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0 33. 남국의 바다 =========================================================================
해적의 공격은 바다 쪽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마닐라에 거주하면서 해적들과 내통한 반란군 500여 명이 중국인 거주구역에서 인트라무로스를 향해 총격과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노잡이로 고용돼 총독의 갤리선에 탔다가 이민호에게 들켜 처형당했던 해적 두령과 관계가 있는 자들이었다.
해병들이 고산국 왕실 깃발인 태극기를 휘두르며 인트라무로스 동쪽으로 전진했다. 고산국 해병들을 발견한 반란군이 숫자는 몇 배나 많았으면서도 일거에 무너져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해적과 반란군은 에스파냐 군대라면 몰라도 고산국과는 붙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도망가는 해적과 반란군을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어 수십 명을 쓰러뜨린 직후 전투가 끝났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전멸 직전의 위기에 몰린 저희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벽 일부가 한때 세 번이나 적에게 점령됐었습니다.”
“대규모의 적을 상대로 잘 버티셨소.”
총독이 술루술탄국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기간에 군사대리인을 맡은 디에고 론키요(Diego Ronquillo)가 마중 나와서 이민호를 반겼다. 그는 필리핀 총독을 지내던 1583년에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국 정복은 신과 폐하에 대한 봉사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라며 중국 침략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에스파냐 병사 6천 명을 동원해 명나라 일부 지역을 점령한 다음 명나라 황실의 압제로부터 백성들을 해방시킨다고 선전선동을 할 계획을 세웠다. 멕시코의 아즈텍을 정복할 때와 같은 방법이었다. 물론 명나라의 규모와 발전정도를 알게 된 지금은 그때 이야기를 꺼내면 버럭 성질낸다.
“명나라 해적들이 자그마치 6일 동안이나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함락 직전에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돈 페드로도 열심히 싸우신 것 같구려. 수고하셨소.”
변호사 출신 민정장관 페드로 드 로하스(Pedro de Rojas)도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 이민호 앞에 달려와서 정중히 인사했다. 성벽에 늘어선 에스파냐 병사와 시민들이 고산국왕의 정식 이름을 어찌 알았는지 ‘고미뇨’를 연호했다.
그러나 이민호의 눈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어깨 부분이 찢겨져 가슴이 반쯤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비올레타가 굵직한 머스킷을 들고 한달음에 이민호에게 뛰어왔다. 마치 들라크루아가 그린 작품 <자유의 여신>에 등장한 여인 같았다.
이민호는 비올레타가 품에 안기려는 줄 알고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던 마닐라를 구해줬으니 이 정도 환영인사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비올레타도 이민호에게 관심이 있을 거라고 전부터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민호의 착각이었다. 비올레타가 이민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로 물어보았다.
“저희 아버지는 같이 안 오셨나요? 할아버지는요? 두 분 다 괜찮으시죠?”
“물론이오. 갤리선을 타시는 바람에 2, 3일 늦게 오실 것 같소.”
이민호는 비올레타의 크고 아름다운 가슴골을 보면서 100냥짜리 금괴가 몇 개나 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머나! 자꾸 어딜 보세요?”
“남자의 본능이오. 미안하오.”
민영이 조선의 장옷 비슷한 비단 천으로 비올레타의 상체를 가려주었다. 마닐라에는 적지만 젊은 에스파냐 여성들이 좀 더 있었다. 그 여자들 중에 가슴 큰 여자들도 있고 미인도 있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얼굴과 몸, 신분 이상의 매력을 흘리고 다녔다.
그제야 비올레타에게서 시선을 뗀 론키요 전 총독이 이민호에게 제안했다. 남유럽 남자들은 여자의 매력적인 신체 부위를 대놓고 봐도 실례라고 여기지 않았다.
“국왕폐하와 수행원들을 총독 관저로 모시겠습니다. 폐하께서 묵으시던 별궁은 언제나 국왕폐하를 위해 비워놓고 있습니다.”
“고맙지만 주인이 오시면 그때 들어가겠소.”
디에고 론키요 전 총독이 권해도 이민호는 총독 관저로 가지 않았고, 심지어 인트라무로스 안에도 일부러 들어가길 거절했다. 주인 없는 집에 손님이 먼저 들어가는 것 같아 꺼려지기도 하고, 모기장이 제대로 갖춰진 기함에서 지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인트라무로스의 방어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은근슬쩍 병력을 투입해 마닐라를 사실상 점령할 수도 있었다. 구한말에 외국 세력들은 군사적으로 한성을 공격해 점령한 것이 아니라 공사관 경비 등을 이유로 꾸준히 병력을 들여온 다음 거리에서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한성 점령을 공식화했다. 이민호는 비슷하게 하려면 얼마든지 할 기회가 왔으나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바로 바기오로 갈까 하던 이민호는 에스파냐 원정군이 돌아올 때까지 마닐라를 지켜주기로 했다. 고산국 전선들은 고요한 마닐라 만에서 전선을 정박한 채 에스파냐 함대를 기다렸다.
며칠 전에 아라 공주의 시녀들을 한꺼번에 안은 것 때문인지 시녀들이 이민호만 보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나쁘게 보면 짐승 같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민호도 인정했다. 그러나 이민호 입장에서는 여자가 여럿일 경우 한꺼번에 안는 편이 체력 소모가 적다는 장점이 있었다. 주상아 공주나 미카의 시녀들도 필요하면 한꺼번에 안았다.
이민호는 기함 집무실에서 이번 원정에서 사용된 포탄과 총탄 등 보급품 소모량을 확인했다. 이 정도 원정은 이제 쉽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일본 남동 해안을 공격했을 때는 특히 포탄이 바닥을 보여 아찔했던 적이 있어서 그 다음부터 포탄 재고량에 더욱 신경 쓰게 되었다.
그러나 열대 지역은 말라리아 때문에 예방약이 개발되기 전에는 피하는 편이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말라리아 환자가 다섯 명이 발생해 그들 중 하나가 죽고 셋은 아직 혼수상태였다. 보균자들이 더 있을 것 같았다.
콜레라는 안 걸린 것 같은데 설사병 환자 셋이 거의 미라처럼 말랐다가 지금은 회복세였다. 단기간의 원정에서도 이런데 장기 주둔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차라리 적도 너머 호주를 개척하는 편이 나았다.
딸깍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서 아라 공주의 방에서 비올레타와 공주가 함께 나왔다. 요즘 비올레타가 아라 공주에게 자주 들렀다. 비올레타는 스페인어를 가르쳐주고, 아라 공주는 조선말을 가르쳐주는 식으로 두 사람이 자주 어울렸다.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아! 비올레타 양. 잠시 논의할 게 있소. 고아원을 석조 건물로 만들어야 아이들이 보다 안전하고 청결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을 것 같소.”
배웅하러 나온 아라 공주를 침실로 들어가도록 이민호가 손짓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아라 공주가 이민호를 응원하면서 침실로 들어갔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건축 자금으로 금괴가 준비돼 있으니 예전에 가져갔던 방식으로 가져가시오.”
이민호가 장난스런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자 비올레타가 무슨 말인지 알아먹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고아들과 빈민을 위해 도둑질까지 하려던 비올레타가 부끄러움을 참아내고 책상 위에 놓인 금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슴 사이에 금괴를 하나씩 집어넣었다.
금괴가 하얀 가슴 사이로 세 개까지 가뿐히 들어갔다. 드레스에 가슴 아래를 조이는 끈이 있는 것은 봤지만 양쪽 가슴의 탄력이 약하면 밑으로 빠져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비올레타의 가슴이 무척 탱탱하다는 증거였다.
“세 개로 당분간 운영비까지 충분해요. 아이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폐하.”
“더 넣어도 되는데. 잘 가시오, 비올레타 양.”
비올레타가 양 어깨를 움츠려 가슴 사이에 놓인 금괴가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고정시킨 다음 어색한 동작으로 걸어서 문을 열고 나갔다. 300냥이면 10킬로그램이 넘는다. 설마 했던 이민호의 완패였다.
마닐라는 다시 항구를 개방하고 무역항으로서 업무를 재개했다.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상선이 몰려와 상품을 하역하고 여기서 매입한 새로운 상품을 싣고 돌아갔다. 에스파냐는 아시아에 수출하는 상품이 거의 없었지만 마닐라 자체가 국제무역항이라 멀리서 온 상인들이 자기들끼리 물건을 사고팔아 구입할 만한 물건도 많았다. 특히 에스파냐가 다 못 사들인 비단과 향신료 등은 다른 지역 상인들이 구입했다.
임시 총독이 말레이인, 명나라 사람들을 고용해 무너진 성벽을 고쳤다. 그 사이 고산국 함대도 함대전투 훈련이나 해병 상륙훈련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호위대는 하루에 한 번 말을 달리게 했고, 그때마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몰려나와 구경했다.
나흘째 되는 날 에스파냐 함대가 마닐라로 들어왔다. 돛이 찢어지고 배 여러 부분이 부서지는 등 함선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숫자도 꽤 줄어들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한 이민호가 마중 나가 총독에게 물었다.
“중간에 폭풍을 만나 배 몇 척을 잃었습니다. 뱃사람이 감수할 운명이지요.”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총독이 아끼는 정예 병사들과 부관이 탔던 갤리선 한 척이 가라앉아 전원 실종됐다고 한다. 배를 30여 척이나 잃었다.
이민호는 이번에 마닐라를 공격했던 명나라 해적에 대해 총독과 논의했다. 총독도 인트라무로스가 함락될 뻔한 상황을 보고 받고 심각하게 대화에 임했다.
팽호도의 해적이 고산국 함대에게 몰살당한 이래 명나라 해적이 여러 곳에 분산돼 있다고 했다. 문제는 팽호도처럼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대규모 해적집단이라면 쉽게 파악이 가능하지만, 요즘 해적들은 평소에 흩어져 상인으로 위장하거나 안남 같은 나라에서 외국인 집단거주 지역에 머물며 양민을 가장하고 산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필요할 때 집결한 다음 해적질에 나서서 양민들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유사시에 바기오에 주둔한 부대라도 보내주면 좋겠지만 하필 보병들이라 마닐라까지 구원하러 오기가 어렵겠소.”
“감사하지만 더 이상 전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지켜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으로 마닐라를 방어하기 여의치 않다면 저희는 세부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미안하오. 나는 마닐라가 계속 안전한 무역항으로서 기능했으면 좋겠소. 고산국과 에스파냐는 좋은 동반자이니 총독은 근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아주시오.”
“물론입니다. 저도 마닐라에서 계속 고산국과 거래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에스파냐는 괜찮은 거래 상대였다. 만약 고산국에서 약점을 노출하면 바로 물어뜯을 위험한 자들이기는 하지만 이번 원정에서 군사력의 우위를 충분히 보여줬으니 당분간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며칠 묵고 가라는 총독의 권유를 사양하고 이민호는 함대를 출항시켰다. 그리고 바기오에서 며칠 머물며 루손 섬 북부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해 라자나 술탄 등 기존의 세력가인 토호들을 이용한 간접 지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문제없었다. 기마병 250명이나 해병 천여 명이 토호들의 영지 주변을 행군하면 라자나 술탄들에게 그 동안 없던 고산국에 대한 충성심이 자연스레 샘솟기 마련이었다.
궁전에 머문 이민호는 브루나이 공주들을 하루에 한 명씩 안았다. 처음부터 정략결혼이라 그런지 별로 감흥은 없었다. 앞으로 공주들에게 시킬 일이 많기에 마치 신입사원 면접을 보듯이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면서 동침했다. 그러나 하나 공주에게만은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
공주들은 왕족 여자들이 다 그렇듯 조상대부터 여러 혈통이 섞여 말레이계 특유의 통통하고 귀여운 여자 얼굴이 아니었다. 특히 하나 공주는 주상아 공주에 비교될 정도로 이민호가 보기에도 미인이었다.
하나 공주의 옷을 벗기고 알몸을 보니 허리가 보기보다 가늘었다. 무슬림 여성이 입는 옷이 몸매를 감추는데 중점을 두어서 이민호도 제대로 몰라봤다. 그에 반해 가슴과 엉덩이는 균형이 걱정될 정도로 큰 편이었다.
무슬림 여자들은 뭐든 남편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른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다뤘다간 나중에 사소한 일에서 보복을 당할 수도 있으니 평소에 잘 대해줘야 했다.
“제 몸과 마음의 주인이신 폐하께 존경하는 제 마음을 담아 표현하고 싶어요.”
“뭔지 몰라도 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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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이번 편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올리긴 해야 할 텐데 잘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