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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49화 (198/1,000)

00249  31. 혼슈 봉쇄  =========================================================================

밀물이 서서히 들어와 강의 수위를 점점 높였다. 가끔 강바닥을 긁으며 움직인 전선들은 이제 거의 요도가와 강 하구에 도달했다. 왜군이 사거리에 들어올 때마다 함포를 발사했으나, 아직 보병총 사거리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민호는 민희, 민영과 함께 말을 타고 천천히 배를 따라갔다. 물론 여차하면 전선에 탈 생각이었다. 세 사람을 말과 함께 태우기 위해 단정 세 척이 제방 가까운 물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동안 단정들이 열심히 보급선과 전선을 오가며 포탄을 실어 날랐다. 탐망선 두 척이 빠르게 포탄을 수송한 덕에 탄약부족에서 벗어나서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적 수군이 대규모로 공격해 와도 걱정이 없었다. 물론 지상으로부터의 위협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기마병을 회수해야 해서 전선들은 요도가와 강 하구에 남아있었다. 서쪽으로 갔던 감동이 돌아왔고, 전선 5척이 북쪽 제방에 가까이 대고 문을 열자 기마병들이 여러 전선으로 나뉘어 올라탔다. 동쪽으로 갔던 감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감불은 뭐하는 거야?”

“이제 와요. 그런데 뒤에 꼬리를 잔뜩 달았어요.”

감불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왜군 보병 1만여 명이 감불이 지휘하는 기마병들을 죽자 살자 뒤쫓고 있었다. 무슨 보병이 얼마나 빠르게 달려오는지 마치 기마병이 탄 말의 꼬리를 잡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 기세가 너무 무서워서 이민호가 얼른 단정들을 불렀다.

말을 끌어 단정에 태운 이민호는 민영이 백마를 살살 달래서 다른 단정에 태우는 것을 지켜봤다. 물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미루어 역시 훈련이 덜 된 말이었으나 민영은 말을 잘 다뤘다.

이민호가 기함의 갑판에 올랐을 때 감불이 기마병 250명을 데리고 강 하구로 달려오고 있었다. 함포가 기마병을 추격하는 왜군을 향해 불을 뿜고 갑판에 배치된 해병들이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왜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여전히 기마병을 뒤쫓았다.

기마병을 수용하기 위해 전선 5척이 남쪽 제방에 접근했다. 그 사이에도 계속 몰려오는 왜병들을 향해 전선에서 포격과 총격을 퍼부었다. 외륜선에서도 지원 사격을 했으나 왜병들은 포화를 뒤집어쓰면서도 계속해서 몰려왔다.

“무섭다. 저것들 좀비, 아니 강시 아니야?”

감불의 기마병을 추격하는 왜군은 큰 인명피해를 입으면 적당히 물러설 줄 아는 다른 왜군 부대들과 많이 달랐다. 그래서 이민호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감불이 말을 타고 강변 제방 길을 달리더니 뭔가를 두 손으로 잡아 빙빙 돌리다가 전선을 향해 집어던졌다.

“도련님! 받으세요!”

“어? 어?”

이민호와 호위들이 얼떨결에 뭔가 커다란 보따리 같은 것을 받았다. 다시 보니 비쩍 마른 소년이었는데 갑옷만은 화려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이민호가 소년을 일으켜 세우면서 일본어로 물었다.

“넌 뭐냐?”

“무엄하다! 당장 그 손을 놓아라!”

“건방진 놈!”

“아악! 엉덩이 때리면 안 돼!”

이민호가 그 꼬마를 엎어놓고 볼기를 찰지게 때렸다. 왕명명을 때리면서 숙달된 솜씨로 연신 엉덩이를 후려치자 꼬마 장수가 죽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주인님! 소년 무사 엉덩이에서 피가 나요!”

“너무 세게 때렸나? 그럴 리가!”

처음에는 꼬마가 엄살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꼬마 엉덩이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부상을 입고 잡혀온 줄 알고 군의에게 맡겨 치료하도록 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일단 치료는 해놓고 죽여야 했다.

“감불아! 이 꼬마 뭐야?”

이민호가 전선 앞에 기마병들을 벌여 세운 채 버티고 선 감불에게 물었다. 그 사이에 마치 거짓말처럼 왜군의 추격이 멈췄다.

“왜군 후미에 좋은 갑옷을 입은 놈들이 많아서 기습하다가 얼떨결에 잡아왔습니다. 높은 놈인 것 같죠?”

감불의 기마병이 멋도 모르고 왜군의 본진을 쳤던 모양이었다. 역시나 민영이 앞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주인님. 왜군에서 사자가 왔어요. 소년 무사가 영주나 그 후계자인 아들인가 봐요.”

죽자 살자 달려오던 왜군이 전선에서 가해진 총격을 피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화려한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40대의 사무라이가 혼자 말을 타고 왔다. 기세등등한 250명의 기마병들 사이를 지나 전선 앞에서 말을 세운 사무라이가 갑판 위를 향해 외쳤다.

“나는 야마토 국의 주인 히데야스 님의 가신 혼다 토시마사(本多俊政)다. 지금 당장 주군을 내놓지 않으면......”

- 탕!

사무라이는 민희가 쏜 권총에 맞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억울한 표정을 온 얼굴에 드러낸 사무라이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험! 제법 높은 놈 같던데 이야기를 좀 들어보지 그랬어?”

“왜장의 부하 주제에 감히 주인님께 예의를 갖추지 않았어요.”

이럴 때는 민희가 좀 무서웠다. 문관이고 무관이고 은근히 이민호를 무시하는 조선에서는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왜군 쪽에서 사무라이가 또 말을 타고 왔다. 바로 앞에서 사자로 온 무사가 죽는 것을 분명히 봤을 텐데도 30대 후반의 사무라이가 용감하게 나섰다. 그만큼 이 꼬마 무사를 돌려받는 것이 절실하다는 증거였다. 사무라이가 말에서 내린 다음 이민호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고산국 국왕전하! 저는 토도 다카토라라고 하는 일개 사무라이입니다. 국왕전하께서 포로로 잡고 계신 저희 주군은 올해 겨우 열다섯 살에 불과합니다. 건강이 나빠 같은 나이에 비해 몹시 말라서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아직 대를 이을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으니 자비를 베푸셔서 제발 주군을 돌려주십시오.”

“응? 당신은 조선에 건너가서 수군을 지휘하지 않았나? 조정으로부터 사도노카미라는 관직을 받았지?”

“제 이름을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하오나 저는 아직 대마도 이상을 넘어가본 적이 없습니다.”

토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이민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 말을 덧붙였다. 토도 다카토라의 함대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옥포 등 경상도 남해안에서 여러 번 패배했지만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순신에게 여러 번 패하고도 아직 살아남은 것은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이 지휘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명량해전에 대장으로서 참가한 것은 일본 기록에 분명히 드러나지만, 임진년 해전에는 그가 해전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 비쩍 마른 꼬마 다이묘가 그럼 풍신수보야?”

“그렇습니다. 정식으로 도요토미 야마토 추우나곤(大和 中納言) 히데야스 님이십니다.”

이민호가 겐타로에게서 받은 보고서 내용이 헷갈리고 있었다. 일본인 이름은 외우기 어려웠다.

풍신수길의 동복 누나 닛슈(日秀), 본명 토모는 풍신수길의 양자가 되는 히데쓰구(秀次), 히데카쓰(秀勝), 히데야스(秀保) 형제를 낳았다. 풍신수보(豊臣秀保)는 풍신수길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풍신수길의 동생 풍신수장(豊臣秀長),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1591년에 죽자 그의 양자로 입적해서 영지를 상속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치질에 걸려 고생하다가 1595년에 온천에 가는 길에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야마토 국 병력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태합 합하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구나.”

“물론 충성하고 있지만 저희들이 좀 일찍 출발했습니다.”

이민호가 격식을 차려서 남의 주군 관직명에 존칭까지 붙여줬다. 괜히 사소한 호칭 때문에 일이 틀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동쪽에서 온 1만의 군세는 나라의 고리야마 성에서 오전에 출발한 야마토(大和) 국의 병력이었다. 야마토와 기이, 이즈미 3국을 합해 116만 석의 대 다이묘가 동원한 병력치고는 적었으나 이렇게 빨리 온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이유가 있었고, 원정함대가 어제 저녁에 해적 섬을 공격한 탓이었다. 원정함대가 기이오시마를 점령하고 하루 묵을 때 앞바다 마을에서 출발한 전령은 오사카로 가지 않고 다이묘의 거성인 고리야마 성으로 향했다. 이민호는 원정함대가 공격한 곳과 오사카 성을 직선으로 그어서 거리와 시간을 계산했지만, 시골 무사가 태합이나 관백이 아니라 다이묘에게 전령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다.

고리야마 성에서는 새벽부터 병력을 소집해 기이로 출정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남쪽 기이가 아닌 서쪽 오사카에 일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출발할 수 있었다. 풍신수길이 이끈 병력이 교토에서 오사카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덕택에 빨리 갔다면, 이들은 거리가 가까운 것에 더해 미리 병력을 소집해 출전 준비를 갖춘 탓에 가장 먼저 오사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좋다! 네가 용감하니 살려주겠다. 하지만 이놈을 받은 즉시 병력을 이끌고 너희 영지로 돌아가도록! 석방 조건을 수락하겠나? 태합 합하가 너에게 책임을 지워서 벌을 내릴지도 몰라.”

“기쁘게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태합 전하께서 제게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이민호는 포로고 왜군이고 가리지 않고 그냥 쓸어버리려고 했는데 잡힌 놈이 하필 풍신수길의 양자였다. 지금까지 풍신수길의 직속 다이묘들이 조선에서 너무 많이 죽어서 자칫 덕천가강에 비해 열세에 처할 가능성이 있었다. 둘이 싸우게 하려면 적당히 세력 균형을 맞춰주는 편이 좋았다, 라는 것은 핑계였고 조금 전처럼 미친 듯이 공격해 오면 피곤할 것 같고 멍청한 다이묘가 적국에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나아서 풀어주었다.

“전하! 이 꼬마가 치질이 심해서 적당히 치료를 했습니다. 약과 함께 처방전과 치료방법을 한자로 적은 종이도 주었습니다.”

“뭐, 잘했다.”

군의가 풍신수보를 데려왔다. 소년 영주는 엉덩이에 넣은 약이 따가운지 다리를 비비꼬고 있었다. 이민호는 이 당시 치료가 어려운 치질을 완치시켜줄 필요가 있나 생각했다.

그러나 적이든 아군이든 일단 손에 들어온 환자는 무조건 고치고 보는 의사에게 이민호는 뭐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민호는 감불처럼 꼬마를 집어던질 힘도 없었고, 땅바닥에 잘못 떨어지면 죽을까봐 곱게 단정에 태워 보내주었다.

이민호에게 다시 감사 인사를 한 토도 다카토라가 치질에 걸린 어린 주군을 조심스레 말에 태우고 고산국의 기마병들 사이를 지나갔다. 꼬마 다이묘가 기마병들에게서 벗어나자 기세등등해져서 가신을 비난했다.

“다카토라 너는 내가 잡혔는데도 두 번째로 왔으니 충성심이 저기 죽어 나자빠진 토시마사보다 못해! 그래서 감봉이야! 영지 1만 석 내놔!”

“예, 주군. 저 같은 불충한 가신에게 지당하신 분부이십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처분을 내려도 토도 다카토라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히데야스는 맏형인 관백 히데쓰구하고 별 차이가 없는 잔혹하고 이기적인 성품이었지만 토도 다카토라는 전 주군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가문에서 대를 이어 섬기는 가신으로서 주군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족벌체제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토도 다카토라는 섬기는 주인을 여러 번 바꿨다지만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일했다. 일본에서도 수백 년 동안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능력이나 충성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토도 다카토라가 약속을 지켜 8천 정도로 줄어든 야마토 국의 군세가 동쪽으로 이동했다. 함포와 총, 그리고 본진을 급습해 다이묘를 납치하는 고산국 기마병에 겁을 먹고 물러섰을 수도 있었다.

- 쾅!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오는 병력은 여전히 많았고, 그 사이에 더 불어났다. 불타는 오사카 시내에 10만 이상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교토 방향에서 온 병력은 오사카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지 포격을 피해 제방 뒤나 언덕을 돌아서 차근차근 강 하구로 접근해왔다. 그래서 함포를 맡은 수병들이 적이 나타날 때마다 포구를 돌려 급히 발사했으나, 왜병들은 엄폐물을 잘 활용해 피해가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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