무관세음보살.”

이 시대에 법력이 높은 스님이라면 서산대사와 사명당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굉장히 많은 스님이라면 단연 서산대사였다. 이민호는 상대방이 서산대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전하! 신기하게도 선대왕께서 이미 승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꼬마 여시주는 여전히 스스로의 강한 운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시주의 운명이 완성되려면 다른 많은 이들이 인세의 지옥을 맛보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청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설마 왕비가 될 운명의 힘이 너무 강해서 왕이 광해군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는 이야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왕비의 운명을 가진 시주를 고산국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지금과 전혀 다른 평범한 운명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수많은 생령들을 살려주시길 국왕전하께 간청 드립니다.”

“하지만 스님! 나는 아직 정식 혼사를 치루지 않았소이다. 조선 사람들의 운명을 걱정해서 저렇게 보통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철없는 꼬마를 왕비로 맞이하고 싶지 않소.”

이민호는 최소한 혜영 정도의 지혜가 있어야 왕비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을 잘 돌보는 것이 왕실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 주상아 공주나 아라 공주 정도만 돼도 다행일 것이다. 이민호가 쓸데없이 눈이 굉장히 높았다.

“거절하셔도 좋습니다만, 국왕전하께서 나중에 황제가 되신다면 비를 여럿 둘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중에 한 자리를 조선과 이 세상을 위해 써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저는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혼란스럽군요.”

“국왕전하께서 갑자기 조선에 오신 것도 운명이지 않습니까?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국왕전하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혹시 서산대사가 맞소?”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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