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2 34. 종전 =========================================================================
34. 종전
5월 초순에 병력과 함선들을 소집해 조선으로 출항했다. 이번에는 조문 사절도 겸해야 해서 예국참판과 몇몇 곡을 잘하기로 소문 난 관료들이 원정 함대에 동행했다. 이들은 인생 대부분을 선조 임금 치하에서 살았으니 의리상 문상객으로서 역할을 잘할 것 같았다.
파병 병력은 해병 2천, 승마보병 5천, 기마병 500기로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이 해병과 승마보병, 기마병이 많이 늘어서 남는 인원은 고산국을 지키거나 바기오와 해남도 등에 교대로 파병할 수 있었다.
이번에 동원한 함선 중에서 기관을 사용하는 배는 천자 전선이 20척, 수송선이 6척, 탐망선이 4척으로 불었다. 그러나 말 6천 필을 태워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범선들까지 동원해야 했다. 말과 건초 수송선으로 개조한 범선 20척이 돛을 올렸다. 이 계절에 범선이 북쪽으로 항해할 때는 자력 운항이 가능했으나 귀환할 때는 역풍이라 전선에 밧줄을 묶어 예인하기로 계획했다.
“저, 주인님.”
“응. 혜영이. 왜?”
배웅하러 나온 후궁들 맨 앞에서 혜영이 이민호에게 청했다. 국왕이 원정을 떠나는 것을 자제하자는 분위기였지만 조선 국왕이 승하한 현 시점에서 이민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임진왜란을 끝내러 간다는 점에서 중요한 대규모 원정인데 국상 때문에 이상하게도 중요하지 않은 원정 취급을 받게 됐다.
“다음에는 충분히 시간을 내서 주인님의 여자들이 보람을 찾게 만들어주세요.”
“응? 그게 무슨 뜻이야? 다들 맡아서 하는 일이 있잖아? 혜영이 가장 바쁘다는 사실은 다 아는데 뭘.”
“일 말고 여자로 태어난 보람 말이에요! 이 악덕 고용주야!”
뿔이 난 혜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민호는 어리둥절한 채로 혜영과 혜진, 주상아 공주를 비롯한 후궁들 뺨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키가 작은 아라 공주가 발뒤꿈치를 들고 뺨을 내밀 때는 남들 눈치가 보였다.
취타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기함에 오른 이민호가 출항 명령을 내렸다. 같이 따라온 계복이 그 동안 힘겹게 웃음을 참다가 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혜영 아씨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정말 몰라요?”
“알긴 한데. 애를 혼자서 만드나? 어쩔 수 없이 후궁들한테 생리 주기를 물어봐야겠군. 앞으로는 그저 임신시키기 위해 밤일을 해야겠어.”
“달거리요? 그거, 혜영 아씨가 다 알아서 정해줄 걸요?”
“그럼 내가 씨 없는 수박인가?”
건국 초라서 일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후계자 생산은 몹시 중요한 국왕의 업무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이민호도 이제 아이를 기르고 싶었다. 그러나 예비 후궁들이 아직 유치원에 있는 이 시기에 왕자와 공주들로 유아원을 만들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넓은 바다에 들어서면서 함교에서 나온 이민호는 함대사령관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책상과 책꽂이가 있고 회의용 탁자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출입문 세 개가 있었다. 이민호가 자는 침실에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것이 민망해서 원래 두 개였던 침실을 세 개로 나눴다. 중간은 국왕 침실, 왼쪽은 근접 경호하는 여성 호위대 숙소로 쓰고 오른쪽은 이번 원정의 경우 미카와 시녀들이 기거하도록 했다. 원정 기간 동안에 후궁들에게 씨라도 열심히 뿌리라고 혜영이 억지로 태웠다.
이민호가 책상에 앉았다. 함대사령관실의 이 시간 당번인 민주가 문 옆에 앉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곳에서 민주는 비서인 척 행동하나 사실은 경호원이었다.
이민호는 냉장고 설계도를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장기간 원정이나 탐사를 하려면 연료에 이어 식품 보관이 중요한 문제였다. 건조식품 여러 가지를 충분히 준비했으나 냉장고가 개발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전선에서 사용하지 않고 냉장고를 민간에 풀어도 식생활에 큰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관 한 기를 정박 중에도 계속 돌려 전기를 얻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비올레타 양이 왜 여기에 있소?”
이민호는 처음에 헛것을 본 줄 알았다. 마닐라에 있어야 할 비올레타가 시녀 복장으로 수건 여러 장을 미카의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총독의 손녀가 저런 허드렛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잘못 봤다고 여겼다.
“국왕전하! 반가워요. 미카 귀인님의 시녀 자격으로 배에 탔어요. 제가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여러 곳을 돌아보고 싶어서요.”
비올레타는 며칠 전에 에스파냐 상선을 타고 고산국에 와서 주상아 공주의 별궁에서 지냈다고 한다. 이민호는 몰랐는데 그 며칠 사이에 혜영과 미카를 비롯한 후궁들하고 두루두루 친목을 다졌다. 물론 주상아 공주나 아라 공주하고는 마닐라에서부터 친했다.
“어? 그럼 나하고 같이 자야하는데, 알고 있었소?”
“예? 그건 싫어요! 절대 안 돼요!”
괜히 농담했다가 색마 취급을 받았다. 비올레타가 이민호를 벌레 보듯 하고 미카의 침실로 뛰어 들어가서 이민호는 마음에 상처를 좀 받았다. 아무래도 아라 공주가 이민호의 마음을 알고 주선해준 것 같았다.
그러나 비올레타가 예쁘고 착하긴 하지만 미녀 백인 시녀들이 잔뜩 있으니 굳이 비올레타를 얻을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는 고산국에 머문 날도 얼마 되지 않고 게다가 너무 바빠서 후원에는 근처도 못 가봤다.
“맘대로 해. 나도 모르겠다. 여자가 그렇게 많아도 다 안지를 못하는데 더 이상 늘릴 필요가 없지.”
생각해보니 문 앞에 앉은 민주도 예쁜 편이었다. 그러나 여진족 출신 호위대 여자들은 민희, 민영을 제외하곤 아직 한 명도 건드리지 못했다. 같이 지낸 기간이 길어 여동생처럼 느껴져서 안는데 거부감이 생긴 탓이었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수준이었다. 그래서 호위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안아주세요, 주인님.”
“끄응! 그래야지, 언젠가는. 올 하반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을 거야.”
민주는 눈빛만 마주쳐도 이민호의 속마음을 알 정도였다. 호위들에게는 이민호가 세상의 반 이상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훨씬 많아서 호위들의 마음을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했다.
범선들이 측풍을 받아서 원정함대가 이틀 만에 유구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구국왕과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하루 정박했다.
다음 날 아침 왕세자 쇼호 왕자가 이끄는 병사 800명, 대형 외륜선 6척과 함께 출발했다. 기관을 장착한 전선이 늘어나면서 한때 고산국의 군선으로 쓰던 대형 외륜선들이 차근차근 유구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팔라완은 결국 유구국에서 관리하고 고산국에서 병력 약간을 파견해 지키는 정도로 합의를 봤다.
고산국에서 조선으로 가는 길에 항상 그랬듯이 큐슈 해안 지방을 초토화하면서 지나갔다. 사쓰마를 공격한 날 밤에 미카가 고맙다고 이민호에게 몇 번이나 절을 했다. 문서로 읽을 때하고 실제 두 눈으로 볼 때하고 느낌의 차이가 큰 것 같았다.
전선이 20척이나 되니 운영에도 여유가 생겼다. 이민호가 전선 일부와 유구국 외륜선들을 이끌고 사쓰마를 공격하는 동안 전선 몇 척은 만 바깥에 남아있는 수송선과 범선들을 지키고, 동시에 계복이 몇 척을 이끌고 다네가시마를 공격할 수 있었다.
이후 남에서 북으로 해안선을 타고 올라가면서 차근차근 공격했다. 포탄을 실컷 쓰더라도 전라좌수영에서 다시 보급을 받기로 해서 한층 더 여유가 생겼다.
“왜선 함대가 나타났습니다! 50여 척입니다!”
망루에 위치한 무상이 북쪽을 가리키며 보고했다. 이민호는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난 왜선들을 살폈다.
“왜선 중에 중선은 20여 척밖에 안 되네?”
“네. 일본 전체적으로 군선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고 했어요. 큐슈는 조선에 더 가깝고 그 동안 주인님께서 꾸준히 공격하는 바람에 특히 더 심해요.”
이미 황량해진 사쓰마를 세 번째로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본 다음부터 미카는 이민호를 신으로 모시다시피 했다. 어디서든 걸핏하면 무릎 꿇고 우러러 보는 미카를 이민호가 일으켜 세웠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왜군 함대에 대한 분석을 해주는 편이 나았다.
“제가 어찌 감히 주인님 옆에 설 수 있겠어요. 강대한 시마즈 가문을 철저히 무너뜨린 주인님은 제게 신 이상입니다.”
“미카! 미사는 그만 올려. 일을 먼저 하자.”
“예. 주인님. 적선은 아리마, 마쓰우라, 고토의 해적들이에요. 한데 저들은 질 것을 빤히 알면서도 공격을 걸어오고 있어요. ‘남자에게는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 않으면 안 될 전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사무라이들이 흔히 하곤 해요. 그러나 저들은 비열한 해적에 불과해요.”
“적은 수가 몰려오더라도 따로 함정이나 다른 의도는 없다 이거지? 하긴 그런 게 있어봤자 힘으로 깨버리면 되니까. 함장! 함대 전투 지휘를 맡긴다.”
이민호가 지휘권을 넘겨 기함의 함장이 이후 모든 함대를 지휘했다. 함장은 깃발 신호를 통해 수송선 대열 후미에서 항해하던 전선들을 앞으로 불러내 2열 횡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함포 사거리에 왜선들이 들어오기까지 기다렸다가 일제 사격을 가했다.
첫 일제 사격에서 왜선 36척이 동시에 격파됐다. 두 번째 포격에서 나머지 왜선들이 가라앉았다. 중간 규모의 세키부네와 그보다 작은 고바야는 함포 한 방을 제대로 버티지 못했다. 함대의 강력한 화력에 미카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전은 배 척수가 아니라 함포 숫자로 승부가 결정됐다. 전선 20척에 함포 80문이 탑재됐으므로 육상에서 해병이나 승마보병 20명이 왜군 50명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유구국 범선들이 합류하면서 다시 구성된 연합함대는 아마쿠사를 공격한 다음 시마바라 만 깊숙이 들어가 구마모토를 다시 공격했다. 그리고 더 북상해서 사가(佐賀)를 불사른 다음 만에서 빠져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나 나가사키는 생략하고 올라가는 중에 계복을 고토로 보내 또 다시 공격했다. 5년 전에 왜구들에게 잡혀갔던 전라우수영 수군을 구출한 곳이었다.
히라도에 성이 재건되고 있기에 무너뜨렸고, 일본의 침략 전진기지 나고야가 허허벌판이 된 것을 확인했다. 일기도와 대마도에서 무너진 성을 꼼꼼히 살핀 다음 연합함대가 전라좌수영에 도착했다.
고산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통제사 이순신이 이민호의 부친 이응화와 교대로 함대를 이끌고 해협을 지킨다고 들었다. 지금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있을 때였다.
“통지! 어서 오게.”
“아니, 무관이신 분이 어째서 상복 차림입니까?”
이민호가 익숙한 전라좌수영 포구에 내릴 때 이순신이 마중 나왔다. 특이하게 흰색 관복을 입고 흰색 사모를 쓰고 있었다.
“무장이 항상 갑옷을 입는 것은 아니니까. 관복을 입어야 할 때 상복을 입는다네.”
통제사 이순신이 전쟁이 이어지는 7년 동안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는 당대 인물평은 사실 과장이 심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사천해전에서 얻은 어깨부상 때문에 치료 목적으로 매일 한두 번씩 목욕을 해야 했다. 물론 실제 역사와 달리 이번에는 이순신이 사천해전에서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래. 원정군 외에 조문 사절을 이끌고 한성에 가는 길인가?”
“예. 제가 주상전하께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시는군요. 하늘이 무너진 듯합니다.”
거래관계였지만 명목상 신하인 이상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이순신도 선조 임금에게 불만이 많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대왕께서 한 20년 더 재위하실 줄 알았는데 안타깝네. 하지만 금상께서 영민하시니 아국은 금방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 수 있을 게야.”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염치없지만 자네도 계속 좀 도와주게. 백성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당연하죠. 조선과 고산국은 처음부터 뗄 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닙니까?”
이민호가 잠깐 머릿속으로 주판을 퉁겨보았다. 조만간 금광과 은광에서 금과 은이 쏟아져 나올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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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