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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56화 (205/1,000)

00256  32. 뜨거운 바다  =========================================================================

“보아 하니 더 이상 구매할 자금이 없으신 모양이구려. 모처럼 구한 보석인데 백은 100만 냥 어치는 남을 것 같소. 진주 40만 냥에 향신료 60만 냥까지 해서 북경에 다 넘겨야겠군요.”

“전하께서 저희들을 위해 최상품만 준비하셨는데 구입하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최상품이라는 대목에서 이민호가 속으로 찔끔했다. 그래도 인조 보석이나 모조 보석이 아니라서 당당할 수 있었다.

서양 상인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보석과 진주, 여러 가지 향신료 견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히 욕심이 나긴 날 것이다.

“아니오. 북경이 여기서 좀 멀어서 그렇지 다 합해서 200만 냥보다는 더 받을 수 있을 거요.”

“구매하고 싶은데 혹시 다른 방도가 있는지요?”

“글쎄요.”

상인들은 외상을 원했지만 이민호는 차라리 다른 것으로 받을지언정 외상으로 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때 아라 공주가 피곤하다는 듯이 이민호에게 몸을 기댔다.

“피곤하오, 공주?”

“네. 아음~ 죄송해요, 전하!”

“이제 상담(商談)은 다 끝났소.”

아라 공주의 행동은 서양 상인들을 조급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민호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한 아라 공주가 예뻐 보였다. 역시나 그때까지 눈치를 살피던 두아르테가 황급히 물었다.

“저번에 고산국 상인에게 듣기로, 상인에게 자금이 부족하거나 적정한 판매가격을 예상하기 어려우면 위탁판매를 하신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신라방 상단 말이오? 그들은 지금 고산국 국영 상단으로 편입됐소. 하지만 동 두아르테나 마카오에 계신 신사 분들이 다른 나라의 국영 상단으로 활동하기는 어렵지 않겠소?”

위탁판매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명백한 의사 표시였다. 두아르테가 낙담하고, 에스파냐 상인들도 같은 제안을 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근면하고 성실한 신라방 상인들은 결국 고산국으로 넘어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이민을 해서 고산국 백성이 된 자들은 절반을 살짝 넘는 2천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명나라 땅에 본거지를 두고 살거나 고산국을 왕복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갑제 등으로 인해 거주지를 떠나면 같은 지역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이민하는데도 돈이 많이 들었다. 이민호는 이들이 쉽게 이주할 수 있도록 자금 지원을 해서 최대한 많이 끌어들였다. 이민해온 자들은 주로 상인이나 선원이었고 소수지만 향시에 합격한 거인, 장인, 광산기술자도 있었다. 고급 인력을 한꺼번에 많이 받아들여서 이민호는 몹시 흡족했었다.

“죄송하오나 전하! 지금 당장은 대금으로 지불할 금이나 은이 없습니다. 포르투갈은 예전에 에스파냐가 그랬던 것처럼 영토를 넘겨드릴 수도 없습니다. 다음에 저희들이 올 때까지 이 상품을 다른 곳에 팔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금력이 약한 포르투갈이 먼저 포기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보석들을 싸게 사서 약간의 가공만 거쳤기 때문에 아까울 게 없었다. 적당한 대가만 치러준다면 이 자리에서 팔아치우고 싶었다. 상품이 아닌 용역도 좋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저번에 내가 마카오를 순방했을 때 고산국 함대가 포르투갈과 함께 인도양의 해적들을 소탕하기로 합의했지 않소? 고아에 계신 부왕께 의향을 여쭤보셨소?”

“물론입니다, 전하. 이번 여름에 부왕께서 직접 고산국에 오시거나, 또는 대리인을 파견해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범선은 계절풍을 따라 오가므로 가까운 인도를 왕복하는데 1년씩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 부왕(副王)이 직접 고산국에 올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잘못하면 부왕이 1년 반 동안 고아를 떠나게 된다.

국왕이 직접 고산국을 방문한 유구국처럼 앞으로 아시아에 들어온 포르투갈 세력과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가 적어서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항해자들의 나라인 포르투갈은 동맹으로서 환영할 만했다.

“잘 됐소. 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조약이 체결된 다음부터 고산국 전선이 수시로 말래카 해협을 지나고 인도 고아에 입항하게 될 것이오. 인도양은 고산국에서 거리가 멀어서 병참 지원을 하기에 조금 불편할 것 같아서 여러분에게 제안하겠소. 인도양 지역에 파견된 고산국 함대에 대한 식량과 청수 보급을 10년 동안 충분히 해준다면 은 백만 냥으로 쳐주겠소.”

“아! 식량과 물 보급은 당연히 저희들이 해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은 백만 냥이라면 과도하게 많습니다.”

“좋소. 그걸로 합시다. 사양할 필요 없소.”

두아르테가 벌떡 일어나 최대한의 예를 갖춰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매번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너무 송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동 두아르테는 우리 고산국의 친구이니 과도한 예를 표하지 않아도 좋소. 해적들을 때려잡을 때 잘 협조합시다.”

두아르테와 포르투갈 상인들이 더욱 감격했다. 인도양에서 활동하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해적선을 잡으려면 포르투갈의 상선이나 군함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해적선 탐색은 포르투갈에 맡기고 때려잡는 역할을 고산국 전선에 맡길 계획이었다.

콩을 재배하기 어려운 추운 지역만 아니라면 장기 원정을 가서도 전선의 연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때는 바이오디젤 연료가 석유보다 나았다. 인도나 동남아시아에도 땅콩이나 콩이 많이 생산되므로 원료를 압착해서 연료를 생산해 전선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과 이야기가 잘 되자 필리핀 부총독이 다급하게 나섰다. 포르투갈만 이익을 보는 것은 눈 뜨고 지켜볼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전하! 말씀드리기 민망하오나 에스파냐는 사실 국가부도 사태 직전입니다.”

“그거 안 됐구려. 이번 교역에서 구매한 상품으로 유럽에서 판매하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요.”

“네덜란드와의 전쟁 등 이곳저곳에서 워낙 크게 일을 벌여놨고 조건이 나쁜 채무를 져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보물선을 노리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적들도 큰 문제입니다.”

동화책에서나 나올 만한 보물선과 보물섬은 멀리 있지 않았다. 고산국 아리수 하구에 정박하고 있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선들이 바로 보물선이었다. 해적이 보물선을 약탈해 얻은 보물을 어느 섬에 숨겨 놓으면 그곳이 바로 보물섬이 된다.

상선에 금은보석 대신 향신료와 도자기를 가득 실었더라도 그 화물을 약탈해 유럽에 돌아가서 팔면 큰돈이 되었다. 태평양이나 카리브 해에 진입한 영국과 네덜란드 해적이 집요하게 노리는 목표가 이런 보물선이었다.

“카리브 해는 그렇더라도 그 해적들이 태평양으로는 못 들어오게 해야 할 텐데 말이오.”

“맞습니다. 어쨌든 전하! 저희들도 이 상품을 구입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자금을 동원할 수 없으니 저번처럼 영구 조차지를 넘겨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바기오를 기준으로 그 동쪽과 북쪽 영토라면 은 백만 냥의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바기오처럼 은광이나 금광이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이민호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리고 급한 쪽은 에스파냐라서 일단 튕기고 봤다.

“미안하지만 아시다시피 고산국은 인구가 워낙 적어서 영토 확장을 자제하고 있어요. 그리고 바기오 북쪽이나 동쪽 지역은 요즘 반란이 자주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괜히 반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맞습니다, 전하. 그 지역은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좀 시끄럽습니다. 술탄이나 라자 같은 토후들이 신부들의 전도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산국에는 국교가 따로 정해지지 않았으니 그 지역이 고산국 영토로 들어간다면 토후들이 환영할 것 같습니다.”

“토후들이 버티고 있으면 그 땅을 얻더라도 고산국이 실제로 지배하기 어렵겠군요. 반란을 진압할 군사력에 여유가 없으니 당분간 기존 토후들이 알아서 지배하도록 방치해야겠소. 마닐라 총독부에서 잠시 양해해줄 수 있겠소?”

“당연합니다!”

“좋소. 에스파냐는 좋은 고객이니 그렇게 합시다.”

어떻게 보면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반란으로 골치 아픈 지역을 고산국에 떠넘긴 것일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야금야금 필리핀을 집어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영구 조차지란 길게 보면 결국 영토로 확정되기 마련이라 이민호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민호는 에스파냐가 국가 부도가 나서 채무 불이행 단계에 접어들기 전에 이런 식으로 북미 대륙을 싸게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조약을 맺어 북미 대륙도 명목상 에스파냐의 영토였지만 언제든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에스파냐에서 아직 탐사도 제대로 못했으니 영토라고 떳떳이 주장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에스파냐에게서 북미 대륙을 구입하더라도 고산국의 영유권을 유럽 각국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유럽 최강국인 에스파냐와 군사적으로 대립할 가능성은 확 줄어든다는 장점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영토 확장을 꺼리는 고산국에게 괜히 부담을 안겨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촛불을 바꿔 끼우는 하인이 나타나지 않는군요. 불안합니다.”

상인들이 고개를 들어 집무실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나 갖가지 색을 뿌리고 있는 샹들리에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촛불이 보이지 않았다. 등 안에 촛불이 들어있지도 않았고, 등이 공기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밀폐된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집무실은 창문을 넓게 만들어 자연채광이 충분히 되는 곳이었다. 해달 모피와 보석이 더 화려하게 보이도록 일부러 샹들리에를 켜 놓았다.

“혹시 명나라에서 보물 취급을 받는다는 전설의 야명주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전기를 쓰고 있소.”

“전기라면, 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전기나 번개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고 나일 강의 전기 물고기 이야기는 예전부터 유명합니다. 바로 그 전기를 조명에 사용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우연히 전기를 생산하는 물질을 발견해서 사용하고 있소. 더 이상은 국가기밀이니까 묻지 말아주시오.”

“과연 고산국은 대단합니다.”

보석거래과 향신료, 진주를 끝으로 교역이 끝났다. 통 크게 100만 냥씩 베풀었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이익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원가는 별로 안 들어갔다.

이민호는 저녁에 두 나라 상인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궁정 무도회가 아직 유행하지 않는 시기라서 몸치에 가까운 이민호에게는 다행이었다.

상석에 앉은 이민호 좌우에 주상아 공주와 아라 공주가 온몸에 커다란 인조 보석을 주렁주렁 단 채 유럽식 드레스를 차려입고 앉았다. 마닐라에서 온 자작과 남작, 그리고 마카오에서 온 두아르테와 다른 상인들이 순서에 따라 앉고, 예국 참판을 비롯한 고산국의 고위 관료들도 참석했다.

“주 공주님은 언제나 아름다우십니다.”

“반가워요, 자작님. 자작님도 건강해 보이셔서 저도 기뻐요. 혹시 비올레타 양은 잘 지내시나요?”

“비올레타 양도 공주님을 그리워하신답니다. 그래서 공주님께 드릴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너무 고마워요, 자작님.”

편지를 받아들며 활짝 웃는 주상아를 보고 이민호도 빙긋 웃었다. 주상아 공주가 의외로 사교성이 좋아 다른 후궁들과도 잘 어울리고 아라 공주가 적응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처음에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졌던 주상아가 아니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까 평소 사이가 별로 안 좋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었지만 영국과 네덜란드를 적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종교적으로 지나치게 열광적이라는 점에서는 이민호가 약간 거부감을 느꼈다.

이민호는 포르투갈 상인들과는 인도양 해적 토벌을, 에스파냐 상인들과는 술루해적 토벌을 주제로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활동하는 바다는 다르지만 해적이 당면 문제인 점도 두 나라가 같았다.

외국 상인들이 묵는 객사에는 일부러 전기 배전공사를 하지 않았다. 상인들이 전기등을 뜯어볼 게 빤하기 때문이다.

밤에 아리수 강변 전봇대에 기어 올라간 에스파냐 상인이 온몸이 시커멓게 탄 채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보고를 다음 날 아침에 받은 이민호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고압 전선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 작품 후기 ============================

늦게라도 간신히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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