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3 33. 남국의 바다 =========================================================================
“함장! 한 시 방향 언덕 위 목책에 함대 집중 포격이다! 주위에 해자를 두른 책성이 보이지?”
“예! 전하. 맡겨 주십시오.”
기함의 깃대에 함대 전체 사격 중지 깃발을 올렸다. 포격이 멈추자 도시에서 싸우고 있던 양쪽의 모든 병사들이 전선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고산국 병사들은 집중 포격이 곧 실시될 것을 예상했고, 술루해적들은 악마 같은 적선들이 전투를 멈추고 돌아갈 것으로 기대했다.
- 쿠쿵!
기함의 함수 함포 2문이 목책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몇 초 후 목책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다른 전선에서 새로운 목표가 목책임을 알고 집중 포격을 가했다. 보급선 2척과 탐망선 2척에서도 언덕에 세워진 목책 안쪽 목조건물들을 목표로 포를 쏘았다.
목조건물 여러 채가 포격을 받아 하나씩 무너졌다. 목책 안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해적들이 포탄이 터질 때마다 쓸려 나갔다. 포격이 계속되는 중에 고산국과 에스파냐 연합군이 해적 마을을 수색하면서 지나 목책을 향해 전진했다. 이제 바야흐로 전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포격 중에도 계속 이동한 전선들이 해적들이 이용하는 선착장 앞에 도착했다. 배를 지키던 해적들이 도망가면서 해적선 20여 척이 전투 한 번 없이 손에 들어왔다.
결국 지상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목책에서 빠져 나온 술루해적들이 밀림을 향해 도주했다. 도주 행렬을 향해 포탄이 퍼부어졌으나 분산 도주하는 덕택에 절반 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적이 바다가 아닌 산으로 도망간다는 것은 완벽한 패배를 자인하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도주하는 해적들을 밀림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마병들이었다. 숲에서 말을 타고 나오면서 총격을 퍼붓는 기마병들을 개활지에서 숲으로 들어가려던 해적들이 당할 도리가 없었다. 해적들 수백 명이 저항도 못하고 죽어갔다. 기마병들의 대열 앞에 해적들 시체가 차곡차곡 쌓였고, 다른 방향으로 한두 명씩 도주하는 해적들을 말을 타고 따라잡은 기마병들이 칼을 내리쳤다.
“전하! 해적선들을 공격합니까?”
“지상군이 수색하도록 내버려 둬!”
해적선에 실린 물품이야 쌀 같은 자질구레한 것밖에 없겠지만 혹시나 상선이나 해안 마을을 공격해 노략질한 물건이 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에스파냐 병사들이 수색한 다음 돈이 될 만한 것이 모이면 총독이 고산국 함대에 나눠줄 것으로 기대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포격을 중지하겠습니다.”
“끝났다. 해병한테 어서 물 좀 구해보라고 해!”
전선은 판옥선처럼 보통 탑승인원의 한 달 치 식량과 보름치 물을 싣고 다니는데 단 사흘 만에 물이 바닥났다. 이민호는 어서 찬물에 샤워를 하고 싶었다. 물을 쉽게 구할 수 없다면 당장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바닷물도 뜨거울 것 같았다.
이민호가 함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함교 안은 그늘이긴 해도 찌는 듯이 무덥기 때문에 금방 다시 갑판으로 나와야 했다. 어딜 가나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말라리아모기 때문에 긴팔 옷을 입고 있어서 더 더운 것 같았다.
“주인님! 두건을 써서 피부를 가리세요. 장갑도 끼세요.”
“으! 그래야 하는데.”
민영이 이민호가 착용할 물건들을 건넸다. 끔찍하게 더워서 방한용으로나 쓰일 것들을 착용하기 싫었지만 민영이 강요해 하나씩 끼웠다. 아주 조금 더위가 가신 것 같았다.
그 날은 제셀턴의 술루 해적선들이 몰려있는 항구에서 정박하기로 했다. 해적선에서는 돈이 될 만한 것이 별로 나오지 않았지만 목책에서 의외로 대박을 쳤다. 두목의 방 지하에서 금과 은, 두캇과 에스쿠도 외에 고산국 은화와 금화도 쏟아져 나왔다.
총독이 고산국의 몫을 나눠주었다. 대략 황금 10만 냥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원정군 전원에게 황금 다섯 냥씩 나눠주었다. 병원선에 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도 예외 없이 나눠주자 상인들이 얼떨떨해서 말을 잃을 정도였다.
작전 협의를 위해 기함 옆에 필리핀 총독이 탄 에스파냐 갤리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총독이 지중해에서나 사용하던 갤리선을 만들어 원정군의 주력 함선으로 준비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갤리선에도 돛대가 달려 있었지만 돛이 펼쳐진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적도 인근을 흐르는 북적도 해류나 적도 반류의 지류가 함선이 진행할 방향과 반대일 경우가 많고, 바람이 불지 않는 해역도 흔했다. 거리가 멀더라도 노를 젓는 게 훨씬 나았다.
이민호가 저녁 때 바닷바람을 쐬기 위해 기함 갑판에 나왔다. 그런데 총독의 갤리선에서 명나라 노잡이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민호는 슬금슬금 기어가서 노잡이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중국어로 이민호를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갤리선에 중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드물다는 생각에 그들은 큰소리로 떠들었다. 해적들이 섞여 들어온 노잡이들에게 들으라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 탓도 있었다.
“그 빌어먹을 주애공 때문에 거사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총독의 배가 이렇게 주애공 배와 계속 붙어있으면 곤란해.”
“주애공의 배도 동시에 공격하면 어떻겠습니까, 두령?”
“멍청아! 고산국 배에는 화창을 무기로 쓰는 병사가 200명씩이나 타고 있어. 기마병 일부는 아까 낮에 봤듯이 그 악독한 달자들이야. 그리고 주애공이 얼마나 잔인한 인간인 줄을 모르는 거냐? 그가 지나는 곳마다 풀 한 포기 안 남는다더라.”
대화 내용을 엿들어보니 명나라 해적들이 총독의 목숨을 노리기 위해 갤리선 노잡이로 고용돼 배에 탄 것 같았다. 노를 젓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복수를 위해 힘든 노잡이를 자청했다니 대단했다.
그런데 이민호는 좀 억울했다. 명나라 땅을 밟고 싸운 기억이라곤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 영하에서 보바이의 난을 진압한 것밖에 없었다. 당연히 사막 주변에 풀이 없었다. 그리고 영하의 오아시스가 초토화된 것은 이여송의 수공 때문이지 이민호 탓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과장한 것 아닐까요? 주애공이 아무리 피에 미친 살인광이라지만 일본의 심장인 오사카 성에 상륙해서 성과 도시를 불태우다니요? 수십만이 죽었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이번에 마닐라에 도착한 일본인들이 한 소리가 거짓말 같아? 주애공 같은 미친놈이나 실행 가능한 작전이다.”
자꾸 욕먹는 게 화가 나서 이민호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갤리선 아래층 어둠 속 노잡이 수십 명이 노를 젓는 자리에서 그대로 뒤로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비좁은 갤리선에는 승무원 침실이 따로 없었다. 그 가운데 세 명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체구가 큰 자가 두령이고 나머지 둘은 부두령 같았다. 목소리를 확인해보니 맞았다. 이민호가 잠시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권총을 꺼내, 두령을 향해 발사했다.
- 탕!
“크억!”
어느새 나타난 민희와 민영이 이민호 옆에 붙어서 갤리선을 향해 총을 겨눴다. 기함 갑판에서 경계 임무에 투입된 해병 네 명 중에서 두 명이 이민호에게 다가왔다.
“나머지는 가만히 있어!”
이민호가 부두령 두 명을 향해 권총을 겨누면서 경고했다. 두령이 신음소리를 내는 사이 부두령들은 천천히 일어나 두 손을 들었다. 에스파냐 기함에서 병사들이 황급히 갑판으로 올라왔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노잡이들이 전하께 무례를 범했습니까?”
허둥지둥 갑판에 올라온 총독이 이민호에게 물었다.
“말하는 것을 우연히 엿들었는데 1층 갑판에 저 셋이 명나라 해적인 것 같소. 총독을 암살하려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소. 어서 체포하시오!”
“이놈들이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총독이 병사들을 이끌고 노잡이 갑판으로 달려왔다. 두령은 허벅지에 총알이 맞아 피를 줄줄 흘리면서 아니라고 횡설수설했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노잡이로 위장취업한 해적 세 명을 질질 끌고 갔다.
총독이 해적들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냐고 이민호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직접 알아보면 되니까.
“으아악~”
이민호는 해적들을 저녁 때 그냥 다 죽여 버릴 걸 하고 후회했다. 밤새도록 고문을 받으며 명나라 해적들이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이다. 명나라 해적들과 함께 이민호도 고문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함 옆에 정박한 총독의 갤리선에서 새벽에 뭔가 무거운 것을 연속 바다에 빠뜨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이민호가 다시 잠을 깨었다.
“주인님. 아직 깊은 밤이에요. 더 주무세요.”
“응. 그래.”
보조 침대에 누운 민영이 시계를 확인한 다음 작은 목소리로 이민호에게 더 잘 것을 권했다. 그러나 방금 사람이 셋이나 죽었는데 편하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아라 공주가 품에 안겨 있어서 뒤척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다고 잠은 안 와도,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더워도 갑자기 야한 생각이 들었다.
“민영이 이리 올라와.”
“네.”
민영이 침대 위에 올라와 이민호 옆에 앉았다. 이민호가 손짓으로 입술을 가리키자 민영이 이민호의 얼굴을 잡고 혀를 내밀었다. 이민호가 민영의 허리를 안았다. 민희가 누운 곳에서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났으나 모른 척했다.
민영이 이민호의 바지를 벗기고 위로 올라왔다. 하체끼리 비비다가 입구를 맞춘 민영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아찔한 감각에 이민호의 온몸이 경직됐다. 민영이 이민호의 몸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주인님.”
민영이 상체를 숙여 이민호와 입을 맞췄다. 그리고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아라 공주나 시녀들의 눈을 피해 옷을 거의 다 입은 채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국왕으로서 남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여자를 안아도 된다지만 어린 아라 공주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에 이민호가 하체를 높이 치켜 올렸고, 민영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민영의 가쁜 숨결을 얼굴 피부로 느끼며 이민호가 민영을 꼭 끌어안았다.
“민영이 사랑해.”
“저도요, 주인님.”
민영이 이민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필 이때 아라 공주가 뒤척이며 이민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런데 여자들과 몸을 맞대고 있자니 더위가 좀 사그라진 것 같았다. 밤에도 공기가 사람 체온보다 높은 탓이었다. 이민호는 둘을 꼭 껴안고 좀 더 시원하게 잘 수 있었다.
적도 근처인 브루나이 섬 북서쪽 해안에는 이 계절에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다. 하필 해류도 방향이 바뀌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총독 아들 루이스의 항해 능력이 좋았는지 미약한 역풍과 해류를 이용해 범선들이 간신히 남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결국 가까운 거리를 사흘이나 걸려서 브루나이 제국의 수도에 간신히 도착했다. 브루나이 궁성 앞바다를 고산국과 에스파냐 군선으로 가득 채우고 병사들이 상륙했다. 몇 달 전에 미리 이 시기에 도착하겠다고 브루나이 궁성에 연락했기에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 사실 브루나이가 두 나라를 상대로 군사적으로 대응할 능력도 없었다.
병력이 별로 없는 브루나이 궁성을 해병과 기마병으로 포위했다. 물론 명목은 브루나이 궁성을 지키기 위한 우방국 군대의 주둔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브루나이가 마닐라에 복종해야 했기에 브루나이 병사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이민호와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만남을 피하려는 황제를 압박해 거의 강제로 알현했다. 옥좌에 앉은 술탄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샤한샤, 고귀한 술탄, 사이풀 리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고산국의 젊은 왕이여, 그리고 필리핀의 늙은 총독이여.”
샤한샤는 샤 중의 샤, 왕중왕이란 뜻으로 황제를 대신하는 말이었다. 술탄은 은근히 에스파냐 총독에게 좋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브루나이 제국이 이렇게 쇠퇴한 것은 에스파냐 탓이라는 비난이었다.
“술탄과 브루나이를 위해 저희들이 팔라완과 제셀턴에 자리 잡은 술루해적들을 몰아냈습니다. 지금까지 브루나이를 향해 창검을 겨누던 바다와 육지로부터의 위협이 어느 정도 해소됐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술탄께 보고하기 위해 궁성을 방문했습니다.”
“브루나이를 위해서 수고롭게 군사를 일으켜 해적을 퇴치해줬다면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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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