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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36화 (185/1,000)

00236  30. 섬에서 섬으로  =========================================================================

이민호는 사할린에서 이틀을 보내고 다시 큰 호수 마을로 돌아왔다. 사흘쯤 더 기다려 해달 가죽을 받으면 고산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민영이 시무룩해져서 해달 가죽은 상선에서 말렸다. 어차피 기함에는 여진족 아이들로 북적거려서 빈 공간도 없었다.

그 사이 북경에 갔던 계복이 아이누 섬에 도착했다. 왜군 포로와 전리품을 싣고 갔던 해동상단 소속 배들은 조선으로 복귀했고, 계복은 전선 한 척과 대형 외륜선 몇 척에 유구국 보병들을 태우고 서해와 남해, 동해를 일주했다. 부산 앞바다를 지나갈 때 왜선 몇 척을 격침시킨 것 외에 큰 사고는 없었다.

이민호가 주본을 올린대로 계복은 복건성의 도시인 복주백을, 감동과 감불은 북경에 가지 않았지만 계복을 통해 황제가 내린 지휘사 직첩을 받게 되었다. 계복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감동과 감불은 만감이 교차된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둘이 어렸을 때는 큰 부락 패륵들이나 받을 수 있는 명나라 지휘사 벼슬이 엄청나게 대단해 보였겠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유구국은 황제로부터 1년 1공을 허락받고 쇼호 왕자는 영파후가 되었다. 장강 하구 절강성에 위치한 영파 즉 닝보는 전통적인 무역항이었다. 현재 일본의 입조나 무역선의 출입이 금지됐지만 전쟁이 끝난 후 풀리기만 하면 다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위치였다. 물론 쇼호 왕자가 영파후가 됐다 해도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었다.

“아라 공주! 이게 다 뭐요?”

해병 수십 명이 기함 집무실에 궤짝을 싣고 들어와서 열어보니 온통 금괴뿐이었다. 누런빛이 쏟아져 나와 이민호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아이누 사람들이 사금이나 황금 장신구를 갖고 몰려오기에 원하는 것들로 바꿔줬어요. 간단히 정련했으니 불순물이 조금 남았을 거여요.”

“5톤, 아니 15만 냥은 되겠소.”

“황금 16만 2천 냥에 백은 8만 7천 냥이에요. 여진과 아이누 섬에서 모은 모피 14만 장을 남만 상인들에게 넘기면 어마어마하겠어요. 상행 한 번으로도 이렇게 대단한 이익을 얻었으니 고산국이 금방 부강해지겠어요.”

“이익이라 했소?”

이익이란 면에서 이민호는 생각해볼 게 많았다. 여진족은 남는 말과 모피, 진주를 팔고 쌀과 면포, 농기구 등을 얻었다. 말은 동물로서 일정 기간에 일정한 양의 목초를 꾸준히 소비하므로 남아도는 말을 팔아버리고 적은 목초를 소비하는 망아지를 키워 다시 숫자를 늘리는 것이 이익이었다. 일부 말은 몽골에서 사서 되파는 중개무역을 했으니 이익이 온전히 남았다.

모피도 가죽옷을 만들고 남아도는 것이었고, 진주는 전형적인 사치품이라 없어도 된다. 그러나 쌀과 면포는 어느 나라에서나 필수품이었고 철제 농기구는 농업생산 증대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건주여진에서 동해국으로 흘러간 은이 4만 5천 냥이었으나 동해국에 남겨뒀으니 여진 전체적으로 보면 은의 유입이나 유출은 없었다. 이민호가 보기에 여진족은 교역을 통해 엄청난 이득을 얻고 있었다.

이민호는 동해국 밑으로 들어온 백성들을 빼면 모피 몇 만 장을 얻은 것이 전부였고, 대신 쌀과 면포, 철제 농기구 등이 빠져 나갔다. 물론 모피는 나중에 남만 상인들에게 팔아 은으로 바꿀 계획이었다. 고산국이나 조선 백성들이 굶어죽을 판에 쌀을 판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안남에서 지나치게 많이 수입하는 바람에 남아돌아서 수출했다. 그리고 면포나 철도 조선에서 여유가 있었기에 낮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었고, 여진에 수출함으로써 가격이 소폭 상승했을 뿐이었다.

아이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물자가 풍족해지고 올해 농업 생산력 증대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철제 농기구 덕택에 더 효율적인 농경을 하면서 더 많은 수확을 하면서도 여유 시간은 더욱 많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남는 시간과 힘을 투자해 밤일을 더할 수 있고, 자식들을 더 많이 낳을 수 있었다. 그것은 평균적인 아이누 사람들에게 행복이었다.

이민호도 마찬가지로 이익을 얻었다. 교역을 통해 모두가 이익을 봤고 손해 본 교역 당사자는 하나도 없었다. 해달 천 마리만 불쌍하게 됐을 뿐이다.

“장사만 해서는 나라가 부강해지지 않는다오. 궁궐 지하 보물창고에 금과 은이 산더미처럼 쌓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백성들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열심히 일해서 생산을 하고, 버는 만큼 소비를 해야 앞으로도 나라가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오. 보다 많은 휴식, 취미생활을 위한 여가 시간이 많아질수록 백성들이 행복하게 된다오.”

“전하! 마카오에서 구한 책에서는 백성들이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돈과 시간이 없고 무식해야 더 열심히 일한다고 했어요. 그럼으로써 국가가 부강해진대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국내산업 보호와 무역흑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상주의는 주장하는 자들마다 다종다양한 의견의 집합체였으나 공통적으로 공주가 말한 그런 경향이 있었다. 중상주의는 국민을 불행하게 만든 자들이 식민주의와 결합한 다음 외국 국민들까지 불행한 노예제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바로 이것이 제국주의였다.

“그거, 유럽의 상인 세력과 귀족들이 백성 전체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이론이오. 대부분의 백성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굶주리면서 하루 종일 일만 해야 다른 나라에 비해 강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오? 그게 바로 노예요. 그리고 백성이 노예인 나라는 강해지지도 않아요.”

당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정권을 장악한 세력 대부분이 이런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명분으로 국민을 노예 상태로 떨어뜨린 국가가 제대로 성공한 경우도 없었다.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백성들이 참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평생, 그리고 대대로 그런 노예 상태로 살아야 한다면 사람이 사는 의미가 있겠소? 나라가 부유하고 강해져도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한데 어째서 나라가 계속해서 강해져야 하고, 국민들은 계속 불행해져야 하오? 그런 나라는 망해야 하오.”

아라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민호는 21세기에도 대부분의 국민이 노예 상태로 남은 북한을 떠올렸다. 그리고 외국노동자들을 대량으로 받아들여 국민의 소득을 낮추려 획책하던 한국의 몇몇 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보고서 내용들을 기억했다.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외노자를 더 많이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하던 기업들은 그 전에 이미 해외로 공장을 빼돌렸다.

“충격적인 말씀이세요. 그리고 그 책에서 무역은 금과 은을 누가 더 많이 빼앗는가 하는 전쟁이라고 배웠어요.”

“아라 공주는 배우는 입장이니 많은 생각을 해야 할 것이오.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진실만을 담은 것은 아니요. 내가 하는 말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어요, 전하.”

“금과 은은 국가의 부가 아니라 재화의 일종일 뿐이오. 금과 은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망한 나라가 역사상 아주 많지 않소? 그 비싼 금괴가 성벽을 쌓아올린 벽돌 하나 가치만도 못한 경우요.”

국가의 수취제도나 경제제도가 먼저 무너지고 나서 그 결과로서 국가가 멸망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적에게 점령당한 왕궁의 보물창고에 몇 년 치 국가예산이 쌓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금과 은이 쌓여있더라도 국부가 아니었으며, 그 재화를 국가의 보전을 위해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 부강한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모든 백성들이 서양 시계로 하루 여덟 시간 일하고 7일에 이틀 쉬면서도 먹고 살 걱정이 없고, 군사력은 외국의 침략을 막아낼 정도요.

이민호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 일부 내용이 얼핏 뇌리에 떠올랐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는 내용에 전율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국민들이 일인당 최소한 10억 원은 있어야 경제적으로 만족하겠다는 여론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군사력이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침략을 막을 정도가 되려면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마치 꿈의 나라 같아요.”

“그런 나라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갑시다.”

“네~ 제가 전하를 도와드릴게요!”

이민호가 활짝 웃는 아라 공주와 두 손을 맞잡았다.

“전하께서는 그 동안 무역을 통해 항상 큰 이익을 얻으셨잖아요? 그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자본을 늘리기 위해 개국 초반에 흑자 위주로 무역을 한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나는 그 동안 무역을 통해 이익을 보면서도 그 이익보다 적으나마 계속 큰돈을 쓰고 있소. 고산국에 가보시면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어떻게 다른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오.”

사실 고산국은 국왕의 개인재산을 퍼부어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비정상적인 국가였다. 건국 초기라서 특수한 상황이긴 하나 지나치게 왕실에 의존하는 경제체제였다. 앞으로는 왕실이 아닌 국가 회계 계정에 속한 금광과 철광, 탄광이 있고 농업 생산력이 있으니 금방 정상적인 국가가 될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그런데 좀 섭섭하오. 내가 언제 유구국이나 조선, 여진, 아이누에게서 무역흑자를 보려고 한 적이 있었소?”

“아니에요. 유구국 왕실은 언제나 전하께 감사드리고 있어요.”

고산국과 유구국의 무역에서 고산국은 항상 적자를 봤다. 당연한 것이, 유구국의 자체 생산품을 고산국에서 사는 경우는 흔해도,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산국이 유구국을 통해서 티크목 등 상품을 구입하고 용역서비스를 제공받은 경우가 많았다. 유구국이 고산국의 속국이 아닌 위성국가로서 기능하니까 이런 일방적인 특혜가 가능했다.

“유구국 왕실이 아니라 그 백성들이 내게 감사하게 될 때 유구국은 진정으로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오.”

“지금도 유구국 백성들이 전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부강한 나라는 아직 아니지만요.”

“그렇다면 말이오. 유구국에서 고산국과 함께 탐험대를 몇 개 조직해줬으면 좋겠소. 물론 경제적 보상은 충분히 해드리겠소.”

“새로운 항로 개척은 유구국의 장기예요. 언제든지 시켜주세요!”

아라 공주는 단순한 후궁이 아니라 유구국의 무역대표부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시녀들도 왕실의 친인척인 동시에 각각 상인 가문, 장군 가문, 그리고 행정가 가문 출신이었다. 시녀들의 신분과 능력으로 따지면 주상아 공주의 시녀들보다 훨씬 높았다.

“좀 멀어요. 하나는 태평양 한 바퀴 돌기, 하나는 남쪽 바다를 지나 자카르타, 아니 자카트라와 그 너머 호주, 아니 미지의 대륙, 자꾸 실수해서 미안하오. 하나는 인도양을 지나 아프리카 남단까지가 목표요.”

“제가 가면 안 되나요? 가슴이 뛰어요!”

“공주는 고귀한 신분이니 위험해서 안 돼요.”

이민호는 아라 공주와 함께 세계지도를 놓고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아라 공주가 침대에서 즐겁게 웃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민호는 전 세계에 마수를 뻗치기 위한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아이누 섬은 춥고 인구도 적고 고산국에서 멀어요. 전하께서 이 섬에 눈독을 들인 이유가 따로 있었군요?”

“그렇소. 저 넓은 바다, 태평양을 내해(內海)로 만들고 북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고 싶소. 정복할 필요는 없고, 다만 영향권 안에 넣으면 족하오.”

“전하의 꿈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질 거여요.”

이민호가 볼 때 북해의 땅이라는 아이누 섬은 다만 눈만 많이 쌓일 뿐이었고 한성보다 춥지 않았다. 아이누 섬, 현대의 홋카이도는 일본 전체 농경지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산악지대가 많은 것은 일본 혼슈와 마찬가지였지만 농경지로 쓸 만한 평지가 엄청나게 넓었다. 개발하기에 따라 큰 성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땅이었다.

아직 이곳에서 재배할 내한성 쌀은 개발하지 못했으나, 현재 인구의 몇 백 배를 부양할 만한 농경지를 개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질의 목초지를 이용해 대규모 축산업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아이샤를 이곳으로 옮길까 고민 중이었다.

지금은 아이누 섬에 인구가 적지만 식량 문제와 높은 영아 사망률 문제만 해결된다면 폭발적으로 인구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봤다. 아이누 사람들이 원래 역사처럼 일본인과 혼혈되어 정체성을 잃고 사라질 일은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아이누 섬은 북태평양을 경략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네덜란드 등 서양의 탐험선들이 북태평양을 항해하다가 태풍에 휘말려 일본 해안에 조난을 당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태풍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동해를 거쳐 아이누 섬 남쪽이나 북쪽의 해협을 통해 태평양에 진입할 경우 훨씬 안전한 항로를 보장할 수 있었다. 북미대륙을 갖고 싶다면 아이누 섬에서 모험을 시작해야 했다. 일본을 견제하는 것은 덤에 불과했다.

============================ 작품 후기 ============================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한 번 늦춰지니 자꾸 늘어지네요.

경제 문제는 대충 넘어갑니다.

지금 자면 다음 편은 좀 늦게 올라갈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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