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7 30. 섬에서 섬으로 =========================================================================
계복은 아이누 섬에 도착하자마자 기마병과 승마보병들을 이끌고 드넓은 평원에서 며칠째 야영 훈련 중이었다.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은 지나갔지만 아직 봄이 되지 않아 다들 고생을 많이 했다.
이제 흑인들도 제법 말 타기에 익숙해져서 승마기술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안 듣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승마보병 수준이었지 기마병으로서는 아직 부족했다. 그래도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훈련이었다.
교역은 아라 공주에게 맡기고 이민호는 호위대와 함께 훈련장을 찾았다. 아이누 섬에서는 아직 추운 시기인 3월 초순에 다들 땀을 뻘뻘 흘려가며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어휴~ 훈련하느라 고생들 한다.”
“그러게 말이에요. 차라리 전쟁을 하면 쉴 시간도 많고 전리품 얻을 기회도 생길 텐데요.”
“그, 그러게 말이다.”
뜻밖의 대답에 이민호가 몹시 당황했다. 이민호를 조금 더 아는 민희는 입을 다물었지만 순진한 민영은 여진족 출신답게 아직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철이 든 다음에 포로로 잡혀 와서 그런지 이민 1.5세대가 아닌 1세대에 가까웠다.
고생하는 승마보병들에게 점심 식사 때 특식을 나눠주도록 지시하고 이민호는 큰 호수 마을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벌판 멀리서부터 아이누족 추장이 소리를 지르며 이민호에게 뛰어왔다. 도착할 때까지 한참 걸렸다.
이민호는 전투용은 아니더라도 정찰과 연락용으로 쓰라고 아이누 추장들에게 말을 몇 마리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이누 추장들은 곰한테 잡아먹히면 아깝다는 이유로 받지 않았다. 사실 말을 무서워한 탓이었다. 가키자키 가문을 비롯해 아이누 섬을 지배하던 일본인 가문들이 소수의 일본 말을 들여와서 키웠으니 본 적이 많을 텐데도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나서 더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주 접하다 보면 말이 순한 짐승이라는 생각이 아이누족 사람들에게 퍼질 것이므로 이민호는 여유를 갖고 천천히 설득하기로 했다. 아이누 섬은 말을 키우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라서 이렇게 좋은 말 목장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차하면 말 수십 마리를 풀어놓고 야생마로 키울 생각도 있었다.
“전하! 샤모가 군대를 몰고 남서쪽 삿포로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추장이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가운데 간신히 보고했다. 샤모는 일본인, 삿포로는 삿 포로에서 나온 지명으로 건조하고 넓은 땅이라는 아이누 말이었다. 이민호는 사막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적은 얼마나 되는데?”
“5천을 넘어 1만 가까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그 남쪽에도 더 있을 것 같답니다. 지금 여러 마을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국왕전하! 도와주십시오.”
그 정도라면 혼슈 동북지방의 군세를 싹싹 긁어서 왔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계복과 함께 지휘관들을 불러서 즉석에서 작전을 짰다. 그리고 주력 병력의 이동은 육로보다는 해로를 택하기로 했다.
“조선에서 전쟁을 하면서도 아이누 섬에 군대를 보내다니. 지방 영주들은 자기들 이익이 먼저라서 그런가?”
“도련님. 제가 이쪽으로 올 때 대마도 근처에서 왜선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놈들이 밤에 해협을 건너와서 몇 척 잡지 못했습니다만 배마다 병력이 한가득 타고 있었습니다. 이놈들이 병력을 회수해 조선에서 물러서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꾸준히 충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래도 재차 점령을 염두에 두는 것 같습니다.”
“미친놈들! 이 정도면 패한 전쟁인데 왜 이토록 조선에 집착할까? 풍신수길의 권력이 약해서 이 전쟁이 끝나는 대로 몰락할까봐 그렇겠지?”
일본 사정을 잘 아는 겐타로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민호는 병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큰 호수 마을로 돌아갔다. 이곳 추장도 이미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국왕전하! 돌아오셨군요. 제발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추장! 나는 국왕이다. 아이누들이 인정한 이 땅의 주인이다.”
큰 호수 마을 추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땅을 당연히 내가 지켜야겠지. 그리고 아이누들도 이 땅의 주인이다. 큰 주인으로서 보통 주인들에게 명한다. 이 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아이누 전사들은 무기와 열흘 치 식량을 짊어지고 삿포로 북동쪽 100리 평원에 집결해라.”
“예! 모든 마을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곳 큰 호수 마을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삿포로에 도착할 수 있고 행군 중에 배에서 식량을 공급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집결하기에는 길이 너무 멀었다. 반대로 아이누 섬 중심에서 집결할 경우 삿포로까지 완전히 육로라서 바다로부터의 보급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민호는 감동과 감불에게 기마병 500을 지휘해 아이누들과 같이 육로로 움직이도록 하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배에 태웠다. 5천에 달하는 말과 그 이상 숫자인 사람들이 배에 타느라 항구가 북적거렸다.
전쟁을 앞두고 큰 호수 마을에 열린 시장이 거의 철시 상태라 시장에 파견한 병력도 모두 철수시켰다. 아라 공주가 며칠만 더 시장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이민호가 또 오면 된다고 하자 아라 공주가 이민호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민영 귀인 모르게 얼음 섬에서 잡아 온 해달 가죽을 범선에 다 실었어요. 전하께서 약속하신 사례도 추장에게 해줬어요.”
“아! 간지러워! 잘 했소, 아라 공주. 어서 배에 탑시다.”
함대가 출발하기 전에 고산국의 아이누 아이들을 위해 아이누어 선생을 구했다. 아이들에게 보모 역할을 해주고, 아이누족 훈련병 50명에게 가끔 고향 음식을 해줄 여자들이 필요했었다. 사관학교장 김학이 보고하길, 처음으로 집을 떠난 청년들 중에 향수병 걸린 이들이 많다고 해서 특별히 구인을 하기로 결정했다.
쌀 열 석을 계약금 선불로 주기로 하고 구한 젊은 여자 둘이 배에 탔다. 이민호는 절대로 찢어진 입 모양 문신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강조했다. 다른 곳에서는 여자들 치장 방법이 다를 수도 있다고 보모들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이민호는 이번에도 추장들이 바치겠다는 꼬마 신부들을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공부하는 추장 자제들의 부인이라는 여자들이 배에 타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고생 좀 했다. 2년 동안 공부시키기로 약속했으니 그 동안 젊은 부인들은 꼼짝없이 독수공방해야 했다. 생도들이 방학 때 왕복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오후에 출항해서 밤에도 천천히 이동했다. 함교에서 야간 당직이 교대하는 것을 본 다음 이민호는 함대사령관실로 돌아왔다.
아이누 섬에서 금과 은을 생각보다 많이 모으게 돼서 기쁜 아라 공주가 자꾸 시녀들을 안아달라고 이민호에게 요청했다. 이민호도 시녀들이 싫지는 않았으나 어린 아라 공주가 보는 앞에서 안는 것은 양심에 많이 꺼렸다. 공주는 이민호에게 엉겨 붙어서 목에 팔을 두르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밤이 깊어서 아라 공주가 칭얼거리더니 잠에 빠져 버렸다. 이민호는 꼼짝하기 어렵게 되어 그냥 자려고 했는데 이불 속으로 아야가 들어왔다.
“아라 공주님을 잘 대해주셔서 고마워요.”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니까. 너희들도 그렇지만.”
시녀 아야가 피식 웃는 것 같았다. 어린 공주와 성인이 되어 이미 승은을 입은 시녀들 사이였지만 원래 친한 사이라서 그런지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걸 해결하고 주무셔야죠?”
“괜찮아. 너도 누워.”
이민호가 아야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아야가 헤헤 웃으면서 이민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러나 아야의 손은 이민호의 밑에서 놀았다. 나쁘지 않아 이민호도 내버려두었다.
“너는 슈리 성 밑에서 과일 행상을 했었잖아? 장군의 딸이야, 상인의 딸이야?”
“권모술수를 좋아하는 행정관의 딸이에요. 미안해요, 음모에 말려들게 해서.”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인데 아야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야가 행상으로 위장해 시장에서 고산국과 사쓰마군을 군사적으로 충돌시키는 공작을 시도했었다고 한다. 아야는 속으로 많이 떨었다고 했다.
“무서워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는데 사쓰마군이 제 과일바구니를 뒤집어엎고 저를 발로 찼어요. 그때 국왕전하께서 나타나셨어요.”
“그때 내가 사쓰마군하고 싸웠으니 너는 가만히 있었는데도 공작이 성공했구나.”
“예. 싸우는 모습이 무서웠지만 끝까지 지켜봤어요. 그때부터 조선말을 열심히 배워서 다행히 공주님의 시녀로 발탁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전하 곁에 머물 수 있게 됐어요.”
이민호가 아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몰랐는데 아야는 몇 년 동안 노력한 끝에 소원을 풀게 되었다. 그러나 정식 부인도 아니고 후궁의 시녀에 불과한 신분이었다. 이 시대 여인들이 다 그렇지만 아야도 불쌍했다.
공주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아야의 머리를 당겨 입을 맞췄다. 아야가 눈을 감고 이민호가 보기에 몹시도 싱싱한 몸을 비비꼬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한 손이 공주에게 묶여 있어서 어떻게 해주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아라 공주가 잠든 시간을 이용해 몇 번 안긴 했지만 그때마다 항상 아쉬웠었다. 아야의 두 손이 여전히 이민호의 것을 갖고 놀았다.
“자꾸 만지지 마.”
“어머! 웅장하게 변했어요. 가만히 계세요.”
아야가 이불 밑으로 내려갔다. 잠시 부스럭거리더니 촉촉한 감각이 이민호의 예민한 부위를 감쌌다. 이민호가 신음소리를 냈다가 공주 눈치를 살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민호는 끝날 때까지 아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몹시 서툴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금방 적응했다. 잠시 후 수건으로 이민호의 몸을 닦은 아야가 고개를 이불 위로 내밀며 올라왔다.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워 얼른 고개를 숙이는 아야를 당겨서 안았다.
“고마워.”
“공주님 눈치 안 보셔도 돼요. 공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래도.”
“민영 귀인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가르쳐주셨어요. 귀인께서 가르쳐주시면서 너무 부끄러워 하셔서 그 모습이 귀여웠어요.”
“큭큭! 그렇겠지.”
민영은 사실 제대로 할 줄도 몰랐다. 해중국 탈의장에서 네이가 하는 것을 보고 나중에 딱 한 번 잠깐 시도해봤을 뿐이었다. 이민호는 아라와 아야를 끌어안고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연합함대는 다음 날 오전에 삿포로 서쪽 해변에 도착했다. 멀리 육지에서 왜군들이 진채를 세워놓고 주변을 노략질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이민호는 차분히 병력을 하선시켰다.
왜군이 조금 많기는 해도 비슷한 숫자였으니 단순히 왜군에게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왜군이 다시는 아이누 섬을 욕심내지 못하도록 제대로 이기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전투는 아이누족들과 함께 싸워 승리를 해야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누 전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숙영지를 건설하라.”
배에서 내린 승마보병들과 해병들이 해변에서 떨어진 육지로 깊숙이 진입했다. 그리고 아이누족들이 몰려올 북동쪽 넓은 평야가 보이는 산기슭에 숙영지 건설 작업이 시작됐다. 천막을 치고 목책으로 사방을 두르는 작업 중에 강 건너편의 왜군 쪽에서 전령 무사가 달려왔다.
“항상 무운이 깃드시길 기원합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와 계시는 줄 알고 저희가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군사를 일으키고 보니까 내가 이곳에 있어서 당황한 게 아니고?”
이민호가 비꼬자 전령 무사가 당황했다가 얼른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 과장되게 웃었다.
“하하! 저희들은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의 없어도 괜찮으니까 남의 땅 침범 좀 하지 말지 그래?”
“국왕전하께서 모르셨나본데 에조치는 원래부터 일본인의 땅입니다.”
“에조치라는 이름부터가 아이누인의 땅이잖아? 제발 궤변은 그만 해라.”
“하하! 영주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전령 무사가 돌아갔다. 강 건너편에 눈에 익은 가키자키 가문의 깃발이 많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영지에서도 병력 지원을 해서 가키자키 가문의 병력은 전체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용병 역할을 하는 낭인무사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오다테의 영주 가키자키 요시히로는 풍신수길의 허락을 얻어 히젠 나고야에서 급히 돌아와 절치부심 에조치 회복을 노리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주변 영지들을 설득해서 병력을 빌리고 낭인 무사들을 고용해 날이 풀린 다음에야 아이누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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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