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3 30. 섬에서 섬으로 =========================================================================
아사달의 방어를 위해 몇 군데에 작은 보루를 쌓고 여러 부족들에게 주변 땅을 공평하게 나눠주어 정착시켰다. 이번에 우디거와 싸웠을 때 전리품으로 챙겨놓은 갑옷을 분배하고 철 화살촉도 대량으로 나누어주었다.
이민호가 쇠도끼와 가마솥, 각종 철제 농기구를 무료로 나눠주자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여진족들이 눈물을 흘렸다. 자기들을 군사로 얼마든지 징발해도 좋다고 했지만 이민호는 각자 자기 마을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어 다시 한 번 감동의 도가니를 만들어주었다. 사실 가난한 여진족에게서 세금을 받을 방법이 없었다. 모피를 싸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기도 했다.
여진족의 땅은 지난 몇 십 년째 대혼란기라서 빈 땅이 많아 땅을 두고 부족들 간에 분쟁이 생길 일은 없었다. 여진족끼리 약탈할 때 그 대상은 인원, 가축, 물자 정도였지 땅을 정복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땅이 문제가 될 때는 개간한 비옥한 농경지거나 다른 특별한 경우였다. 인구 50만에서 최대 100만으로 추정되는 여진족이 땅이 좁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이민호는 새로 복속한 부족들을 아사달을 방어하기 위해 북쪽이나 서쪽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 가까운 동쪽에 주로 배치했다. 현대의 연해주에 속한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등에도 여진족들을 이주시켰다.
백산부에서 다시 온 사신들은 이주 예정지인 연해주의 산맥과 사냥할 동물이 많은 대수림을 살펴보고 무척 만족해서 돌아갔다. 그들의 말안장에는 호랑이나 표범 한 마리씩이 실려 있었다. 고구려에 예속했던 예맥족 백산말갈과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용기로 따지자면 창으로 호랑이 잡는 말갈족과 비교해 백산부 여진족이 결코 못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인님. 설마 아사달을 계속 수도로 삼으시려는 건 아니시죠?”
“물론 아니지. 두만강 건너편에서 화포를 쏘면 아사달 절반 이상이 사거리 안에 들어와. 평원으로 나가는 길도 두만강을 따라가야 해. 활 사거리 안쪽이야.”
토성 반 석성 반이 된 왕성에 민희와 함께 올라 사방을 살폈다. 봄 파종기에 대비해 농사준비가 한창이었다. 여진족 농민들이 소에 쟁기를 끌어 밭을 갈고 있었다. 혹시나 식량이 부족할까 싶어 씨감자를 잔뜩 가져왔고 밀과 조 등 곡식 종자도 충분히 나눠주었다.
조선에서는 식사로 먹는 경우가 드문 좁쌀이 요즘 여진족들에게는 거의 주식이나 다름없었다. 평소라면 밀가루와 고기를 얻기 위해 밀농사와 목축을 하는데 전쟁이 길어지면서 원래 여진족의 주식인 물만두를 거의 먹지 못했다.
“그럼 수도를 옮겨야 되잖아요?”
“하지만 다른 곳은 겨울에 바다가 얼어붙어서 곤란해. 항구를 통해 상품을 운반하고 군대를 투입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여기밖에 없어.”
“무슨 말씀이세요? 이해하기 쉽게 해주세요.”
“방어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옮겨야 하지만 옮길 곳이 없어. 나중에 평화로워진 다음에 북쪽 넓은 평원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도 좋겠지.”
이민호가 시무룩해졌다. 아사달 남쪽의 포시예트만이 연해주에서 유일한 부동항이었다. 같은 만에서 동쪽에 위치한 자루비노는 도로 연결이 쉽지 않았다. 북동쪽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에 쇄빙선이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 기술로 만들기 어려웠다.
“주인님은 동해국이 장기적으로 조선과 대립하리라 생각하시나요?”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미래는 알 수 없어. 그리고 함경도 일부를 건주여진이 점령할 수도 있잖아? 만약의 경우에도 대비해야지.”
그때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원부사 오응태가 함경도 기병 40여 기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오 부사가 온 걸 보니 점심 먹을 때가 됐나보다. 우리도 내려가자.”
“아사달이 경원부하고 너무 가까워요.”
아사달 왕성은 경원부 성에서 10km 정도 거리였다. 말 타고 점심 먹으러 올 수 있는 거리였고, 실제로 경원부사 오응태는 거의 매일 같이 찾아왔다.
기병들이 말을 메어놓은 다음 마치 자기 집이나 되는 것처럼 식당 건물로 태연히 들어갔다. 어제까지는 이민호를 만나러왔다고 핑계라도 댔는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었다.
“오 부사!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뇨? 부사가 두만강 너머에 나와 있으면 경원부는 누가 지키겠소?”
“아! 전하! 요즘 번호나 적호나 죄다 함경도에서 빠져 나가는 바람에 함경도에 위험한 일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식사하러 잠깐 나오는 건데 뭐 어떻습니까?”
보통 조선군이라면 점심 때 집에 가서 따뜻한 밥을 먹고 좀 쉬다가 군영으로 돌아와 오후 근무를 했다. 군영 내 막사에서 재우며 공동으로 취사한 밥을 먹이는 것은 전시에나 가능한 가혹행위였다.
조선에서도 한때 내무반 비슷한 것을 지어 경군이 군영 내에서 생활하도록 했으나 돌림병을 이유로 예전처럼 주로 셋집인 민가에서 출퇴근하도록 했다. 사실은 고참이나 아전들이 병사들에게서 금품을 탈취하거나 쓸데없는 이유로 괴롭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이 힘겨운 훈련보다 내무생활을 더 거북해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진족들이 전혀 거리낌 없이 함경도 땅을 지나다니지 않소?”
함경도 땅을 가로질러 아사달에 온 자들이 백산부 사신들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두만강 바깥으로 해서 온성 북쪽을 빙 돌아서 오려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예? 여기서는 여진족들이 원래 그렇게 지나다닙니다. 떼 지어 다니며 조선인이나 번호 마을을 약탈하지만 않으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민호는 두만강을 현대 국경 개념으로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두만강에 얼음이 얼면 함경도에 사는 친척을 만난다는 핑계로 번호와 적호가 뒤섞여 다니는 곳이 함경도였다. 심지어 누르하치가 기병 1만여 기를 이끌고 함경도 안에 들어와서 다른 여진족과 싸우다 돌아가기도 했다.
다만 백두산 근처에서는 산삼을 캐러 국경을 넘은 여진족에 대해서는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쫓아내거나 죽인 사례가 있었다. 이 사건을 누르하치가 먼저 조선에 항의했으나, 조선에서 역으로 항의해서 누르하치가 여진족들에게 월경을 못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점심때마다 매번 오시는구려.”
“하하! 성을 지키느라 수고하는 군사들에게 고산국에서 나는 산해진미를 먹이고 싶어서 교대로 데리고 옵니다.”
오응태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오응태가 올 때마다 조선 소식을 전해주니 퉁명스런 말투와 달리 이민호도 은근히 오응태를 반겼다. 현재 왜군은 경상도로 남하해 울산 지역을 중심으로 집결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식탁에 앉은 기병들이 투구를 벗으니 절반이 여군이었다. 두정갑이나 찰갑을 입고 투구를 써서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여군 기병들은 16세 소녀부터 50대 아줌마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이민호가 기겁하자 오응태가 쑥스럽다는 듯이 변명했다.
“요즘 병력이 너무 부족해서 여자들까지 동원돼 성을 지킵니다.”
실록 1601년 2월 24일 기사에 ‘여인 옥잔(玉盞)에게도 활쏘기를 가르쳐 10번 쏘아 8∼9번을 맞히니, (중략) 변방의 여인들이 모두 성을 지키고 포를 쏠 수 있으니’ 운운하는 내용이 있다. 평안도 기생들이 말 타고 활 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함경도 여자들은 활뿐만 아니라 포도 쏜다.
“본관도 조선의 벼슬아치이지만 정말 할 말이 없소. 그대들의 아들, 남편, 부친이 비명에 가도록 하고 지금은 여인의 몸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쏘게 한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오.”
“아닙니다, 대감! 왜란 전에 평소에도 이랬습니다.”
이민호가 고개 숙여 사과하자 여군들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민호는 주방에 통보해 최고 좋은 음식을 내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병사들마다 모피와 면포, 은 열 냥씩을 선물로 주었다. 그들이 떠날 때 이민호가 눈물을 흘리며 손수건을 흔들었다.
“왜 그러세요, 주인님? 조선 여자들은 원래 다들 활 쏘고 말 타잖아요?”
“함경도와 평안도 여자들만 그래. 불쌍해. 민희 너도 불쌍해.”
이민호가 훌쩍거리며 민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의 고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자들이 활을 쏘고 성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기가 막혔다.
물론 민희나 민영을 비롯한 여진족 호위들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함경도에서 성을 지키는 여자들은 남자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나선 경우였다.
함경도에서는 국초부터 여러 차례 남부 지방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을 반복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었다. 함경도의 인구 부양력에 비해 인구가 많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도로 적은 것이 문제였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함경도는 물산이 부족하고 기후도 가혹해 생존 자체가 힘겨운데 여기에 과중한 군역과 부역에 시달린 탓이었다.
“전쟁을 끝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말이야.”
“가장 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쉽게 선택하기 어렵겠죠?”
누르하치를 비롯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모조리 군사력으로 제압해버리는 극단적인 방법이 있긴 했다. 이민호에게는 그럴 능력도 있었다.
“누르하치가 평지에 있다면 모르겠지만 산악지대에 웅거하고 있으니 공격하기 어려워. 9부 연합군이 군세는 건주여진보다 더 강하더라도 이기기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저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할 텐데, 전쟁이 싫다고 여진족 절반 이상을 죽일 수는 없지.”
남자들이야 전쟁에서 싸우다 죽을 수 있다지만 여자와 아이들이 전쟁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사고로 죽거나 굶어죽는다면 전쟁을 일으킨 명분이 없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적은 만주 땅에서 남자들 씨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민호 입장에서는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정복하지 않더라도 국경을 자주 침범함으로써 명나라의 기력을 최대한 빼주기 바랐다.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이 조선에 교훈을 심어줄 수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좋은 말로 타일러 전쟁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생각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누르하치는 조선에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사르후 전투에서도 명나라의 강요에 의해 강홍립이 이끌고 간 조선군과 싸우면서도 쉽게 항복을 받아주고 나중에 조선에 보복하지도 않았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과감하게 공격하는 홍타이지보다는 신중한 누르하치가 여러 모로 믿을 만한 상대방이었다.
“서쪽에서 대군이 몰려옵니다!”
망루에 오른 승마보병이 종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이민호가 얼른 성벽에 올라서 확인했다. 3만이 넘는 여진족들이 섬과 모래톱을 연결해 갈수기라 수위가 낮은 두만강을 넘어오고 있었다.
그 길로 갔던 오응태는 어째선지 여진족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도 통보조차 하지 않아 혹시 죽었을까 염려됐다. 아니면 경원부 성이 여진족에 포위돼 전투 중일지도 몰랐다.
그 사이 아사달 전체에 비상이 걸리고 승마보병들과 기마병들이 왕성 서쪽에 집결했다. 성벽에는 해병들이 올라와 실탄을 장전했다. 이민호가 소리를 질렀다.
“감동아! 공격하지 마! 적 아니야!”
“예! 자세히 살펴보니 백산부 사람들입니다.”
이민호가 나가서 백산부 여진족들을 맞이했다. 패륵들은 이민호에게 건주여진이나 해서여진으로부터 부족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이민호는 이들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남자가 너무 적습니다. 설마 그 동안 전쟁에 끌려가서 다 죽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사나이가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요. 원래 계획대로 전쟁에 참가할 예정입니다.”
이민호가 그럼 그렇지 하고 혀를 찼다. 여진족 남자들이 전쟁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다만 가족들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할 뿐이었다.
이민호는 패륵들과 함께 지도를 살피면서 백산 3부가 거할 곳을 정했다. 연해주에는 한카 호수를 비롯해 고기잡이를 할 만한 민물호수가 산재해 있었고, 6천 개에 달하는 하천이 높은 산 사이를 흘렀다.
대화해본 결과 압록강부가 연해주 모든 지역의 하천과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다른 2개 부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사냥과 약초 채집을 하기로 했다. 농업은 텃밭 수준이라 동해국에서 종자를 제공하고 농업 기술 전수를 해주기로 약속했다.
백산부는 아사달에서 하루를 쉰 다음 식량과 종자를 받아 동쪽으로 이동했다. 거주지를 마련하고 봄이 오기 전에 텃밭을 개간하는 것이 급선무라 쉴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이민호가 가서 살펴보기로 했다.
짧은 기간 동안 동해국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이민호는 급한 일을 대강 마치고 나서 병력을 이끌고 포구로 향했다. 수많은 여진족들이 나와서 칸과 군대를 열렬히 환송했다. 다음 목적지는 아이누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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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3편 간신히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