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62화 (211/1,000)

00262  33. 남국의 바다  =========================================================================

- 콰쾅!

세 방향에서 나무성채에 대한 포격이 계속했다. 경량화된 기병포 2문을 기마병들이 쏘는 것은 항상 그렇게 해왔던 것이었으나 동쪽과 서쪽에 배치된 해병들도 각각 4문씩 포를 발사하고 있었다. 나머지 해병들은 125명 단위의 려 별로 대열을 갖추고 언제든 성채를 향해 돌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동안 훈련만 해왔던 해병 포병대에게는 오늘이 첫 실전이었다. 각각 기병포 4문을 운영하는 포병으로 구성된 2개 포병대는 기병포를 옮기기 위해 말 32마리를 동원했다.

해병은 승마보병과 달리 지형에 따라 여차하면 기병포 부품을 지게에 지고 옮겨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해병들이 운용하는 기병포는 포신도 지형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말이 운반하는 장포신과 사람이 운반할 단포신을 따로 제작됐다. 분류는 여전히 기병포라고 해도 기존 기병포에 비해 많은 점에서 개량됐다. 사거리도 조금 더 길었다.

- 우르르~

결국 사방의 목책이 모두 무너졌다. 목책에 배치돼 전투에 대비하던 해적들 대부분이 쓰러져 죽거나 큰 부상을 입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해적들은 이미 얼이 빠져 화승총을 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어서 네 방향에서 해적들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이 전진했다. 그리고 목책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총탄이 날아들었다. 해적들은 더 이상 저항할 의지를 상실했다.

“전하! 적이 항복의사를 전해왔습니다.”

“포격을 중지시키겠소.”

신호를 보내 포격을 중지하자 해적들이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백기는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 지역에 유행시킨 항복의 상징이었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성채에서 빠져 나오는 해적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온몸을 수색했다. 그리고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 동안 해적들은 고분고분 에스파냐 병사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전하! 해적 포로들을 어찌 해야 좋겠습니까?”

“주장인 총독이 결정하시오.”

현재 에스파냐 주도로 원정이 이뤄지고 있었고 고산국은 지원군일 뿐이었다. 그래서 신분은 비록 이민호가 높더라도 지휘체계만은 확실히 지켜줄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고산국이 주도적으로 원정을 할 때 에스파냐에서 병력을 동원해 한 번 도와주기로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오늘 고산국의 힘을 알게 된 에스파냐가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 같았다.

“에스파냐 국법에 따르면 자발적으로 해적이 된 자에 대한 처벌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법이오. 처형은 에스파냐 군에서 집행하시오.”

포로로 잡힌 해적은 300여 명이었다. 에스파냐 군이 성채 안을 수색한 결과 해적 20여 명을 더 생포했다. 여자는 몇 명 없고 아이들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의 생활 근거는 술루제도나 다른 곳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해적에게 붙잡힌 50여 명의 사람들을 구출했다. 백인들도 6명 끼어 있었는데 마카오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었다. 태풍에 배가 난파해 팔라완 섬까지 표류했다가 해적에게 붙잡혔다고 했다.

“전하! 저희들을 구하러 이곳까지 오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저기 같이 온 에스파냐 군대를 보면 알 것 아니오? 에스파냐 군과 함께 해적 본거지를 치다가 우연히 당신들을 구하게 되었소. 살아서 다행이오.”

“이것은 운명이며 하늘의 도우심입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을 목욕시키고 새 옷을 줘서 병원선 역할을 하는 제3선으로 보냈다. 비쩍 말라 뼈만 남은 포르투갈 상인들이 회복될 때까지 3선에서 지내도록 허락했다.

짧은 전투 동안 해적 전사자는 400여 명이나 발생했다. 부상자는 약 200명이 발견됐으나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사살됐다. 술루해적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렸던 에스파냐 병사들은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포로들의 운명도 결정됐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무장 해제시킨 해적 포로들을 결박하고 얼굴에 검은색 보자기를 씌웠다. 해적들이 울부짖는데 아마도 살려달라는 뜻 같았다. 그러나 아나가 모는 말에 탄 아라 공주가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지막 기도를 하는 거여요.”

“해적 주제에 신앙심은 훌륭하군요. 저들은 저들이 믿는 천국에 갈 거요. 해적들은 얼른 천국에 가는 편이 선량한 어부나 상인들에게 낫겠소.”

이민호가 시녀 아나에게 지시해서 말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했다. 곧 해적 포로에 대한 처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어느 나라나 다 그렇듯이 사람 목이 효수돼 성문에 걸려있어도 놀라는 아이들이 없었고, 처형 장면을 구경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즐거운 축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민호는 어린 아라 공주의 눈에 좋고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 위험한 전투 현장에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아라 공주는 이민호가 어딜 가든지 따라다니고 싶어 했다.

“아악!”

드디어 포로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시작됐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해적들에게 칼을 휘둘러 목을 치거나 도끼로 머리를 내려쳤다. 어느 문화권이든 항복한 자들을 죽이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해적은 그 드문 예외에 속하는 특별한 무리였다.

300여 명을 다 죽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사형 집행에 나선 병사들이 숨을 몰아쉴 정도였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해적들 시체를 땅에 파묻는 동안 기마병은 팔라완 섬 남북으로 수색과 정찰을 실시했다. 그러나 남북으로 두 시간 거리 이내에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이민호는 기마병과 해병 모두를 항구에 정박한 전선으로 소집했다. 해적 성채를 뒤진 에스파냐 총독이 저녁 때 금과 은이 가득 담긴 상자 몇 개를 기함으로 보내왔다. 이민호는 원정군에 참가한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분배하고 나서 총독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총독! 에스파냐에서 팔라완 섬을 맡을 의향은 정말로 없는 거요?”

“저희도 고산국 못지않게 병력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루손 섬 북부를 조차를 빙자해 고산국에 할양했겠습니까? 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거 참!”

이민호가 혀를 찼다. 단 한 치의 땅이라도 다른 나라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현대와 달리 이 시대의 영토는 쉽게 사고팔거나 심지어 그 땅에 사는 백성들과 함께 공주의 지참금으로 딸려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브루나이에게 넘기거나 관리를 해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총독! 팔라완은 원래 브루나이 영토였는데도 내가 돌려주겠다고 제안하니 곤란해 합니다. 관리를 하지 않으면 다시 해적들이 차지하게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브루나이가 위축된 것은 술루해적 탓도 있지만 저희들이 브루나이를 침공해 한때 섬 절반을 점령한 탓도 있습니다. 마닐라를 지키기 위해서였는데 당시는 이것저것 역량도 따지지 않고 무작정 브루나이를 침공해버렸습니다. 너무 넓은 영토를 얻은 다음에 관리가 곤란하던 차에 포르투갈이 개입한 핑계로 얼른 물러서버렸지요.”

브루나이가 에스파냐에 원한을 품은 관계라서 총독이 몹시 껄끄러워 했다. 1578년 당시 총독 프란시스코 데 산데 피콘은 ‘민다나오의 리오그란데 조약’이라는 평화적 조약을 술루제도 홀로 섬의 술탄과 체결해 그를 에스파냐의 봉건제후로 임명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브루나이 섬을 공격해 브루나이 술탄을 마닐라에 복종시켰다. 이 와중에 브루나이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해 술루의 술탄이 북 보르네오를 침공할 빌미를 주었다.

그러나 브루나이는 건국 초부터 상업 국가였다. 포르투갈이 말래카 해협을 점령하면서 이슬람 상인들의 입항을 거부하자 브루나이로 몰려들면서 급신장한 나라였다. 그래서 협상이 가능하다고 봤다.

“우리가 브루나이에 가서 대화를 해봅시다.”

“비록 에스파냐가 브루나이의 영토인 마닐라를 점령했지만 지금도 브루나이와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브루나이 궁성에 한 번쯤 가보고 싶었습니다.”

전쟁은 전쟁이고, 무역은 무역이었다. 정치와 경제를 구분하는 것이 상업 국가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브루나이는 이슬람 국가인데 총독은 거부감이 없습니까?”

“저는 필리핀 총독입니다. 당연히 개인적 신앙보다 국익이 앞서야 합니다. 술루술탄국이 해적을 동원하고 에스파냐 국왕을 배신해서 공격하는 것이지 종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브루나이와 언젠가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습니다.”

고산국은 브루나이와 직접 교역하는 유구국 상선들을 통해 지난 2년 동안 브루나이 제국 황실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브루나이에서는 팔라완 섬을 고산국이나 에스파냐에 할양할 테니 북 브루나이인 사바 지역에서 술루해적들을 쫓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을 들어주는 것도 이번 원정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사바 지역은 면적이 73,620평방킬로미터로 고산국의 두 배가 넘는 넓은 지역이었다. 브루나이 섬 전체는 고산국의 21배가 넘는 면적이었다. 고산국의 인구가 조금만 많았다면 영토에 대한 욕심을 내볼만한 땅이었다.

그러나 관리하기 벅찰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1578년에 전쟁을 일으켜 한때 브루나이 섬 절반과 수도를 점령했던 필리핀 총독도 지금은 점령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점령하는 것은 에스파냐의 역량으로 큰 무리가 없었으나, 영토가 너무 넓어 관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연합함대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해역을 북적도 해류의 지류를 타고 사흘 만에 간신히 브루나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범선이 다수 포함된 200여 척이 동시에 움직이려니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총함장인 총독의 아들이 함대의 대열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연합함대는 브루나이의 수도 브루나이로 가는 길에 제셀턴, 현대의 코타키나발루를 상륙해서 공격했다. 에스파냐 군이 앞장서고 좌우에 해병들이 포진했다. 그리고 기마병은 적을 포위하거나 정찰 임무에 투입됐다.

바다에는 200여 척의 연합함대 군함들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지상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데미 캐논이 발사될 때마다 허연 연기가 범선 전체를 감쌌다.

“2시 방향 언덕 뒤에 매복이 있다. 우리 기마병이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어서 쏴!”

- 쾅!

바로 앞에서 포탄이 터지자 알아챈 기마병들이 언덕 뒤를 포위해 적에게 총격을 가했다. 화승총을 든 10여 명을 해치운 기마병들이 다시 남쪽으로 전진했다.

이민호는 기함에 남아 지상군을 위한 포격 지원 임무를 지휘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날이 너무 더워서 육지에서 움직이기 싫어서 배에 남았다. 적도에 가깝고 구름 한 점 바람 한 점 없는 날씨라서 따가운 햇볕이 머리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아야! 찬물!”

“네! 여기요, 전하.”

“고마워.”

이민호가 시원한 빙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무 많이 마셔서 조만간 배탈이 날 것 같았지만 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시녀들이 열심히 갑판 위에서 움직이며 수병들에게 찬물을 배달하고 있었다. 끔찍하게 더웠다.

“지독한 에스파냐 놈들! 무거운 쇠갑옷을 입고 저런 두꺼운 옷을 입고도 잘만 움직이네.”

전투는 거의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술루해적들이 지난 20년 넘게 에스파냐 군에게 공포를 느낀 탓이었다. 에스파냐의 배는 작은 해적선으로 공격하기에 너무 크고, 에스파냐 병사들은 배에서나 육지에서나 너무 강했다.

그래도 욕심 때문에 가끔 에스파냐 상선을 공격하긴 했지만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얼마 전 마닐라를 공격한 것은 술탄이 제정신이 아닌 탓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결국 마닐라 공격에 참가한 술루함대는 몽땅 몰살당하고 이렇게 에스파냐의 보복 공격을 받게 됐다. 술루해적들은 고산국과 에스파냐 연합군에 비해 숫자가 훨씬 많은데도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아야! 저 목책이 성이야?”

“네. 평소에 천 명 정도 주둔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더운 곳에서 사는 아야도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손수건을 짜니 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아야는 유구국 상선을 타고 브루나이에 3번이나 갔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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