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9 33. 남국의 바다 =========================================================================
33. 남국의 바다
궁궐 앞 선착장에 후궁들과 수도의 백성들이 다 나와서 원정함대를 배웅했다. 이민호가 손을 흔들 때마다 백성들이 환호했다.
백성들 표정에서 국왕이 제발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간절함이 느껴져 이민호는 가슴이 찡했다. 아직 건국 초기이고 왕실에 후계자도 없어서 백성들이 다들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전선 6척, 기관 2기를 탑재한 보급선 1척이 탐망선을 앞세우고 아리수 강을 내려갔다. 강 하류는 유속이 느려지면서 퇴적물이 빠르게 쌓이기 때문에 수심 변동이 심했다. 수로가 막히지 않도록 준설선이 매일같이 강바닥에 쌓인 토사를 퍼내야 했다.
넓은 바다에 나오면서 탐망선을 전선 뒤에 연결하고 탐망선 승조원들이 전선으로 옮겨 탔다. 작은 배에 탄 채로 거센 파도를 헤치고 갈 수는 없었다. 단정은 가벼워서 전선에 끌어올리고 약간 큰 탐망선은 예인하는 식이었다. 보급선은 연료와 식량, 탄약을 가득 싣고도 잘 따라왔다.
팽호군도를 들렀다가 고산국 남쪽 도시 남시에 하루 정박했다. 조정에서 도시나 지방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 대충 자기들끼리 그렇게 불렀다. 고산국 수도에도 이름이 없어 보통 수도나 서울이라고 칭했다.
현재 도시 건설 공사는 9할 정도 진행되고 있었고 시가지가 외곽으로 빠르게 확장했다. 남시는 처음부터 상수도와 하수도를 갖춘 최초의 계획 도시였다. 원래 천일염전에서 일하는 자들이나 어업기지 역할로 개발돼 도시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위치가 남쪽이라 명나라나 필리핀에서 가족 단위로 이민 왔다가 그대로 남시에 정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민호는 남시의 건설 현황을 보고 받고 몇 가지 지시를 한 다음 배로 돌아갔다.
다음 날 오전에 출발해 밤을 새워 항해해서 그 다음 날 오전에 산토 토마스 항구에 도착했다. 해병들의 현지 적응훈련을 위해 며칠 전에 미리 필리핀으로 떠났던 전선들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수병들이 갑판에 올라 환영해주었다.
항구는 깔끔하게 건설됐고 공사인력으로 투입된 명나라 노동자들의 임시 거주지는 해체되고 불태워졌다. 지금 그들은 건설인력은 바기오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민호는 마차를 타고, 나머지 기마병들은 말을 타고 바기오에 도착해 시원한 궁전에서 여장을 풀었다.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계복이 마침 돌아와서 해병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밀림지대에서 고생했는지 다들 몰골이 안 좋았다. 이민호는 계복에게 지시해 잘 먹이고 푹 재우도록 했다. 바기오의 모든 거주지 창문에는 비싼 삼베 모기장이 쳐져 있었다.
“구리 광산이요?”
“예. 구리 산출량은 많습니다만 은과 섞여서 채굴돼 분리하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 편입니다.”
“오! 정말 잘 됐소.”
예국에서 파견한 관리가 이민호에게 바기오의 도시 건설과 광산 개발에 대해 보고했다. 채굴 중인 금광 두 곳 외에도 은광 한 곳과 은과 구리가 함께 산출되는 광산이 며칠 전에 발견돼 이민호가 몹시 기뻐했다.
그 동안 일본과 교역량이 줄어들어 전깃줄을 만들 구리가 부족했었는데 이로써 단번에 해결됐다. 바기오 지역에는 앞으로 더 많은 금광과 은광이 발견될 것을 이민호가 알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했던 구리 광산을 발견한 것 때문에 더 기뻐했다.
은광 발견도 좋은 소식이었다. 명나라의 금은 교환비율에서 알 수 있듯이 명나라 주변 국가에서는 은의 가치가 당시 유럽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금은 교환비율은 몇 십 년 지나지 않아 국제 평균에 맞춰지게 된다. 현재 5.57대 1이 10대 1 이상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무역을 통해 남는 이익을 금으로 바꿔 궁궐 지하 창고에 쌓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은이 부족하면 당장 교역에 문제가 생긴다. 이번에 때맞춰 개발된 은광으로 인해 여유가 생겼다.
“전하! 루손 섬 북부 전체가 고산국 영토가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인원! 인원을 더 보내주십시오! 지금 바기오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그 넓은 지역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전하!”
“그건 생각을 좀 해봅시다.”
이민호가 부정적이자 예국 관리가 우거지상을 지었다. 그러나 모든 영토에 관리를 파견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아직 관리 숫자가 극도로 부족해 고산국 본토에도 제대로 행정력이 못 미치는 곳이 많았다. 특히 산맥 동부 원주민들이 사는 지역은 아직 행정을 위한 관리 파견은 물론 미처 탐사를 하지 못해 지도도 제대로 작성되지 못했다.
그러니 새로운 영토가 된 루손 섬 북부에 파견할 여유 인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관리가 더 무서운 소리를 했다.
“며칠 전부터 전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토호들이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멀리서도 오고 있다고 합니다. 에스파냐 군대 때문에 전하께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합니다.”
“음. 만나봐야겠지요.”
다음 날 낮에 바기오 주변에 사는 힌두교도와 이슬람 토호들이 몰려왔다. 토호 30여 명이 호위병 열 명씩만 데려와도 300명이었다. 호위들은 궁전 밖에 머무르도록 하고 토호들만 입장시켰다.
“마하라자께 인사 올립니다!”
라자와 술탄들이 알현실에 입장해서 인사를 올리는 중에 이민호에게 이런 칭호를 올렸다. 힌두어에서 라자는 왕이고 마하라자는 대왕이었다. 이민호는 그런 칭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닐라에서 몰려온 에스파냐 군대가 백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저희들을 보호해주십시오.”
바기오에서 일하는 타갈로그어 통역이 알현실에 배치돼 의사소통을 도와주었다. 그 통역이 중간 중간에 이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통역에게 들어보니 며칠 전에 고산국에서 에스파냐 부총독에게 들었던 말과 많이 달랐다.
“그대들이 에스파냐를 상대로 무장반란을 일으켜서 에스파냐 군대가 진압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반란이라니요? 저희들은 스스로를 지킨 것뿐입니다. 저희들은 대대로 이 지방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 멀리 남쪽 마닐라를 에스파냐 군대가 점령한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에스파냐 영토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계속해보시오. 이 분은 필리핀 부총독이오.”
“예. 새해 들어서 마닐라에서 보낸 작은 배 몇 척이 해안 마을 몇 군데를 살펴보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에스파냐 군대를 처음 보게 됐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에스파냐 군대에게 물과 식량을 내어주고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스마리냐스 총독의 아들이 지난해 겨울부터 새해까지 루손 섬 북부를 탐사한다더니 그때 있었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이민호 옆에서 부총독 보르히아 자작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 일은 처음에는 종교적 갈등에서 비롯된 무장반란과 진압 과정으로 파악됐었다. 그러나 현지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에스파냐 군대가 이 지역에 들어오기 전에 신부가 전도하러 왔을 것이오. 맞소?”
“그렇습니다, 대왕 폐하! 신부라는 승려가 마닐라에서 와서 저희들에게 신을 믿으라더군요. 저희야 지금도 신을 열렬히 믿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신앙심이 높은 것 같아 존경하는 의미로 선물을 줬는데 그 신부라는 승려가 무슨 일인지 선물을 땅에 내팽개쳤습니다. 신부가 화가 나서 돌아가고 나서 지난달에 갑자기 마닐라에서 군대가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평화롭게 살던 마을을 불태우고 젊은 남자들을 잡아갔습니다.”
“싸우다 죽은 사람은 없소?”
“저희가 잘못한 것도 없고 저항을 할 이유도 없어서 그냥 남자들만 끌려갔다고 합니다. 에스파냐 군대가 마을 남자들에게 일을 시키려고 한다고 해서 도와주는 셈 치고 갔답니다.”
참으로 긍정적인 인간들이었다. 마침 수확기가 끝나 시간이 남아서 저항하지 않고 끌려갔다고 한다.
이민호가 필리핀 부총독 돈 후안 마르티네스 로페스 데 보르히아 자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르히아 자작은 전선 기함에 함께 탑승했고, 고이티 남작은 에스파냐 범선 세 척을 몰고 북상해 지금쯤은 유구국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아닙니다, 국왕전하! 저들 야만인 토호들은 신을 모독하고 신부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루손 섬 전역이 필리핀 총독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니 반란군이 분명합니다.”
“종교 문제는 넘어가도록 합시다. 어쨌든 마닐라에서 루손 섬 북부는 이번에 처음으로 탐사를 진행했군요.”
“루손 섬 전역은 에스파냐의 영토입니다. 물론 지금은 고산국 조차지로 됐습니다만.”
“잘 알겠소. 반란이라서 걱정했더니 큰 문제는 아니었구려.”
마닐라와 주변 지역 극히 일부를 점령하고는 그 넓은 루손 섬 전체가 에스파냐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좀 웃겼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포르투갈과 조약을 맺어 식민지에 대한 우선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이민호는 타갈로그어 통역을 불러 포고문을 전달하게 했다. 타갈로그어가 루손 섬 전역에서 통하는 것이 아니라서 라자와 술탄들은 또 다른 통역을 내세워 왕명을 전달받았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말씀하셨다. 고산국 국왕과 마닐라에 있는 에스파냐 왕국의 필리핀 총독부는 영토 경계선을 두고 이렇게 약속을 했다. 대략 서쪽 로사리오부터 그 동쪽 해안까지 선을 그어 그 북쪽은 이번 달부터 고산국 영토가 되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고산국의 백성이다.”
술탄과 라자들이 웅성거렸다. 자기들 의사는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국경선을 획정했는데도 이들은 왠지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존 라자와 술탄이 다스리는 지역은 그 지배자들의 영토로 인정해주겠다. 고산국 영토가 됐다지만 앞으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희들은 스스로 땅을 일궈 경작하고 물고기를 잡고 살아왔다. 나라에서 해준 것이 없었으므로 나라에 세금을 낼 필요도 없고 군사를 내거나 부역을 해야 할 의무도 없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다른 마을의 경계선을 존중하고 모두들 평화롭게 살아가기 바란다.”
아직 인구가 적은 곳이니 괜히 반란이 일어나 시끄럽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 이민호가 내린 관대한 포고령이었다. 그러나 토호들은 불안감에 떨거나 몹시 낙담하더니 이민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대왕폐하! 그럼 적이 침략해 와서 전쟁이 났을 때 대왕폐하께서 저희들을 구해주지 않으실 겁니까?”
“앞으로 에스파냐는 고산국 영토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오. 만약 왜구가 대거 침공해온다면 바기오로 연락하시오. 그럼 군대를 보내 왜구를 몰아내주겠소.”
“와!”
토호들이 갑자기 환성을 질렀다. 주요한 두 가지 외적의 침략이 단번에 해결됐으니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산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꽤 유명했다. 명나라 해적을 몰살시키고 큐슈 해안지역 여러 곳을 공격해 불태운 것만으로도 강국임을 입증했다. 얼마 전에 오사카를 공격해 성을 불태운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명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동안 작은 마을로 나뉘어 있다가 강국에 소속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토호들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마땅히 세금을 바치겠습니다. 수확량의 2할을 바치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3할을 바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호해주십시오.”
이민호가 인상을 찌푸린 것은 이들을 지켜줘야 할 의무를 질까봐 그런 것인데 토호들은 세금이 적어서 불쾌해 한다고 오해를 한 것 같았다. 결국 받는 만큼은 도와줘야 했다. 길게 봐서 이들도 고산국에 정식으로 편입시킬 계획이었다.
“마을의 상황을 봐서 남는 것을 바기오에 바치도록 하시오. 앞으로 큰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대들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노예로 삼고자 하는 적이 쳐들어온다면 내가 군대를 내어서 구하겠소. 하지만 그대 지배자들은 지금처럼 앞으로도 마을을 지킬 만큼 어느 정도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시오. 요즘은 왜구가 노략질하는 경우가 없소?”
“예, 전하! 5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에 북풍을 타고 왜구들이 종종 노략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구가 오지 않는 대신 기독교를 믿는 일본인들이 꾸준히 배를 타고 오다가 가끔 해안선에 표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들에게 물과 식량을 주어 마닐라로 보내고 있습니다.”
“표류하는 자들을 구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칭찬받을 만한 일이오.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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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루손 북부가 별로 필요가 없어서 츤데레처럼 말했지만 나중에는 제대로 지배하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