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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55화 (204/1,000)

00255  32. 뜨거운 바다  =========================================================================

원정함대가 아리수 강을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던 아라 공주가 고개를 들어 이민호를 바라보았다. 후궁들에게 다정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은 이민호가 끌어안자 아라 공주가 자연스럽게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꺼운 옷을 입었을 때와 달리 피부 접촉이 많아져서 이민호가 속으로 살짝 긴장했다.

“전하! 학질은 지역마다 증상이 달라요. 더운 지역일수록 위험해요.”

“그렇소. 남쪽 바다는 위험하니 아라 공주는 이번에 가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소.”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분인 전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가시는데 어떻게 저만 편안히 궁궐에 남아있겠어요? 저는 세계 모든 나라의 나루터와 다리 역할을 맡길 원하는 유구국 출신이랍니다. 앞으로 전하께서는 궁궐에 계시면서 나라의 중심을 잡아주시고 외국과의 교역은 제게 맡겨주세요.”

예쁜 공주가 예쁜 소리만 골라서 했다. 만국진량(萬國津梁)을 목표로 하는 유구국 출신으로서 귀한 신분임에도 아라 공주는 여덟 살 때부터 섬라와 안남, 필리핀과 브루나이 등을 배를 타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2년 전에는 고산국에도 방문해서 아라 공주가 먼발치에서 이민호를 본 적이 있다는데 이민호는 기억에 없었다.

교역에 특화된 인재라지만 아라 공주는 너무 어리고 또한 귀한 신분의 여자였다. 이민호는 귀인 신분인 아라 공주를 밖으로 내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 원정을 앞두고 모기퇴치제를 준비했더라도 말라리아 예방약이 아직 개발된 것이 아니라서 언제든 감염될 위험이 있었다. 공주가 말라리아에 걸려 덜컥 죽어버리면 국가적 손실이었다.

“공주는 궁궐에서 전체 교역을 관장하고 필리핀이나 그 남쪽 나라에는 공주의 시녀를 대리인으로 보내는 방법도 있을 것이오.”

아야, 아마, 아나 중에서 아야가 상인 가문의 딸이라지만 유구국 귀족 가문들은 기본적으로 상업에 능통했다. 셋 중 누구를 보내도 충분히 일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녀들은 교역까지만 가능해요. 외교는 왕가의 기술이랍니다. 브루나이와 마닐라, 어쩌면 술루술탄국에서도 제가 어느 정도 역할을 맡을 수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이번 한 번만 함께 갑시다. 다음부터는 공주는 궁궐에 있어야 하오. 나는 소중한 공주가 배를 타고 나가는 것을 가슴이 아파서 차마 볼 수가 없소.”

“전하!”

공주의 눈에 하트가 맺힌 것 같았다. 이민호는 아라 공주를 귀여운 여동생이나 조카 정도로 보고 싶은데 앞으로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령이오~”

원정함대가 아리수 강을 미처 빠져 나가기도 전에 강 하구 요새에서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보고했다. 에스파냐 범선 세 척이 강 하구 선착장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포르투갈 상선들은 이미 도착해서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었다. 강 하구 선착장이 점점 커져서 창고 건물만 해도 수십 채로 늘어났다.

오후에 마차를 타고 에스파냐 상인들이 궁궐 앞에 도착했다. 이틀 전부터 객관에 머무르고 있는 마카오 상인들도 궁궐로 불러들였다. 올해 봄의 무역을 해야 할 때였다.

“국왕전하께서는 갈수록 신수가 훤해지십니다.”

“반갑소. 동 두아르테는 동양에 오래 계시더니 동양식 아부가 늘었구려.”

이민호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을 알현실도 아니고 집무실로 바로 불렀다. 이 자리에는 아라 공주가 배석했고, 오늘을 위해 며칠 밤을 새운 아마가 그 포동포동하던 살이 쪽 빠진 채 서 있었다.

마카오 상인들에 이어 필리핀 부총독 돈 후안 마르티네스 로페스 데 보르히아 자작과 돈 페드로 란조르 데 고이티 남작도 이민호에게 인사를 올렸다. 고이티 남작이 범선 세 척을 이끌고 멕시코로 갈 예정이고 보르히아 자작은 원정군의 전선에 타고 다시 필리핀에 가기로 사전에 약속했다.

“돈 페드로, 돈 후안! 어서 오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아라 공주님께도 하례 드립니다.”

“고마워요, 자작. 그리고 남작.”

유구국 공주가 고산국 국왕에게 시집갔다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졌는지 상인들이 결혼 축하 선물을 가져와 아라 공주에게 바쳤다. 고산국과 유구국 두 나라가 혈연으로 이어졌다는 소식은 남방 모든 나라의 상계에 중요한 정보로 받아들여졌다.

늘 하던 대로 옥 도자기와 차, 고산국산 고급 비단에 이어 에스파냐에서 추가로 주문한 나전칠기까지 거래를 마쳤다. 이 품목들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선들이 유럽에 가져가기만 하면 최소 열 배 이상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새로운 차 품종 몇 가지가 새로 생산돼서 상인들과 함께 시음을 하고 나서 가격과 판매물량을 결정했다.

모피도 지난번 거래량보다 두 배 이상 많은 20만 장 이상을 넘겨줘서 두 나라 상인들을 흡족하게 해주었다. 상인들은 모피를 그 이상 소화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러시아가 동방으로 진출하는 날이 조금씩 늦춰지는 것 같아 이민호도 흐뭇했다.

남만 상인들은 고산국과 거래하면서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고산국에서 판매하는 고급 상품에 대한 유럽 귀족들의 구매의욕이 높은 것도 있지만, 향신료 가격을 높게 유지함으로써 얻는 이익도 컸다. 같은 수의 배를 동원한다면 고산국 상품을 적재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향신료를 적게 사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유럽에서 향신료 가격을 폭락시키지 않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전하! 헤헤!”

“아직 거래하지 않은 품목이 있소?”

보르히아 부총독이 말을 꺼내자 이민호가 짐짓 모르는 척했다. 두 나라 상인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기다렸다.

“저번에 보여주셨던 해달 가죽이 있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넘겨드린 것이 아직 유럽에 도착하지 않았을 텐데요?”

작년에 교역할 때 해달 가죽 몇 장을 주면서 유럽의 모피 상인들에게 해달 모피의 가치를 물어보라고 했었다. 이것을 가지고 마닐라와 마카오에서 상인들에게 품평을 시켜본 모양이었다. 이민호는 해달 모피 가격을 검은담비의 열 배 이상을 불렀는데 서양 상인들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저희들도 상인이니 상품의 가치를 압니다. 그리고 이번 봄에 수백 장을 준비해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번 상반기에 멕시코로 배를 보내야 겨울 전에 상품이 유럽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아! 해달 가죽은 좀 가져왔소. 아라 공주!”

문이 열리면서 지난번처럼 진한 화장을 한 백인 시녀들이 등장하면서 느닷없이 패션쇼가 시작됐다. 이민호는 아마가 확실히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백인 시녀들은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원색의 비단옷 위에 검은색 또는 은색의 해달 모피코트를 걸치고 나타나 집무실을 한 바퀴 돌고 차례대로 나갔다. 진주 팔찌와 큼직한 인조 보석이 박힌 목걸이로 장식한 백인 시녀들의 등장에 상인들의 턱이 내려앉았다.

밝은 실내조명을 받은 사파이어가 여섯 방향으로 꼬리를 뻗어 별 모양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 상인들은 거의 넋이 나갔다. 늘씬하고도 풍염한 파티마가 눈을 찡긋하고 돌아서 나가자 상인들은 노출된 파티마의 허벅지만 바라봤다.

“저 아름다운 여성분들이 몸에 걸친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실로 어마어마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고산국만큼 부유한 나라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고산국이 남방 원정을 떠나게 됐다. 마카오는 군사력이 없다시피 하지만 마닐라는 술루해적이나 명나라 거주민들과 싸우면서 꾸준히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어서 불안했다. 해적을 제압해야 할 필요도 있고,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에스파냐에게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인조 보석은 서양 상인들에게 팔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만 색깔을 바꾼 자연산 보석을 팔 생각은 있었다.

“보석 말고 모피에 주목해주시오. 자! 여기 견본이 있소.”

빛나고 탐스럽고 부드러운 해달 모피를 만지면서 상인들의 눈이 탐욕으로 가득 찼다. 유럽에서도 확실하게 인기를 끌 만큼 최고의 모피가 눈앞에 있었다.

“역시 품질은 비교할 모피가 없을 정도로 단연 세계 최고입니다. 가격이 문제입니다만, 저번에 전하께서 검은담비의 열 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격에 사겠습니다.”

“열 배 이상이라고 했지 열 배라고 하지 않았소.”

실제로 18세기 해달 모피는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만든 원동력으로 작용한 검은담비 모피보다 20~30배의 가치로 거래됐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북대서양에 몰려들어 한때 매년 수만 마리씩 잡아서 얼마 못 가 씨가 말랐다. 해달 모피가 1000달러 이상으로 가격이 치솟아 오른 것은 해달이 멸종 위기에 들어서고 난 20세기 초반의 일이었고, 1920년대에는 3천 달러까지 올랐다.

그러나 에스파냐 상인들은 매년 여러 척의 갈레온이 태평양을 횡단하면서도 해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연안에도 남방해달이 산다. 하지만 에스파냐 상인들은 따뜻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해달이 지금 손 안에 있는 북방해달과 근연종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해달 모피가 최고급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야 유럽에 판매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상인이니 이윤이 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전하. 그냥 북경 상인들에게 넘기시지요. 우호를 위해 남만 상인들에게 물량을 배분해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라 공주가 살짝 거들었다. 공주는 일부러 중국어로 말했고, 상인들 중에서 중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유럽보다 중국에서 먼저 해달 모피의 가치를 알아보고 유럽 배가 천진 항에 들어올 때마다 미친 듯이 사들였다. 베링 탐험대가 청나라에 해달 모피를 판 다음 유럽 전역에 소문이 나서 수백 척의 배가 해달 사냥을 위해 북태평양에 몰려들었는데 처음에는 가깝고 높은 판매가가 형성된 북경에서 팔았다.

100년 동안 무차별로 남획하자 해달은 멸종 위기에 처해 더 이상 구할 수 없어지면서 물개나 검은 여우 등 다른 동물 모피로 유행이 옮아갔다. 나중에는 검은 여우를 은여우로 품종 개량해 사육하는 방향으로 전환했고, 최종적으로는 밍크를 사육하게 되었다.

“갈색 큰 해달 가죽을 기준으로 한 장 당 황금 100냥에 사겠습니다! 어떻게 모피코트를 만들어야 하는지 알았으니 유럽 귀족사회에서 크게 유행할 것입니다.”

“웬만한 귀족이 살 수 있을지 모르겠소.”

포르투갈 상인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일행 중에 화가가 있어서 아주 짧은 시간 보여준 모피 의상을 모조리 스케치북에 담은 것을 보고 이민호는 조금 놀랐다. 초기 한두 번은 완제품으로 더 비싸게 팔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 시대에는 아직 디자인이 보호받을 수 없었다.

에스파냐 상인들이 포르투갈 상인들을 노려보다가 결국 항복했다. 그래서 공평하게 400장씩 800장을 판매했다. 판매대금으로 황금 10만 냥이 조금 넘게 들어왔다. 갈색보다 검은색이 더 비쌌고 소수의 은색 모피가 가장 높은 가격을 형성했다. 실제 역사처럼 해달 모피는 ‘부드러운 황금’이 되었다.

농기구 몇 개와 그물 몇 장으로 바꾼 모피가 쌀 100만 섬 이상을 살 수 있는 황금으로 변했다. 어떻게 보면 해달 모피 수십 장으로 옷을 지어 입고 담요로 덮고 자는 쿠릴 열도, 얼음 섬의 원주민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일 수도 있었다.

남만 상인들의 요청으로 자연산 루비와 사파이어도 판매했다. 작년에 생산한 인공 보석은 비중이나 굴절률에서 천연 보석과 아주 약간 차이가 나서 공업용 또는 궁궐 안에서만 사용하기로 했다.

이번에 판매할 상품은 자연산 보석이긴 한데 인공적인 가공을 거친 상품이었다. 명나라나 버마에서 사들인 저급품을 가열처리법으로 가공해 색이 연한 루비를 진홍색으로 바꾸고 사파이어는 짙은 파란색으로 변색시켰다. 이런 작은 개량만으로도 가격은 단번에 몇 배로 뛰었다.

“이런! 잔액이 부족합니다.”

보석을 적은 양만 사고 나가떨어진 포르투갈 상인들은 한숨만 쉬고 있고, 계속 구매하던 에스파냐 상인들이 몹시 당황했다.

그 동안 남만 상인들은 교역 후에 남는 은을 고산국에 다 넘기는 대신 금으로 교환해 상선에 챙겨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는 은이 없었다. 에스파냐 상선이 멕시코에서 은 200톤을 갖고 온다면 530만 냥 정도였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바닥났다. 돈이 없어 사지 못한 진한 색깔의 루비와 사파이어를 보면서 상인들이 침을 흘렸다.

============================ 작품 후기 ============================

한 편 더 못 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기다리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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