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5 30. 섬에서 섬으로 =========================================================================
그러나 이민호는 단호하게 해병들에게 지시해 단정을 타고 해달을 잡게 했다. 해병들이 그물을 넓게 펼쳐 던져 바다에 누워있던 해달 수십 마리를 한꺼번에 잡았다. 그 사이 민영이 울상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이민호도 속이 쓰렸다.
사람들이 짐승의 앞발에 손과 팔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 해달이었다. 애완동물인 개나 고양이의 앞발을 손이라고 하면 어색하지만 위에서 두 번이나 해달의 손이라고 썼는데도 자연스러웠다.
“주인님 너무해요~”
“귀엽긴 한데 어쩔 수 없어. 가죽을 벗겨 손질을 잘해서 팔면 한 마리에 황금 60냥은 받을 수 있을 거야. 천 마리만 잡아도 6만 냥이야. 강남에서 쌀 100만 섬 넘게 살 수 있는 큰 금액이야.”
“헉! 그럼 어서 잡아야죠! 어서 다 잡아서 씨를 말려요! 총을 쏴서 잡을까요?”
“민영이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건 안 돼. 매년 꾸준히 잡아야 하니까.”
“흑! 불쌍해요. 주인님 수전노!”
민영에게서 반발이 심했다. 외모와 행동이 심하게 귀여워서 해달을 잡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해병들도 많았다. 해병들은 이민호에게 지시받은 대로 그물에 잡힌 해달 중에서 어미와 새끼가 같이 있는 경우 즉시 바다에 풀어주었다. 그리고 임신한 암컷이나 아직 어린 개체도 놓아주었다.
여느 수렵민족처럼 아이누 사람들에게도 임신 중이거나 새끼를 데리고 있는 암컷을 잡지 않는 등 사냥꾼의 규칙 같은 게 있었다. 원주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규칙을 잘 지키는 척했지만 아이누들은 작은 짐승을 왜 잡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국왕전하! 라코는 잡아봤자 고기가 별로 안 나옵니다. 혹시 고기를 드시고 싶으시다면 저희가 큼직한 순록을 몇 마리 잡아서 바칠까요?”
“고기 때문에 잡는 게 아니라니까!”
이민호는 아이누 추장에게 해달 사냥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 며칠 동안 잡을 만큼만 잡고, 앞으로도 매년 꾸준히 500마리 한도 내에서 잡아 무두질을 잘하면 철제 농기구와 칼과 총 등 무기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이민호는 사냥꾼의 규칙에 따라 일정 수만 잡으라고 했다.
해달이 멸종되거나 수가 줄어들면 이민호도 손해였다. 해달의 모피는 당분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이누들이 공급하고 고산국에서만 판매하는 독점시장이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짧은 기간에 싸게 많이 파는 것보다는 적은 양을 비싸게, 그리고 오랫동안 파는 게 훨씬 나았다.
“전하! 라코는 저 멀리 동쪽 콘루, 그러니까 얼음 섬들에서 많이 삽니다. 섬에 가보면 마치 알 낳으러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정말 우글우글합니다. 거기도 아이누가 살지만 라코는 워낙 흔해서 그들에게 선물을 좀 주고 잡으면 서로 좋을 것입니다.”
추장이 쿠릴 열도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이민호는 아이누 섬에서 500마리, 사할린에서 500마리를 잡으려 했다가 숫자를 조정할 필요를 느꼈다.
“그럼 추장이 거기에 가서 직접 잡아오겠나? 철제 농기구와 곡식 종자를 먼저 줄 테니 그 섬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해달 가죽을 받거나 직접 잡아 오게.”
“철제 농기구라면 어딜 가도 환영받습니다. 닷새만 기다려주시면 라코를 5만 마리쯤 잡아오겠습니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잡으면 안 된다고!”
이민호가 아무리 반복해서 설명해도 도대체 사람들이 왜 적게 잡아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이민호가 곰을 예로 들어 다시 차근차근 설명하고 나서야 아이누 추장이 억지로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곰은 아이누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어렸을 때 마을에서 함께 자라기도 하는 소중한 동물이었다. 연어 떼처럼 바글거리는 해달과, 신이면서 아이누에게 친구이기도 한 곰을 비교하는 것에 추장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얼음이 어는 섬들 어느 곳에 가도 바다 가득히 라코가 있습니다. 다 합해보면 수십 만 마리가 넘으니까 매년 10만 마리쯤 잡아도 숫자가 유지될 겁니다. 하지만 국왕전하의 어명이시니 600마리만 잡고, 다른 자들이 함부로 라코를 못 잡게 하겠습니다.”
이민호는 아이누 섬과 콘루 섬을 합해서 해달이 겨울 털일 때 600마리만 잡으라고 다시 반복했다. 그 이상 잡아도 교환해주는 물건은 동일할 것이니 괜히 더 잡지 말라고 단단히 약속을 받았다.
“좋아. 잘 부탁한다는 뜻에서 이걸 선물로 주겠네. 받게.”
“황공, 황공하나이다, 전하!”
추장이 차마 말은 못하고 눈독만 들이던 마닐라삼으로 만든 그물을 넘기자 추장이 이민호 앞에서 오체투지를 했다. 이곳에서 만드는 그물은 금방 찢어져서 조업 시간보다 찢긴 그물코를 고치는데 시간이 더 많이 들었다. 그물의 크기와 튼튼함, 어로 효율로 따지면 돌도끼와 쇠도끼의 차이였다.
추장이 쿠릴 열도로 가서 사냥하는 동안 이민호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아이누 사람을 고용해서 아이누 섬 북쪽 사할린으로 향했다. 사할린 남단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 함대를 이끌고 만 깊숙이 들어갔다.
사할린 남단과 아이누 섬 북단은 40km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이고 서로 배를 타고 통행할 정도라서 말도 잘 통한다고 들었다. 오히려 아이누 섬 남쪽과 북쪽의 방언 차이가 더 컸다.
“남쪽 섬에서 국왕전하라고 불리는 훌륭한 아이누로군요. 저희 섬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할린 섬 전체를 뒤덮은 압도적인 대수림 앞에 인간은 보잘 것 없어 보였다. 아이누들이 몰려나와서 이민호가 이끄는 함대를 환영했다. 이민호가 호위대와 함께 전선에서 내리자 노인 추장이 대표로 나와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추장은 마법사 간달프보다 덥수룩한 허연 수염에 얼굴 피부가 쭈글쭈글해서 못해도 70은 되어 보였다. 그러나 아이누 사람들이 워낙 늙어보여서 실제로는 장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아이누라는 말은 사람을 뜻했다.
“전하! 추장의 이름은 하쿠마쿠르라고 합니다.”
“반갑소.”
통역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이민호가 추장 이름의 뜻이 뭔지 나중에 물어보니 덜렁이라고 통역이 설명해주었다. 근엄한 표정의 추장과 잘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통역의 이름 숀타쿠는 뜻이 똥 덩어리였다. 깨끗한 것에 병을 옮기기를 좋아하는 역귀를 쫓기 위해 아이누 사람들은 그런 천한 이름들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당신들을 정복해서 노예로 삼지 않을 테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남쪽 섬을 오가는 아이누들로부터 국왕전하께서 자비롭다는 소문은 이미 충분히 들었습니다. 교역을 하러 오신 게 맞다면 소문을 내서 멀리 사는 사람들도 모피를 가져오도록 전하겠습니다.”
“교역하러 온 게 맞소. 모피나 금을 사러왔으니 협조해주면 고맙겠소.”
사할린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이민호는 몹시 안타까웠다. 사할린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무궁무진하게 매장돼있으나 죄다 바다 깊숙이 있어서 지금 기술로는 석유를 채굴할 수 없었다. 석유가 얕은 땅에서 펑펑 솟아나면 좋겠지만 그런 지역은 이라크 등 극히 일부에 국한됐다.
그리고 만약 사할린의 대수림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러나 목재를 고산국이나 다른 지역으로 싣고 가기 어려웠다. 침엽수와 수량이 풍부해 제지소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사실만 기억해두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남쪽 섬에 배를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두어 달 전에 국왕전하께서 판매하신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철제 농기구와 무기를 사왔습니다. 직접 와주신 국왕전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비슷한 값에 교환되길 전하께 청합니다.”
“팔려는 사람이 찾아와야지요. 먼저 곡식 종자를 받아서 봄이 되면 밭에 뿌리시오. 같이 온 아이누가 감자와 콩 농사에 대해 잘 설명해줄 거요.”
“오오! 이것이 여름 송어나 가을 연어보다 많은 양을 창고에 쌓아둘 수 있다는 감자로군요. 잘 키워 보겠습니다. 앞으로 아이누들이 배를 곯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는 잘 통했다. 인구밀도가 극히 낮은 사할린에서 상대적으로 인구가 몰린 바닷가 마을에 시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며칠 동안 모피와 금, 은을 받고 쌀과 무기, 철제 농기구로 교환해주었다.
씨감자와 콩 종자도 나누어주며 재배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콩은 만주가 원산지로 추정되지만 개량된 큰 콩은 이곳 사할린에서 나지 않았다. 유사시에 바이오디젤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고산국이 교역하는 곳마다 콩이나 땅콩을 전파했다.
사할린에서는 어업도 중요한 산업이라 이민호가 마닐라삼으로 만든 그물을 주니 아이누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다. 사할린에 사는 아이누들은 주로 하천에서 송어와 연어, 황어를 잡았다. 간혹 뗏목을 타고 나가 황새치나 개복치 같은 큰 물고기를 작살로 잡거나 그물을 던져 작은 물고기 떼를 잡기도 했다.
이민호는 담비 가죽과 함께 해달 가죽 이야기도 꺼냈다. 거리가 떨어진 서식지마다 조금씩 잡아서 매년 해달 모피 400장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해달을 보호해달라는 부탁도 따로 했다.
“라코는 바다 속에서 조개를 잡아먹는 짐승이고 아이누는 갯벌에서 조개를 캐므로 영역이 나눠져 있어 상관하지 않습니다. 너무 흔해서 400마리를 잡는 것보다 무두질하는 게 더 큰일이겠습니다. 오늘 바로 잡아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국왕전하께 부탁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해보시오. 하지만 다른 부족을 침략하는 전쟁이라면 도울 수 없소.”
사할린 섬 안에는 아이누 말고 우일타나 니브흐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아이누 사람들은 우일타를 오로코라고 불렀고, 니브흐는 아무르 강변에 사는 길랴크인들과 같은 종족이었다. 장기적으로 이민호가 모두 포용해야 할 종족들이었다.
“섬 북쪽에 사는 오로코나 니브흐 사람들하고는 잘 지내고 있으며 피차 수가 적으니 전쟁이 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커다란 산신령 한 분만 잡아주십시오. 그 분은 높은 산이 아니라 평지 길가에 집을 두고 아이누들에게 해를 끼치는데 흉포해서 아직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에 사는 아저씨 말이오? 안내인을 붙여주면 바로 잡아주겠소.”
“고맙습니다. 그 산신령은 아이누를 죽였기 때문에 죽은 다음 이요만테를 열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산신령을 사냥하러 가기 전에 치르는 의식을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할머니 한 사람을 포함한 젊은 여자들 스무 명이 나와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박수를 치고 춤을 추었다. 여자들이 특이한 곡조로 합창을 진행하다가 활을 든 남자가 춤에 끼어들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통역을 통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곰이 겨울잠을 자는 동안 아이누들이 여러 차례 사냥을 시도했으나 곰이 워낙 크고 사나워서 다수의 인명피해만 내고 끝났다고 한다. 강력한 수르크 독이 통하지 않고 쇠로 만든 창촉이 곰의 몸에 박히지 않아 사냥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곰이 자는 굴이 가깝고 평지라는 말을 들은 이민호는 기마병 1개 대를 수레와 함께 곰 서식지로 보냈다. 추장이 안절부절못했다.
“추장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금방 돌아, 왔군요.”
총소리가 세 번 연속 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곧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수레 위를 꽉 채운 커다란 곰이 실려 왔다.
“제 지혜로운 아들 하나와 용감한 손자 둘이 이 산신령에게 죽었는데 국왕전하께서는 즉시 잡아 버리시는군요. 감탄했습니다.”
곰을 하늘로 돌려보내기 위한 제사는 지내지 않았지만 식인곰에 대한 의식은 따로 있었다. 추장이 곰에게 다가가더니 마치 곰이 살아있는 듯이, 그리고 말이 통하는 듯이 곰을 꾸짖었다.
“이보시오, 할아버지! 우리와 할아버지 당신은 친구인데도 당신은 아이누를 다섯 명이나 죽였소. 크게 다치고 평생 불구가 된 아이누도 일곱이나 되오. 그건 정말 나쁜 짓이오! 누푸리-코르 카무이가 당신을 지상 세계에 보낼 때 아이누들과 평화롭게 지내라고 하지 않았소?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할아버지 당신 탓이오!”
추장이 떠드는 말은 대부분 변명과 책임회피로 일관했다. 시베리아 여러 민족의 곰 관련 의례에는 샤먼이 관여하지 않고 마을의 최고 연장자가 주관하는데, 추장이 직접 하는 것으로 보아 최고 연장자가 맞는 것 같았다.
의식이 끝나자 아이누들이 곰의 가죽을 벗긴 다음 곰의 얼굴을 아래로 향한 채 땅에 파묻어 버렸다. 아이누들은 사람을 죽인 곰에 대한 응징으로 곰 고기를 먹지 않음은 물론 제사도 지내주지 않았다. 아이누들의 믿음에 따르면 이제 저 곰은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귀여운 해달을 매년 천마리씩 잡기로 했습니다. 크흐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