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8 33. 남국의 바다 =========================================================================
만 건너편 커다란 동굴 두 곳에서 명나라 사람들이 최고급 음식으로 친다는 제비집 요리를 위해 제비집을 채취하는 자들도 있었다. 매년 수십 명이 추락사해가면서 힘겹게 구한 제비집, 정확하게는 칼새집은 광저우로 수출된다고 했다. 나머지 노예 절반 이상은 근처에서 해적들을 위해 농사를 짓는 자들이었다.
“전하! 브루나이 궁성이 멀어서 해적선을 판매할 수 없으니 남는 배들을 해적 노예에서 풀린 자들에게 주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불쏘시개밖에 안 될 테니 그런 식으로 쓴다면 좋겠소.”
일단 브루나이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줘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숲에 숨은 해적 패잔병들이 우려됐으나, 노예에서 풀려난 남자들에게 무기를 나눠줘서 일행을 지키도록 했다. 풀려난 자들이 브루나이 술탄과 고산국왕 만세를 외친 다음 고향 길로 향했다.
그 다음에는 멀리 바다 건너 섬에 사는 사람들을 행선지별로 배에 나눠 태웠다. 해적선이라 해봐야 크기는 어선과 별다르지 않았다. 부서지지 않은 해적선 100여 척에 노예에서 풀려난 주민 천여 명을 태우고 보름치 식량과 곡식 종자를 나눠주었다. 지난번 무역 때 아이누족과 여진족에게 팔고 남은 철제 농기구가 전선 창고에 남아있어서 이것도 나눠주었다.
노예로 지내던 자들이 눈물로 감사를 표한 다음 노를 저어 떠났다. 그러나 해도도 나침반도 없는 이들이 고향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어차피 동남아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 말레이계 일족에 의해 개척된 곳이었다. 이들이 어느 곳에 도착하더라도 다시 개척을 시작한다고 보면 됐다.
“전하! 석성에서 찾은 전리품이 꽤 됩니다. 이 해적 놈들은 술루술탄에게서 반쯤 독립한 세력이었던 모양입니다. 잘하면 반으로 나눠도 원정 비용을 다 뽑을 수 있겠습니다.”
총독은 이런 맛에 원정을 한다면서 킬킬 웃었다. 브루나이 북부 지방의 해적 도시 두 곳을 초토화시키면서 술루해적의 힘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판단한 총독에게 조금 여유가 생겼다.
“금과 은의 양이 대단하군요. 이 단어는 흑진주라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일반 진주보다 몇 배나 비쌉니다.”
이민호가 총독이 건넨 스페인어로 된 목록을 살폈다. 금과 은, 그리고 향신료는 그렇다 치고 진주가 왜 이리 많은지, 그것도 흑진주가 많은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현대에 가면 흑진주 가격이 백진주보다 싸지지만 인공양식 기술이 없는 이때는 흑진주가 훨씬 귀했다.
“총독! 이 흑진주가 어디서 납니까?”
“그걸 알면 제가 먼저 달려갔겠지요. 하하!”
“하하! 그렇겠군요.”
흑진주가 타히티에서 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위치는 이민호도 몰랐다. 고갱이나 ‘스타리 스타리 나잇’이라는 노래가사만 떠올랐다. 팝송 <빈센트>는 고갱이 아닌 고호에 관한 노래였으나 이민호가 착각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진주에 관심이 있으시니 말씀드립니다. 은색이 들어간 백진주는 열대 바다에서 일반적으로 생산됩니다만 이 크기와 광택을 보건대 특히 상등품입니다. 해적들이 먼 지역에 가서 교역을 하거나 약탈해온 것 같습니다. 크림색과 핑크색이 들어간 것은 흑진주의 일종이며 이 주변 넓은 지역에서 생산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크고 검은색이 진한 진주는 극히 드물게 납니다. 흑진주가 이렇게 많다면 아마 멀리서 교역을 해서 구한 것 같습니다.”
“백진주든 흑진주든 이 지역에서 나지 않는 진주가 많다는 말씀이군요. 총독이 산지를 알아봐주세요.”
“예. 알아보겠습니다. 만약 산지를 찾게 된다면 포르투갈에게는 모른 척하겠지만 전하께는 반드시 알려드리겠습니다.”
“거 참. 고맙소.”
전리품 중에서 금과 은, 진주를 먼저 반으로 나누어 가졌다. 나머지 상품들은 가격을 책정해 적당히 금 또는 은으로 계산해 상품을 에스파냐에서 가지고 고산국은 귀금속을 택했다. 노예로 팔 해적 포로는 에스파냐에서 관리하기로 하고 총독이 선금을 이민호에게 건넸다.
이민호는 그날 저녁에 바로 병사들에게 전리품 분배, 즉 승전 수당을 나눠주었다. 기본이 황금 15냥에 지휘관들에게는 조금 더 지급했다. 저번에 제셀턴에서 받은 황금 다섯 냥보다 금액이 훨씬 불어나자 병사들이 사기가 오르기는커녕 금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쩔쩔맸다.
그날 밤에 에스파냐 병사들이 처형된 술루해적의 가족으로서 포로가 된 여자들을 강제로 덮쳤다. 웬만하면 노예 값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이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상대는 해적들의 여자였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여자들을 때려가면서 아주 지독히 다뤘다. 정절을 중시하는 이슬람 여자들에게는 죽음이나 다름없는 형벌이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흐느끼는 여자들을 억지로 두세 번 돌린 에스파냐 병사들이 허리춤을 추슬렀다. 그 다음에는 원정에 고용된 필리핀 원주민들 차례였고, 마지막에는 명나라 노잡이들이 나섰다.
밤새도록 하도 시끄러워서 짜증 난 이민호가 갑판으로 나가 허공에 권총을 몇 발 쏜 다음에야 소란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이민호가 이런 짓을 말린 것은 아니었다. 침실로 돌아온 이민호는 아라 공주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꼴이 애처로워 품에 꼭 안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해적 여자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에스파냐 원정군 병사들에게 호되게 당한 여자들과 아이들 일부가 죽어서 땅에 파묻히고 있었다.
“씨발! 저게 뭐야? 웬만큼 해야 말을 안 하지!”
이민호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해적을 토벌할 때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좀 너무한 것 같았다. 고산국 전선도 에스파냐 배들과 같은 항구에 정박한 탓에 밤새 끔찍한 비명소리를 듣고 아침에는 못 볼 꼴까지 보게 되어 몹시 불쾌했다. 그런데 계복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험! 도련님. 노예로 팔릴 여자를 잠시 빌려 달라는 놈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상륙해서 잠깐 놀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어제 노예 값까지 돈으로 나눠줬잖아! 성병 걸리고 싶은 놈들은 마닐라에 가서 하라고 해! 차라리 그쪽이 더 깨끗하니까. 저렇게 뒤섞여서 하고 싶은 모양이지?”
이민호는 속으로 몹시 메스꺼웠으나 현대의 휴머니스트나 고결한 선비 흉내는 내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전투에서 이겼다고 정복감을 맛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몇 번이나 당한 여자들하고 그 짓을 하겠다고? 고산국에 성병이 퍼지면 어떡하려고? 저런 꼴을 봤으면 나라 지킬 생각을 먼저 해야지 미친 새끼들이 그저 아무나 덮치고 싶어 해.”
고산국 병사들이 겨우 며칠을 못 참는 게 아니라, 계복이 말한 대로 정복감을 누리고 싶은 때문이었다. 이민호도 해적의 가족들이 비참하게 노예로 팔려가기 전에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대부분 조선에서 태어난 해병들도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
그러나 이민호가 성인군자라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여기서 병사들을 풀어놨다가는 뒷일이 걱정됐다. 성병은 성 접촉 외에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감염되므로 쉽게 볼 수 없는 전염병이었다. 매독 같은 병에 걸리면 지금은 약도 없었다.
“제가 다시 타일러보겠습니다.”
“계복아! 원정 나와서 성병 걸린 놈은 국적 박탈해서 쫓아내버린다고 경고해! 다시 이민하러 들어왔다가 걸리면 탄광행이야!”
고산국처럼 이민을 환영하는 국가에서 강제 출국시켜봤자 신분을 세탁해서 다시 들어오면 그만이었다. 명나라나 조선이나 호적이 엄밀히 관리되지 않아 제대로 알아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동안 돈과 시간이 들므로 국적 박탈과 추방은 고산국에서 꽤 무거운 형벌로 통했다.
연합함대가 이틀에 걸쳐 항해한 다음 브루나이 섬과 민다나오 섬 중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술루제도에 진입했다. 이 지역은 다른 곳과 달리 수심이 낮고 섬이 꽤 많아 함대 전방에 앞서 가는 탐망선들이 쉴 새 없이 수심을 재면서 나아갔다. 다행인지 역풍이 불어 범선들의 속도가 느려서 그나마 수심을 재면서 갈 수 있었다.
브루나이 섬에서 홀로 섬으로 가는 중간인 상가상가 섬 바로 남쪽 봉가오 섬의 작은 항구도시를 불사르고 하루 정박했다. 무역과 해적업을 겸하는, 술루제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항했다. 연합함대는 탐망선 두 척을 앞세운 채 순풍을 받으며 빠른 속도로 항해해 야트막한 화산섬인 홀로 섬에 접근했다. 그리고 오전에 섬 북서쪽 해안, 섬 이름과 같은 이름의 도시인 홀로 앞바다에 도착했다. 홀로 앞바다에 몇 개 떠 있는 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홀로 시가지도 마찬가지였다. 왕궁과 모스크 등 시가지는 정보 보고에 나온 대로 그 자리에 있었으나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다 도망갔어! 부두에 배가 한 척도 없어!”
다섯 살 이후 이민호가 이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술루술탄국의 수도에서 사람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홀로에 세워진 집이 5천 가구가 넘었으나 3만 명이 넘는다는 홀로의 주민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라 공주! 여기가 맞소?”
“위도와 경도 확인하셨어요?”
“물론이오. 지금까지 유구국에서 측량한 위도와 경도가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소. 아무래도 밀림으로 숨어든 것 같소.”
함교에서 이민호가 허둥거리며 물었다. 유구국에 뱃사람이 많아 해적의 생리를 어느 정도 아는 아라 공주가 전혀 뜻밖의 결론을 내렸다.
“남동쪽이 밀림이지만 숨을 곳이 별로 없어요. 아마 배 타고 멀리 다른 섬으로 갔을 것 같아요. 유목민처럼 해적도 근거지에 연연하지 않아요.”
“맙소사! 모든 백성을 배에 태우고 말이오?”
“술루술탄국이 해적왕국이니 배는 충분히 많을 거여요.”
갤리선이 먼저 부두에 도착해 병력을 쏟아냈다. 에스파냐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채로 무기를 앞세우고 천천히 시가지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혹시나 시가지에 적이 숨어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전선에 탄 해병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에스파냐 병사들이 돌아오자 그야말로 맥이 풀렸다. 총독이 탄 갤리선이 고산국 기함에 접근해서 이민호를 불렀다.
“전하! 아무래도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 도망간 모양입니다.”
“혹시 우리가 수색에 들어가면 병력이 분산될 때를 노리고 역습하려는 것이 아니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홀로 섬 전체를 뒤져봐야겠습니다. 밀림이라 해도 평탄하니 수색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섬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섬으로 떠난 것 같소.”
이민호는 총독과 함께 대화를 하다가 더 찾아보기로 했다. 에스파냐 군은 홀로 시가지에 남아서 전리품을 챙기고 주변을 수색하기로 했다. 그 사이 고산국 함대는 홀로 섬의 해안을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함대 절반을 계복에게 주어 시계방향으로 돌고, 이민호는 나머지 절반을 지휘해 남쪽으로 갔다가 반시계방향으로 돌아서 중간에 합류하기로 했다. 계복이 이끄는 분함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이민호도 기함을 남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해안선을 따라가며 아무리 살펴봐도 사람 흔적이 없었다. 바닷가 마을 몇 곳도 텅 비었다. 마치 몽골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다 도망간 아랍의 어느 도시 같았다.
홀로 섬 남쪽 파타 섬과 동덩 섬에는 기마병을 상륙시켜 직접 수색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 역시 마을은 텅 비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기함과 분함대는 홀로 섬 동쪽에서 마주쳤다.
“아무 것도 못 찾았구나?”
“예! 도련님도요?”
아무래도 산다칸을 공략하는 중에 해적들 몇몇이 배를 타고 빠져 나가 홀로 섬에 알린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에스파냐 군이 점령 중인 홀로 시가지로 돌아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전하! 밀림에서 포로 세 명을 잡았습니다. 노인 하나에 젊은 여자 둘입니다. 한 가족 같습니다.”
“오! 잘하셨소, 총독! 술탄이 어디로 도망갔답니까?”
선착장에 배를 대고 이민호는 호위대만 상륙시켰다. 에스파냐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황인종 이슬람 노인과 여자들이 벌벌 떨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