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3 32. 뜨거운 바다 =========================================================================
매춘에 대한 남성들의 수요는 적게나마 있었다. 그러나 고사리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한 고산국에서는 여자들이 충분히 먹고 살기 때문에 공급이 극히 적었다. 몸이 뜨거운 여자가 간혹 있더라도 이웃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매춘부로 나설 이유가 별로 없었고, 그래서 매춘시장이 아예 형성되지 못했다. 반대로 사회풍조가 음란하다거나 여자들이 헤프다는 비판이 많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소한 결혼 적령기를 앞둔 처녀들은 조선이나 일본보다 훨씬 단정한 편이었다. 조선에서는 결혼 전 처녀성을 비교적 중시하는 편이었고 일본에서는 일부 귀족이 아니라면 크게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흑인 병사들이 일본 출신 신부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쫓아낸 사건이 몇 번 있었다. 그런 이혼청구 사건을 다룬 재판이 열려서 크게 소문나는 바람에 바람기가 있는 여자라도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게 되었다. 이민호가 므부투에게 물어보니까 신혼 초야의 처녀혈에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아프리카 부족이 많다고 설명했다.
참고로 고산국에서 성인이 되는 나이는 주변 다른 나라들, 특히 조선처럼 남녀 공히 16세였다. 이 시대 동양 3국에서 결혼은 그 전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고산국에서는 성인 나이를 결혼 가능 연령과 연계시켰다. 그리고 부모의 뜻보다는 당사자의 의지를 우선시켰다. 부모들은 섭섭해 하고 젊은이들은 만세를 불렀다.
“형법상 강간죄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게 말이 되오? 여성도 강간죄의 정범이나 공범이 되어야 그런 짓을 못할 것이오. 그리고 강간죄의 피해자로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성도 들어가야 하오.”
“예? 예. 지당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을 폭력으로 억압하려는 자들이 있었고, 이는 폭행이나 강간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동성간 성폭행도 가해자가 동성애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상대방을 폭력으로 지배했다는 증표로 삼기 위해서, 혹은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써 성폭행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어느 사회든 남성 또는 아동 남성에 대한 성폭행이 일정 비율로 발생한다. 그래서 이민호는 그런 자들을 성추행보다 선고 형량이 훨씬 높은 강간죄로 다스리기로 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을 구별하지 않으면 간단하겠지만 이는 형법 개정이 필요할 것이오. 법관들이 연구해서 형법 개정안을 빠른 시일 내에 국무회의에 제출하시오.”
사실 이민호가 앞에 든 사례에서 피해자 여자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처했을 때 정상적인 남성이라면 충분히 상황을 알아챌 수 있다. 남성과 여성 모두 강간죄의 공동정범이 되는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여성이 단독으로 강간죄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협동이나 공모관계 등에 의해서만 여성이 공범으로 인정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법관들은 연구나 협의가 왜 그리 느려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외국의 법률을 연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요즘 고산국의 법관들은 머리를 싸매며 로마법과 게르만법을 비롯한 유럽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배운 대명률과 다른 점이 많으나 유럽 법률에서 좋은 점이 꽤 있어서 법 규정 일부를 차용하는 단계였다.
그러나 로마법과 게르만법 두 가지만 뒤섞어도 통일성이 결여되는 문제가 생기는데 여기에 대명률까지 섞이니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다. 이것은 차차 시간이 가면서 해결할 문제였다.
이민호는 처음에 유럽 어느 국가의 법률을 통째로 베끼고 싶어서 번역문을 살펴봤다가 기겁했다. 아직 이 시기에는 유럽에서도 야만적인 법률 조항이 많아 근대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법률에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이민호가 근대 법률의 선구자가 되게 생겼다.
“판결을 내립시다. 판결은 사형, 집행방법은 참형이오.”
이민호는 몹시 불쾌했다. 극악한 범죄자라도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 매일 같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판사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판사들이 법정에서 보는 사람들이 아주 극악무도한 범죄자나 서로 악다구니 쓰는 민사사건 당사자들이라 이들을 매일같이 상대하려면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을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인간들이 드물지만 있었고, 오늘도 이렇게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민호는 끔찍했다. 그래서 판사들을 위해, 판사들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핑계로 월급을 조금 올려줄까 생각했다.
“동의합니다. 거열형이나 능지처참형이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전하. 하오면 피해자의 어미는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수사하면 어미는 공범이 되어 참형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죽어 마땅하나 피해 아동이 홀로 남아 고아가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미도 당연히 공범으로 다스려야죠. 최대 사형이 가능한 범죄로서 엄밀하게 수사하라고 하시오. 그리고 어미가 저 정도면 차라리 고아원이 낫겠소. 요즘 고아원에 폭행사건은 없겠죠?”
이 시대에는 아무리 악질이라도 부모에게서 아이를 빼앗는 일에 동의하지 않는 여론이 크다는 사실은 이민호도 알고 있었다. 아이는 미우나 고우나 부모 밑에서 커야 한다는 유교 의식이 강했으나 이민호는 용납하지 않았다. 사이코패스 부모 밑에서 학대받은 아이는 커서 정신적 후유증이 크게 남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고아원 직원 두 명을 탄광으로 보낸 다음부터 직원에 의한 원생 폭행이나 비리가 당분간이겠지만 사라졌습니다. 고아원에서 근무하는 직원을 늘리고 포도관이 하루에 두 번 방문해서 원생 간의 폭력도 많이 줄었습니다.”
“직원들 퇴근한 밤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모르죠.”
꼬마들끼리 모인 고아원도 사회라고 서열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아무리 갈 곳 없는 어린아이들이 생활하는 곳이라지만 폭력이 일상화된 공간을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범죄자들을 걸핏하면 탄광으로 보내니 마치 북한에서 정치범들을 아오지 탄광에 보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고산국이 문명국이라고 자부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
휴정 시간이 끝나고 판결을 내리는 시간이었다. 결국 피고에게는 사형이 언도되고 집행방법은 참형이 선고됐다. 국왕호위대가 피고를 가두고 죄명과 선고형량이 크게 적힌 함거를 큰길을 통해 천천히 끌고 가다가 해당 포도서에 넘기면, 그곳에서 참형을 집행하고 5일간 효수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피고는 왜 사형을 당해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면서 재판정 밖으로 끌려 나갔다. 저런 저능아보다는 법에 걸리지 않고 나쁜 짓을 반복해 남들을 괴롭히길 즐기는 음험한 자들이 훨씬 더 문제였다.
“피해자의 어미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를 신청하라고 그 지역 포도서에 통보하시오. 아까 대화한 내용을 간추려 그 포도서에 근무하는 검사에게 설명해주시오.”
“예. 소급해서 처벌하는 것이 아니니 기소에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잘 설명하겠습니다.”
고산국에서는 현대 재판과정과 전혀 다르게 판사가 적당히 수사과정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민호는 모르는 척 눈 감고 넘어갔다. 포도서 근무자들이 법에 대해 다들 까막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형방들이 포도서 직원들에게 열심히 법학을 가르치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지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최고법원 경비원들에 의해 간첩죄를 지은 피고가 재판정에 입장했다. 그리고 일본어 통역과 국선 변호사도 함께 들어왔다.
피고는 사쓰마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불법입국과 문서 절도로 인해 구속됐었다. 비자도 여권도 없는 시대라서 불법입국은 죄명만 규정돼 있지 큰 벌을 받을 중죄는 아니었다. 인구가 적은 고산국 입장에서 이민자는 불법이든 합법이든 언제나 환영했다.
그러나 피고는 아리수 항에 잠입한 다음 조선에서 막 도착한 이민자에게서 서류를 훔쳐 관원에게 제출하고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하려고 시도하다가 잡혔다. 그냥 작은 어선 타고 고산국 해안에 도착했다고 말했으면 환영 받았을 텐데, 입국 과정이 수상해 정밀 조사를 받게 되면서 사쓰마의 큰 영주가 보낸 간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하? 체구는 작지만 힘은 잘 쓰게 생겼습니다.”
“휴우~ 탄광에 인력이 부족하더라도 법대로 해야겠지요.”
지금은 전시형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전쟁이나 적국과 관련된 범죄는 가중 처벌되는 시기였다.
평시라면 몰라도 전시에 특정한 목적을 갖고 들어온 간첩은 존재 자체로 위험했다. 훈련을 잘 받은 간첩의 경우 차꼬 정도는 간단히 풀고 탄광에서 탈출할 수 있으니 미리 제거해 화근을 뿌리 뽑기로 했다.
간첩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집행방법은 참형이었다. 목은 이민자들이 처음 도착하는 아리수 항구에 걸렸다.
최고 재판소에서 나와 점심은 근처 신병 훈련소에 가서 먹었다. 국왕 신분인 이민호도 뷔페식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밥과 반찬을 떠 담아 식탁에서 훈련병들과 함께 먹었다. 훈련병들이 바짝 얼어서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높은 사람으로서 이런 식으로 민폐를 한 번 끼쳐보는 것이 예전부터 이민호의 소원이었다.
식량이 풍부한 지역이라 음식은 아주 잘 나왔다. 예고도 없이 훈련소에 들이닥쳤으므로 국왕이 온다고 음식이 오늘만 특별히 잘 나온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은 평소에도 잘 먹었고, 간식도 허락 없이 먹을 수 있게 식당에 준비돼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민간인이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고산국 생활 기간이 짧은 훈련병들은 밥을 아주 많이, 그리고 반찬은 무지막지하게 짜게 조리한 생선 한 마리 정도만 먹는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들였던 습관이 고산국에 와서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거주 기간이 길어지면 밥은 적게, 반찬은 많이 먹게 될 것이다.
“훈련병들은 건의사항이 있으면 이 기회에 말해보게.”
이민호가 어서 해보라고 권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신병들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어느 훈련병이 옆 자리의 훈련병 허리를 쿡쿡 찔렀다. 그 훈련병이 기겁하다가 이민호가 쳐다보자 얼른 차렷 자세를 취했다.
“오! 평소에 불만이 있었군 그래. 허심탄회하게 털어놔보게.”
“예, 예. 전하. 불만은 아니고 의문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할 게 뭐 있겠나? 호칭은 빼고. 어서 어명을 받들란 말이야. 말해!”
훈련병은 기합이 잔뜩 들어 있어서 이민호가 강압적으로 말을 시키자 금방 술술 풀었다.
“예! 저는 경기도 남양의 소작농가 출신으로서 왜적이 쳐들어온 작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고산국으로 이민 왔습니다. 올해 드디어 나이가 차서 왜적과 싸우기 위해 입대했습니다.”
“훌륭한 청년이야. 그래서?”
“훈련소에 입소해서 여러 가지 훈련을 받은 것은 좋았습니다. 힘들어도 필요하겠거니 생각해서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관님들이 갖가지 천한 잡일을 시키는 겁니다.”
“잡일? 어떤 일인데?”
혹시 훈련병들에게 사역을 시키나 해서 식탁 주변에 차렷 자세로 선 훈련소장과 교관들에게 눈을 돌렸다. 교관들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저는 매달 은화 석 냥을 받는 비싼 몸입니다. 그런 저에게 벽돌 만들기라든가 참호 파기, 물 떠오기, 토끼 가죽 벗기기 같은 허드렛일을 시켰습니다. 그런 일은 치중병이나 종인, 혹은 보인들이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산국 군대에는 보인이 없어. 일을 대신해 줄 종인도 없어. 혼자 다해야 해.”
“두세 사람 몫을 하는 군대였습니까? 그렇다면 충분히 은화 석 냥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노동 시켜서 미안하다. 그런데 훈련소에 필요한 건물 신축 공사 같은 것은 장인이나 노무자들을 고용해서 하잖아? 너희들이 한 것은 노동이 아니라 그런 사소한 일들을 제대로 배우는 거야. 내가 그 과정을 만들었는데, 모두 전투나 생존에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또 있어.”
“무엇입니까, 전하? 앗! 죄송합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훈련병은 고산국의 실체를 깨닫고 많이 실망한 것 같았다.
“너희들이 만든 건 진흙 벽돌도 아니고 구운 벽돌도 아니야. 시멘트 벽돌이지. 진흙 벽돌은 싸고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런 벽돌로 벽을 쌓으면 습기가 차서 금방 무너져. 단단하게 구운 벽돌을 만들려면 땔감이 많이 들어가지. 시멘트 벽돌은 몇 가지 재료를 섞어서 굽지 않고도 햇빛에 말린 것만으로 사용할 수 있어. 조선에서 이런 걸 봤나?”
“못 봤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조선에 있었다면 알지 못했을 여러 가지를 보고 훈련소에서 배우고 있어. 어떻게 보면 군대보다는 사회에서 더 필요한 일들이야. 너희들이 휴가 갔을 때나 전역했을 때 지금 보고 배운 것을 잘 활용하면 너희 마을을 더 살기 좋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거야. 시멘트 벽돌이 얼마나 하는지 알지?”
“예! 나쁜 놈들이 지나치게 많이 남겨 먹었습니다.”
그러나 벽돌 값이란 빤했다. 훈련병은 농민 출신이라 장사꾼이 남기는 아주 적은 이득이라도 부당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수송하고 판매하고 세금 내고 하다 보면 가격이 올라가게 돼 있어. 그런데 너희들이 직접 벽돌을 만들면 어떨까?”
“아! 아주 싸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거야! 훈련소에서 배우는 것은 적을 죽이는 전투 기술만이 아니야. 생존기술도 배우고, 생산기술도 조금씩 배우고 있어. 너희들은 부모 세대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그것을 활용해 더 편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을 기억해라.”
“예!”
군대가 사회에 비해 엘리트집단이라서 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20세기 중후반 개발도상국 군대에나 적용될 낡은 이론이었다. 그러나 고산국의 현실은 1960년대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못했다. 이민호는 병사들이 군에서 제대하더라도 군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해 직업을 갖거나 지역 사회에 기여하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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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제목 바꿔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