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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60화 (209/1,000)

00260  33. 남국의 바다  =========================================================================

이민호가 일어나서 토호들을 주목시켰다. 그리고 토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필리핀 부총독 보르히아에게 요청했다. 토호들에게는 이민호가 자작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 고산국의 영토에서 에스파냐 군을 물러나도록 하시오.”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국왕전하.”

보르히아 자작이 이민호의 의도를 읽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런 다음 기마병 예비마를 빌려 반란진압군에 전령을 보냈다. 전령은 이 지역 영토가 고산국으로 넘어갔으니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원주민 포로를 즉시 석방하라는 자작의 명령을 전했다.

오후에 에스파냐 군이 남쪽으로 물러나고 포로들이 석방됐다는 소식이 바기오에 전해졌다. 토호들이 이민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제 위험이 사라진 것이다.

북부 지방에 진입한 에스파냐 군은 겨우 300명도 안 됐지만 합해서 수천 명이 넘는 병사를 보유한 토호들은 대항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무기 차이도 있고, 마닐라에 더 많은 병력이 주둔하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그 와중에 이민호가 말 한 마디로 위기를 해소하자 그를 더 대단하게 보았다.

저녁에 이민호가 바기오를 방문한 라자와 술탄들을 연회에 초청해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토호들이 모여들었다.

바기오의 별궁 주변에 토호들의 호위로 따라온 원주민 병력이 위험할 정도로 늘어났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바기오 수비대는 물론 해병도 방어 태세에 들어갔으나 별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음식 재료는 비슷하더라도 양념과 요리 방법이 달라 토호들이 무척 맛있게 먹었다. 끔찍한 열대 적응 훈련을 마친 해병들도, 고된 일을 하는 광부나 임노동자들도 국왕이 하사한 음식을 먹으며 국왕전하 천세를 불렀다.

연회장에는 아라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와서 이민호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전 날에 밤새 항해해서 필리핀에 도착한 탓에 아직 어린 아라 공주가 몸을 가누지 못했는데 기어코 나와서 일을 도왔다.

“피곤할 텐데 쉬지 그러시오? 이곳은 좀 추워서 감기에 걸릴까 두렵다오.”

바기오는 고원지대라 해발고도 1500미터에 연평균 기온이 18도 이하에 머물렀다. 4월 중순인데 쌀쌀함은 조선보다 더했다. 그래서 모기가 없었으나 주변에 모깃불을 잔뜩 피워놓아 만약에 대비했다.

“제가 반드시 나와 있어야 해요. 저들 토호들에게 고산국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군사력이든, 부의 힘이든 말이죠. 저들이 겉으로는 평화롭고 순박한 사람처럼 군다고 해도, 토호들은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음흉한 자들이어요.”

아라 공주가 머리에 쓴 왕관을 고쳐 썼다. 큼직한 루비 주위에 굵직한 다이아몬드 수십 개가 박혀 있는 작고도 화려한 왕관이었다.

신라방에서는 평소에 다양한 직업군을 보유하고 있다가 필요할 경우 한 직종을 빠르게 불려나갈 수 있었다. 신라방 이주민들이 이민호의 명을 받아 공방을 차려 보석 장신구 생산은 물론 보석 장인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토호들에게 감정이 안 좋은 것 같소. 혹시 무슨 일이 있었소?”

“옛날에 이곳 북동쪽 카가얀 계곡 지역에 교역하러 들어간 유구국 상인들 50명이 몰살된 적이 있었어요.”

“저런!”

공주는 그때 산적이 아닌 토호 세력이 연합해서 유구국 상인들을 공격한 것 같다고 했다. 이 시대에는 군인이 아닌 상인들도 언제든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야 했고, 가는 길마다 도처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제가 전하와 고산국을 위해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렇게 큰 보석을 많이 주셔서 고마워요.”

“필요하면 얼마든지 드릴 테니 남에게 주거나 잃어버리지만 마시오.”

아라 공주가 이민호의 품에 푹 안겨 있었다. 토호들이 보라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아는 이민호가 아라 공주를 바짝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토호들에게는 두 사람이 서로 깊이 사랑하는 젊은 왕과 좀 어린 왕비처럼 보였다. 어색하게 연기하는 이민호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큰 보석 하나가 고산국 일 년 예산보다 비쌀 것 같아요.”

“설마 그렇기야 하겠소만.”

아라 공주와 시녀들이 화려한 비단옷에 걸친 보석들은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물론 이민호가 인조 보석 장신구를 내줘서 걸친 것이지만, 천연 보석일 경우 가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토호들은 듣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고산국의 부의 힘 앞에서 기가 죽었다.

“저들이 반란을 일으켜도 상관없소. 자기들끼리 알아서 살든지 말든지 하라고 버리면 되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어머! 영토는 고산국 본토보다 이쪽이 훨씬 더 넓어요.”

“그렇소? 별로 상관없는 일이오.”

고산국은 고구마처럼 길쭉하게 생겼고 이번에 고산국 영토가 된 루손 섬 북부는 감자처럼 생겼다. 고산국은 35,195평방킬로미터, 루손 섬 전체는 104,688평방킬로미터인데 새로 영토에 편입된 면적이 5만 평방킬로미터 이상이었다.

고산국 본토보다 루손 섬 북부가 더 넓다 해도 이민호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고산국은 무역 국가이지 땅 파먹고 사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고산국 남단과 루손 북부의 섬들 사이, 바시 해협이 루손 섬 전체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루손 섬 북부를 영토로 편입하면서 손해만 안 보면 다행이라는 식이었으니 지배할 의욕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서쪽 해안 분지와 동쪽 내륙 카가얀 계곡 지방을 농경지로 개발하면 많은 인구를 부양할 가능성이 있었다. 농업생산량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지만 인구가 국력인 시대에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만약 이 지역 주민이 고산국 군에 입대한다면 최소한 도망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타갈로그어가 통하지 않소?”

“이들은 타갈로그인이 아니라 일로카노 사람들이에요. 팡가시난 사람도 일부 있어요.”

필리핀 전역에서 당연히 타갈로그어가 통용될 거라고 생각한 이민호의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같은 루손 섬 안에서도 지역별로 인종 분포가 달랐다. 같은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라고는 하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번에 상대할 술루해적들 이야긴데 말이오. 에스파냐 사람들이 말하는 모로인의 정체가 뭐요? 그들과 말이 통할 수 있겠소?”

“모로인은 이슬람을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지 민족적 기원은 여러 가지에요. 그러니 그 지방 말을 하는 사람을 통역으로 따로 구해야 해요. 중간에 통역 두세 명을 세워두고 교역하는 경우도 많아요.”

원래 에스파냐 사람들이 무슬림을 가리키는 무어인과 비슷하게 모로라고 부른데서 나온 이름이었다. 이민호는 언어 문제 때문에 앞으로 골치 아플 것 같았다.

“여기도 굉장히 복잡하군요.”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여요, 전하.”

어린 아라 공주가 더 어른 같았다. 그런데 아라 공주가 이민호의 두 다리 사이에서 움직여서 좀 곤란했다. 공주가 아예 더 어리면 신경 안 쓸 텐데 적당히 커서 자극적일 때가 있었다.

토호들이 적당히 술에 취하자 모닥불을 중심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민호는 공주와 시녀들을 데리고 슬그머니 빠져 나왔다. 연회는 성공적이었다.

밤에 궁전에서 자는데 꽤 추웠다. 창문을 꼭꼭 닫고 이불을 덮어쓰고 잤다. 그리고 침대 전체를 모기장으로 덮었다. 춥다 해서 모기가 없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모기가 살지 못하는 지역이라도 가끔 바람에 실려 오는 수도 있어서 이민호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고산국에서 사용하는 5인용 야전천막은 계절과 환경에 따라 두 가지를 사용했다. 여름용은 녹색에 나뭇잎 위장을 하고 겨울용은 기본 갈색에 흰색 또는 회색 천을 덮을 수 있었다. 모두 방수는 기본이고 여름용은 특별히 모기장을 달고 벌레들이 싫어하는 약을 천에 발랐다.

말라리아모기에 대한 대비는 전선에도 갖춰져 있었다. 전선 내부의 모든 문에는 모기장을 쳐놓았다. 모기향도 개발해 하루 종일 피우도록 했다. 다들 진저리를 치고 두통을 호소하는 병사들이 많이 생겼지만 말라리아 환자를 줄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바기오에 몰려든 토호들 100여 명을 왕궁 앞 광장에 초청해서 고산국의 군사력을 선보였다. 토호들과 호위병들 외에 광부들과, 주로 명나라 사람들인 임노동자들이 구경했다.

- 탕! 탕! 탕! 쉭! 쉭! 쉭!

요즘 감불의 무예 실력이 물이 올랐다. 감불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표적지 세 개에 총탄을, 다른 세 개에 화살을 잇달아 명중시켰다. 기마병들이 무슬 시범을 보여주는 시간에 첫 주자로 나선 감불이 토호들의 기를 완전히 죽여 놓았다.

루손 북부의 토호들은 기마병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으므로 거대한 말의 크기와 속력에 많이 놀랐다. 그리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총과 활을 쏘아 표적을 맞히자 소리를 내어가며 감탄했다. 일부 토호들이 화약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고산국과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 콰쾅~

기병포 2문을 연속 발사해서 저 멀리 산언덕을 초토화시켰을 때는 토호들이 입을 다물었다. 야자나무 중간이 꺾이고 바위가 터져 나가는 것을 봤을 때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용기를 낸 토호가 이민호에게 물었다.

“대왕폐하! 대포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습니까?”

“기존의 것과 종류가 좀 다르오. 쾅! 하고 터지면서 쇳조각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사람들을 찢어 죽인다오.”

“잔인한 무기로군요.”

“파편이 몸을 찢기 전에 강력한 폭풍이나 화염으로 인해 그 사람은 이미 죽어 있을 테니 큰 상관은 없을 것이오.”

이민호가 일부러 살벌하게 설명하자 토호들이 오들오들 떨었다. 말 잘 듣는 온순한 백성들로 만들기 위해 이민호의 과장이 계속됐다.

“전하께서 상대할 적들은 정말 운이 없는 자들이겠군요.”

“그렇소. 적이 불쌍하지만 아군이 죽을 수는 없지 않소? 지난달에 일본의 수도를 공격했을 때는 일본 병사와 백성을 포함해 삼십만 명 넘게 죽였소. 아직 그 소식이 이 지역에 도달하지 않았을 테니 나중에 확인해 보시오.”

“세상에!”

토호들은 이민호가 한 말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고산국이 대포를 사용했다면 가능할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토호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이민호는 새로 얻은 영토에서 세금도 안 걷으려 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반란으로 시끄러워지면 곤란했다.

“대왕폐하! 고산국은 수준 높은 문물과 아름다운 상품으로 이 지역에서도 이름이 높습니다. 그러나 멀리 마닐라에서 사오려니 가격도 비싸고 운반할 때 애로가 많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폐하의 백성이 되었으니 바기오 성 아래에 작은 시장을 열어주시어 저희들에게도 문명을 맛볼 기회를 베풀어 주십시오.”

“비쌀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소.”

“저희들은 작은 지역의 왕들입니다. 그 정도 경제적 여유는 있습니다.”

이민호가 속으로 토호들을 비웃었다. 백성들을 착취해서 사치나 일삼는 토호들은 그걸 자랑으로 알았다.

이민호는 토호들의 경제력을 흡수하는 편이 낫다고 봤다. 장기적으로 루손 북부 지방을 직접 지배할 예정이니 토호들은 잠재적인 적이었고, 조만간 몰락시킬 예정이었다. 시장은 이를 위한 좋은 수단이었다.

토호들이 사치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면 밑에서 고생하는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토호들에게 반기를 든 백성들이 고산국 직할지로 편입되길 원할 것으로 예상했다. 백성들의 반란이 실패하더라도 이민호가 그 이유를 들어 토호들을 평민으로 끌어내릴 핑계가 될 수 있었다.

“알겠소. 남는 물량 일부를 이쪽으로 돌려주겠소. 시장은 고산국 예조 참의에게 지시해서 열라고 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무역만 할 곳에서도 혹시 몰라 군사력 시위를 하는 이민호였다. 영토가 된 루손 북부의 토호들에게 확실한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어 아예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시장이라는, 나중에 그들에게 독이 될 꿀을 나눠주었다.

토호들이 처음에 바기오에 올 때는 적세를 탐지해본다는 의식이 강했을지라도, 돌아갈 때는 고산국의 충실한 신민으로 변해 있었다. 이민호가 토호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충성서약을 하는 토호들도 있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깜빡 졸았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난 줄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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