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66화 (215/1,000)

00266  33. 남국의 바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브루나이 수도 코타 바투 항을 떠났다. 술탄이 직접 나와서 배웅했는데 이민호나 필리핀 총독이 아니라 하나 공주를 눈물로 전송했다. 이산가족이 된 하나 공주와 시녀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술탄에게 손을 흔들었다.

술탄이 보이지 않을 거리가 되었는데도 하나 공주와 시녀들은 갑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고향을 눈에 가득 담느라 그런 것 같아 이민호가 내버려두었다.

브루나이의 수도에는 수상가옥들을 포함해 집이 3만여 채나 있었다. 황금으로 도금한 모스크의 첨탑이 떠오르는 햇빛을 반사해 황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연합함대가 북동쪽으로 항해하는 사이 이민호는 전선 6척만 따로 이끌고 반대 방향인 세리아로 향했다. 세리아는 술탄의 명목상 신하로서 받은 영지가 아니라 확실하게 고산국의 해외 영토였다.

모래밭을 향해 파도가 끝없이 몰려오는 해안가에 이민호가 호위대와 함께 말을 타고 상륙했다. 그리고 육지 쪽으로 채 200미터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예전에 익숙했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휴! 냄새 지독하다. 저기네.”

이민호가 그토록 고대하던 유전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땅에서 원유가 뭉클뭉클 샘솟아 시커먼 연못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게 유전이 맞다면 사막의 모래가 원유에 젖어 시커멓게 변한 곳을 찾으면 된다는 이라크 유전과 비교될 만큼 쉽게 찾은 셈이었다.

이민호가 나뭇가지로 찍어서 살펴보니 오랜 세월 동안 소나무나 나무뿌리가 분해 증류되어 형성된 시커먼 타르 웅덩이는 분명 아니었다. 액체의 색깔은 흑갈색에 가깝고 진득진득하긴 해도 점성은 타르에 비해 확실히 낮았다. 그토록 원하던 석유를 너무 쉽게 찾아서 이민호는 허탈했다.

“너희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나라가 발전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물질이다. 정제해서 연료로 사용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유용한 물질을 뽑아서 쓸 수가 있다.”

“주인님이 하시는 일이니 저희는 그런 줄로 알겠습니다.”

“주인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니 저희들도 기분이 좋아요.”

“하하! 그래.”

무뚝뚝한 남자 호위들은 멀뚱멀뚱 웅덩이를 쳐다보고, 민희와 민영은 정말로 기뻐하는 듯했다. 지금 호위들에게 자세히 설명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게 빤했다. 이민호가 호위들을 시켜 가죽부대 4개에 원유를 담았다. 이것으로 여러 가지 시험을 할 계획이었다.

일단은 선박의 연료가 우선이겠지만 원유로 만들어낼 수 있는 석유화학 제품의 종류는 실로 다양했다. 원유에서 몇 가지나 유용한 성분을 추출해낼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이민호는 단순한 증류법밖에 몰랐고, 나머지는 실험을 통해 개발해내야 했다.

기함으로 돌아간 이민호는 정오까지 기다려 세리아의 정확한 경도를 측정하도록 항해사들에게 지시했다. 위도와 경도를 수도인 코타 바투에서 이미 확인했으나 여기서는 거리를 계산해 대략적인 위도만 기재했다.

조만간 이 지역에는 당나귀라는 별명이 붙은 시추시설이 머리를 오르내리면서 원유를 퍼 올릴 것이다. 퍼낸 원유는 커다란 탱크에 담아 보관하다가 배에 싣고 고산국으로 와서 정유하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했다.

경도를 측량할 시간을 기다리는 도중에 점심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정오가 지나서 함대가 북동쪽으로 출발했다. 에스파냐 함대는 미약한 바람이나마 순풍을 받고 또한 조류도 제대로 타서 범선들이 꽤 속도를 낸 모양이었다. 전선이 속도를 올려도 금방 연합함대를 따라잡지 못했다.

완전히 초토화된 제셀턴을 지나는데 파괴되어 흔적만 남은 해적들의 도시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틀 전에 연합함대가 해적들을 공격할 때 목책과 마을을 모두 불태운 다음 철저히 무너뜨렸다.

전염병을 우려해서 해적들 시체를 모두 땅에 파묻어서 지상에 남은 흔적이 거의 없었다. 에스파냐 함대가 떠나오면서 선착장도 완전히 파괴했다. 멀리 떨어진 높이 4천 미터가 넘는 키나발루 산이 멸망한 해적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셀턴에서 나포한 해적선 수십 척을 어제 브루나이 술탄에게 팔아서 그 대금을 총독과 이민호가 나눠가졌다. 총독은 배 판매비용과 목책에서 얻은 금과 은을 합해도 아직 원정비용의 5분의 1도 못 건졌다고 투덜거렸다. 원정에 동원한 배가 200척이고 갤리선 노잡이와 범선 선원들을 합해 수천 명을 고용했으니 에스파냐의 원정비용이 늘어나는 게 당연했다.

전선의 항해 속도를 더 높여서 저녁 때 브루나이 섬 북단에서 에스파냐 함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까지가 적도에 너무 가까워 태풍이 발생하지 않는 땅, ‘바람 아래’였다.

다음 날부터는 다시 역풍을 받으며 항해해야 했다. 이민호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함 집무실에서 지냈다. 그리고 그 동안 번역 출판된 외국 책들을 살폈다.

양반 계층이 이민 온 경우가 적어 이민호가 허용하더라도 고산국은 언론 자유국과 거리가 멀었다. 다만 중인 출신들이 많아 행정실무나 기록하는 것은 제법 체계가 잡혔다. 그러나 유럽에서 출간돼 마카오의 서점에 진열됐다가 고산국에서 번역 출간된 책은 거의 무한한 언론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고산국에서도 이때는 저작권 개념이 없이 무단 번역, 복제했다.

그러나 발간된 책 대부분은 따분한 사상서와 더 따분한 종교담론집이라 읽을 것이 별로 없었다. 아주 가끔 연애소설이 있는데 주로 유부녀를 유혹하는 내용이었고 수위가 꽤 높았다. 예전 같으면 재미있게 볼 텐데 지금은 아내들한테 일수 도장도 못 찍는 신세라 관심이 식었다.

이민호는 저번에 읽다 만 정치사 책을 펼쳐 들었다.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열된 이탈리아의 복잡한 정치사를 읽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그때 선장실에서 사람이 나왔다. 하나 공주와 시녀들이 지내는 곳이 선장실이었고, 함대사령관실처럼 집무실에 연결돼 있었다.

“전하. 차 드세요.”

“오! 하나 공주. 고맙소.”

여자 호위들을 시켜서 하나 공주와 시녀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려 했으나 여진족 호위들은 조선말과 여진어밖에 할 줄 몰랐다. 브루나이 공주나 시녀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조선말은 고산국에 가서 가르치기로 했다. 지금 이민호는 하나 공주와 중국어로 대화중이었다.

“전하께서 술루해적들을 공격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렇소. 곧 산다칸을 공격할 예정이오.”

미인에게 차 대접을 받은 이민호는 기분이 좋았다. 함께 소파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려는데 하나 공주가 소파 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 자리에 앉으시오.”

“전하께서는 제 주인님이십니다. 감히 전하 앞에서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는 편하게 지내시오.”

브루나이가 고산국에게 얼마나 중요한 동맹 상대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민호는 하나 공주만큼은 존중해주기로 했다. 자기희생을 실천하는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마치 소방관처럼 남을 위해 희생을 하지 못하는 일반인이라도 소방관을 존경하는 것과 같았다.

이민호가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하나 공주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민호의 품에 안긴 하나 공주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바로 눈앞에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훨씬 더 미인 같았다. 태어나서 평생 궁궐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피부도 일반적인 열대 여자들과 달리 거칠지 않았다.

“첫날밤을 치루지 않았다고 걱정할 필요 없소. 이곳이 너무 덥고 모기 때문에 모기향을 진하게 피워서 공주를 안을 마음이 생기지 않소. 공주가 미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니 오해 마시오.”

“전하 뜻대로 하소서.”

이민호가 하나 공주에게 입을 맞추고 달콤한 처녀의 혀와 입안을 즐겼다. 입안에서 향긋한 박하향이 나는데 아마도 이곳에 오기 직전에 특별한 향신료를 씹은 것 같았다.

공주는 가슴과 엉덩이가 크고 허리는 몹시 가는 편이었다. 그러나 혹시 허리를 천으로 조여 감았을지 벗겨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다.

“연합함대가 술루해적이 장악한 산다칸을 공격할 예정인데 혹시 그 도시에 대해 들어본 것이 있소?”

이민호는 하나 공주를 품에 안고 물어보았다. 키스도 처음이고 남자 품에 안겨본 것도 처음인 하나 공주는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생각을 정리해 대답했다.

“산다칸에 웅거하는 해적들은 카나바탕간 강 하구인 만 안쪽의 북쪽 언덕에 석성을 쌓고 본거지를 두었어요. 포르투갈에서 구입한 청동대포가 십여 문이나 있다고 들었어요. 병력은 3천이 넘을 거여요.”

“이놈의 포르투갈 상인 놈들이 해적들한테도 대포를 팔았구려.”

이민호는 지금까지 해적이나 왜구 본거지를 공격할 때는 미리 정찰하지 않고 무작정 들이치는 작전을 구사했었다. 해적들은 무장이 빈약하고 만약 배를 타고 항구를 빠져 나오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에 대응 시간을 적게 주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포 때문에 작전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브루나이에는 금이 남아도는 것 같소. 시녀들도 금관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니 말이오.”

브루나이는 땅이 넓어 곳곳에 금광도 있을 테고 무역왕국이라 그 동안 쌓인 부도 많을 테니 하나 공주가 온통 황금으로 몸을 치장한 것은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시녀들마저 금관을 쓴 것은 이상했다.

“저들은 제 조카거나 조카손녀 뻘인 공주들이에요.”

“뭐요?”

시녀들이 금관을 쓴 것이 아니라 공주라서 당연히 금관을 썼다는 뜻이었다. 이민호는 어리둥절했다.

“공주들이 예전부터 일세의 영웅이신 전하를 사모해서 이번에 전하께 시집가는 저를 따라나섰어요. 손에 익지 않은 시녀 일을 하느라 고생이 심해요. 그러니 전하께서 저들도 잘 보살펴주세요.”

“맙소사! 술탄께서는 알고 있소?”

“물론이에요. 국내 정치 상황이 불안정한 브루나이 궁성보다는 전하께 가는 것이 낫다고 오히려 권하기까지 하셨어요.”

술탄의 여동생, 딸 두 명, 손녀 두 명까지 해서 공주만 다섯 명을 떠맡게 되었다. 공주라곤 아라 공주와 주상아 공주뿐이었던 고산국 궁궐에서 밸런스 붕괴가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공주라는 신분은 의미가 없었다. 내명부에서 확고한 서열 1위는 언제나 혜영이 차지하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궁궐에 있는 동안에 이민호가 주상아 공주가 기거하는 별궁에 가장 많이 찾아가도 서열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왕명명의 경우 이민호와 동침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서열은 꾸준히 높은 편이었다. 궁궐 여자들에게도 능력 위주의 서열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200여 척에 달하는 연합함대는 저녁에 8개에 달하는 거북 섬에 분산 정박했다. 고산국 함대 16척에서는 정박 전에 작은 섬을 수색만 하고 병력은 다시 배로 귀환했다. 이에 반해 다른 섬에 정박한 에스파냐 병력은 해안에 다 내려서 불을 피워놓고 뭔가 구워먹고 있었다.

“거북이에요! 거북이가 알을 낳고 있어요.”

민영이 신기해서 가리키는 곳을 이민호가 살폈다. 커다란 바다거북들이 해변에 올라와 모래를 파헤친 다음 알을 낳고 있었다.

“그럼 다른 섬에서 구워먹는 건 저 바다거북인가?”

“너무해요! 알을 낳게 한 다음 잡아먹든지 하지!”

“이미 늦었다.”

이민호가 속이 상한 민영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러나 만약 이민호가 바다거북을 식량으로 삼겠다고 사냥을 지시했다면 두 말 안 하고 거북을 잡을 뿐만 아니라 해체했을 민영이었다. 해달만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다음 날 아침 브루나이 섬 북동쪽의 해적 본거지인 산다칸에 진입하기 직전에 세필록을 지났다. 그런데 해안 숲에서 붉으죽죽한 것들이 움직였는데 분명히 사람 형상이었다. 에스파냐 갤리선에서 적의 매복이 있는 줄 알고 해안 숲을 향해 머스킷을 발사했다.

“오랑우탄이다! 숲 사람이니 쏘지 마!”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해적이 분명하니까 쏴야지.”

“오랑우탄은 원숭이 비슷한 동물이야.”

“분명히 사람이었는데?”

에스파냐 병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이때 쏜 총소리 때문에 산다칸의 해적들에게 비상이 걸린 것 같았다. 초장부터 적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러나 오랑우탄이 없었더라도 어차피 들킬 운명이었다. 만 입구에 통나무를 세워 만든 망루에서 해적 초병들이 미친 듯이 종을 쳐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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