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4 31. 혼슈 봉쇄 =========================================================================
가마쿠라에서 서쪽 20km 떨어진 오다와라(小田原)는 1590년 풍신수길이 토벌하면서 천하통일의 마침표를 찍은 상징적인 곳이었다. 후대에 고호조 가문(後北条氏)으로 불리는 호조 가문의 당주 호조 우지나오는 1591년 말에 천연두로 죽었다. 현재는 덕천가강이 호조 가의 영지를 이어받아 옛 중심지인 오다와라가 아니라 에도로 본거지를 이전했다.
오다와라 시가지는 강변 분지를 따라 남북으로 길쭉하게 형성됐다. 오랜 전란의 시대에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오다와라 성은 시가지 남서쪽 바닷가에 세워져 있었다. 천수각이 바다 쪽이 아닌 내륙 방향 북서쪽에 위치했으나 전선에서 포격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도련님, 이번에는 상륙할까요?”
전선에서 함포를 발사할 때마다 울리는 굉음의 간격 사이로 계복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기마병과 승마보병이 배에서 내리고 다시 타는데 걸리는 시간이 아까웠다.
“뭐, 바닷가 가까이 성이 세워져 있으면 일단 포격만으로 무너졌다고 보면 돼. 나중에 오사카에나 상륙해라. 거긴 정말 화끈할 거다.”
“알았습니다. 편하긴 한데 허리 살이 자꾸 늘고 있어서요.”
“그 나이에 배가 나오는 거야? 체력운동이라도 해.”
난공불락이라는 오다와라 성도 금방 무너졌다. 천수각과 망루들이 무너지고 성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기에 이민호는 포격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시가지를 적당히 두들겨 주라고 기함 함장에게 지시했다. 조금만 더 쏘고 곧 떠나려 했다.
“어? 기마무사 한 떼가 서쪽으로 향합니다. 산성으로 올라갑니다!”
“다이묘 일행인 것 같다. 함장! 잡아!”
기마무사 100여 기가 서쪽으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이민호가 지도를 보니 서쪽 멀지 않은 곳에 이시가키 산성(石垣山城)이라고 표시돼 있었다. 포격에 버티기에는 산성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전선에 강력한 함포가 탑재돼 있으니 바닷가에 쌓은 산성이란 의미가 없었다.
이 산성은 1590년 오다와라 성을 공격할 때 풍신수길이 하룻밤 만에 쌓은 성이라서 일야성(一夜城)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사실은 80일 동안 3~4만 명이 동원된 대역사였으나 숲 속에서 몰래 공사를 진행하고 완공이 되자 밤에 나무를 베어 마치 하룻밤에 쌓은 것처럼 사기를 쳤다는 일화가 깃든 산성이었다. 오다와라를 정복한 후에도 풍신수길이 다도회를 여는 등 이 산성을 계속 활용했다.
- 콰쾅! 쾅!
이동표적이라 잘 안 맞았지만 기함 외에 다른 전선들이 포격에 가담하자 기마무사 100여 기가 말들과 함께 순식간에 분해돼 버렸다. 갑옷을 벗겨도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해서 팔지도 못할 것 같았다. 이민호는 다이묘가 죽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귀찮아서 바로 출항 명령을 내렸다.
“이상한 일이야.”
“뭐가요, 도련님?”
계복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이민호에게 물었다. 지난 가을에 계복이 담배 피우려는 것을 말리느라 고생 좀 했다. 곰방대가 어울릴 시기에 종이로 만 필터 담배는 너무 고급이었다. 괜히 필터에 소량의 꿀을 발라 흡연자를 아주 쉽게 양산해버렸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흡연자가 늘어나자 건강에, 특히 정력과 피부미용에 좋지 않다는 식으로 담뱃갑에 경고문을 달았다.
이민호는 올 초에 군인 신분으로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어명과 군령으로 금지했다. 고산국은 징병제가 아닌 직업군인제이기 때문에 대부분 40대 중반까지 신분을 보장했고, 20년 근무 기간을 넘겨서 퇴역하면 경작지를 두 배로 늘려주기로 약속했다. 두고두고 써먹어야 할 군인들이 겨우 20대 중반에 조금 뛰었다고 헉헉거리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물론 남는 담배는 조선과 일본, 몽골 등에 절찬리에 수출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이번 같은 기회가 오면 왜적들을 싹싹 쓸어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막상 며칠째 같은 짓을 하다 보니까 지금은 지겨워죽겠어.”
“너무 일방적이라 그런 거겠지만, 좋잖아요?”
“당하는 입장보다야 훨씬 낫겠지.”
사실 이민호는 일본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생각 같아서는 바다로 싹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일반 백성들이 불쌍해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민호는 주변의 일본 사람들을 떠올렸다. 겐타로는 충직하고 근면하며 미카와 네이는 행복해 보였다. 주로 노예로 팔려왔던 고산국에 사는 일본 출신 백성들은 거의 문제가 없었다.
이런 현실에 대해 계복은 이민호가 일본인들에게 압도적인 힘을 보여줬기 때문에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노예로 팔려왔던 일본 처녀들을 보면 한국이나 조선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착한 사람들이었다.
억척스럽게 일하는 일본 처녀들 덕택에 개국 초기의 인력 부족 사태를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남초현상도 순식간에 역전시켜 지금은 심각한 여초현상 때문에 오히려 더 문제였다.
“도련님! 명나라가 진짜로 일본을 정벌하긴 한대요?”
“말로는 반드시 하겠다는데, 그게 쉽겠어?”
명나라 황제가 복건 순무에게 명해 일본에 간첩을 파견하는 문제로 올 들어 이민호와 꾸준히 협의하고 있었다. 명나라 황실은 일본을 정벌하고 싶은 의지가 분명히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일본 정벌이 쉽게 가능할 리도 없었다.
일본은 인구가 조선의 2배로 추정되고 식량 생산력도 좋았다. 또한 전쟁에 익숙한 군대를 약간 무리하면 무려 60만 이상 동원할 수 있었고, 그 중에서 최소 30만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었다. 이 시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끔찍하게 많은 수준이었다.
성공 여부를 떠나 일본 정벌을 진짜로 시도할 수 있을지 그 자체도 의문스러웠다. 명나라나 조선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정벌을 고려하고 있다지만 실제로 일본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능력이 있을지 지금으로선 부정적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안 도와주면 우리끼리 해요, 도련님. 지금처럼 바다를 봉쇄해버리면 정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왜적들을 말려죽일 수는 있잖아요. 바다로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배란 배는 보이는 족족 철저히 부수고 추수철에 해안선 따라가면서 논에 불 지르고 다니면 지들이 어떻게 할 거여요? 산으로 들어가 화전이나 일구겠죠.”
“식량이 부족해서 몇 세대만 지나도 인구가 확 줄겠구나. 좋은 생각이다만, 이번 원정에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알아? 포탄 한 발에 얼만지 알지?”
“어? 예. 1년 국가예산에 맞먹던데요. 앞으로 전쟁하려면 그 전에 미리 돈을 많이 벌어놔야겠네요.”
계복은 이번 원정의 계획 입안단계부터 참가해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지도 알고 있었다. 포탄 가격은 흑색화약 제조법에 맞춰 적당히 과장하긴 했으나 현재 다른 나라의 기술로 비슷하게 만들려면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갈 수 있었다. 포탄과 총탄을 왕실 재산으로 제공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규모 원정은 고산국의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사명감을 갖고 애들 사격훈련 좀 제대로 시켜라, 이 원수야!”
“제가 원수인 것은 맞는데 어감이 이상하네요.”
“네가 생각하는 바로 그 원수가 맞아.”
“승마보병을 거의 기마병으로 키운 게 누군데 그래요. 안장에 오르지도 못하던 흑인들이 요즘 잘 타는 것 보세요.”
“그래, 잘 났다.”
원정함대는 이즈반도 주위를 돌며 해안가 마을들을 불살랐다. 이즈반도 중심의 야마나카(山中) 성을 공격하고 싶었으나 바다에서 거리가 멀고 산꼭대기에 있어 포기했다.
이즈반도 남단 이로자키 곶을 돌아 스루가만에 들어서자 멀리 북쪽에 흰 눈이 덮인 후지산이 나타났다. 서쪽을 향해 함대가 계속 항진하는데 바다가 너무 깊은 탓에 아주 시퍼런 바닷물 색깔을 본 수병들이 조금 놀랐다. 그러나 유구국 주변은 훨씬 더 깊은 바다였다.
스루가만 안쪽, 현대의 시즈오카인 평야지대와 마을들을 무시하고 두 시간쯤 서쪽으로 항해했다. 서쪽에 수평선이 보여서 망망대해인 줄 알았는데 계속 항해하니 산꼭대기 몇 개가 수평선 위로 점차 솟아올랐다. 오후 늦게 풍랑이 심해서 오마에자키 곶 북쪽에서 파도와 바람을 피했다.
해병들이 상륙해 땔나무와 꼴을 베는 동안 이민호는 주요 지휘관들을 기함으로 불러 회의를 가졌다. 기함의 함교 뒤에는 50명쯤 들어갈 수 있는 회의실이 갖춰져 있었는데 평소에는 창고로 썼다. 계복과 감불과 감동, 승마보병 지휘관 5명, 해병 지휘관 2명, 그리고 함장 30명 중에서 10명이 참가했다.
“내일의 공격 목표는 하마마쓰 성이다. 이곳도 역시나 해안 가까이 성이 있기 때문에 함포로 때리면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해안지대를 공격하는 동안 기마 전령이 오사카로 달려갈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사카 성이 내륙으로 들어가 있어서 문제인데 미리 경계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하마마쓰를 함포로 공격한 즉시 오사카로 가야겠군요.”
“그게 좋겠지. 그리고 오사카만으로 들어가면 아마도 일본 수군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규모 해전에도 대비해야 한다.”
예전에는 세토 내해에 해적들이 우글우글했다고 한다. 전국시대를 거치며 해적들 대부분이 다이묘의 수군으로 재편됐지만 독립적인 해적 영주들도 아직 많이 남았다. 주력은 대부분 조선에서 몰살당했어도 아직 근거지에 남아있는 해적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해적이든 수군이든 단박에 해치우고 가면 되지 않습니까?”
“시간이 좀 안 맞아서 그렇다. 최고 속도로 항해한다 해도 오사카에는 저녁에 도착하게 된다. 적지에서 야간전을 하면 불리하다.”
이민호는 지도에서 오사카와 주변 지형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오사카가 만 안쪽 깊이 들어가 있어서 주변 해안지대에서 공격받을 경우 빠르게 경보를 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전하! 기이반도 남쪽에 기이오시마 섬이 있습니다. 옛날 헤이안 시대 구마노 수군의 근거지입니다. 그 섬에서 정박하면 어떻습니까?”
“하필 그 근거지였다는 포구가 섬 북서쪽에 있고, 바다 건너편에 마을이 있다. 그래서 작전 계획을 짤 때 처음부터 그곳을 정박지로 삼는 것을 배제됐다.”
그러나 사람들 머리가 많이 모이니 갖가지 기상천외한 기책이 쏟아져 나왔다. 만약 육군이나 수군 어느 한쪽의 지휘관들만 모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해적인 척하고 해적끼리 내분이라고 사기 치면 어떻습니까? 저녁에 공격하면 어두워서 바다 건너편에서 알게 뭡니까?”
“전하! 다 필요 없습니다. 거기서 오사카까지 거리가 산길과 해안도로로 400리가 넘어가니까 전령이 밤새도록 말을 달려도 도착하지 못합니다. 기이오시마에서 정박하고 다음 날 새벽에 출항하면 됩니다.”
“어? 가능하네? 그것 참! 거리와 지형이 묘하군. 좋다!”
이민호가 지도에서 거리를 재보고 결단을 내렸다. 내일 출항하면서 하마마쓰를 공격하고 저녁에 기이오시마 섬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해 뜨기 전 새벽 일찍 원정함대가 출항했다. 이민호도 긴장감 때문에 일찍 일어났다. 범선 선장들이 남풍을 잘 이용해서 오마에자키에서 하마마쓰까지 가는데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현재 하마마쓰(浜松) 성은 풍신수길의 오랜 부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가 지키고 있었다. 풍신수길이 도키치로라고 불릴 때부터 부하였으니 최소 20년은 넘었다. 해안에서 6km 이내라면 함포 사거리 내에 충분히 들어왔다.
- 쿠웅~
기함의 함교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날카로운 함포 쏘는 소리 사이에 하마마쓰 성에서 포탄이 터지면서 은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해자나 성벽이 있든 말든 병사들이 성을 점령할 것도 아니고, 함포를 주력 공격 수단으로 활용하는 원정군 입장에서는 전혀 의미 없는 방어시설이었다.
“전하! 성이 의외로 단단합니다.”
“그렇군. 천수각만 무너지면 바로 출발하자.”
“그것도 거리가 멀어서 잘 안 맞습니다.”
이민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사실 전선에 탑재된 함포는 육상용으로 사용하는 야포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파도 위를 떠다니며 요잉과 롤링 등을 감안한 함포 안정기나 사격지휘 장치 따위는 전혀 없었다.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이렇게 명중률이 뚝 떨어졌다.
“천수각이 무너졌습니다!”
“좋아! 어서 출발해!”
하마마쓰 성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성에 타격을 줌과 동시에 주변 성 아래 마을에 화재를 일으켰으니 이것으로 충분했다. 더 늦기 전에 출발해 200km 넘는 뱃길을 항해해서 해가 지기 전에 다음 정박지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약간 역풍을 받는 바람에 범선들의 속도가 뚝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기관이 4개 달린 천자 전선들이 범선을 한 척씩 예인했다.
원정함대는 10여 시간이 넘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겨우 기이반도의 남쪽 끝, 기이오시마 섬에 도착했다. 이민호는 다음부터 무역이라면 몰라도 원정에서는 다시는 범선을 대동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해가 이미 지고 붉은 저녁놀이 검게 변할 무렵 기이오시마 북서쪽 포구 마을에 원정함대가 들이닥쳤다. 지금은 해적질을 못하고 있지만 한때 유명한 해적집단이 웅거한 곳으로서, 지금도 다이묘들에게 군선을 빌려주거나 경험 많은 수부, 해전에 익숙한 병사들을 용병으로 제공하며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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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