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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231화 (180/1,000)

00231  30. 섬에서 섬으로  =========================================================================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이긴 한데. 흐음!”

동해국이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주도권 다툼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으니 선택권이 많았다. 어느 한쪽을 지원해 이득을 취한다거나 양쪽이 계속 싸우도록 조장해서 결국에는 힘이 떨어진 양쪽 모두를 도모함으로써 어부지리를 취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동해여진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마당에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여진족 전체의 종주권을 두고 싸운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 되어 버렸다. 동해국은 어느새 동해여진 다수를 수하에 넣고 세력을 확장해 인구수로 전체의 10분의 1을 넘어서고 있었다. 정확한 인구집계를 할 수 없는 지역이라 대략 추정치만 이 정도였다.

물론 최악의 경우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합동으로 동해국을 공격하는 수도 있다고 이민호는 각오하고 있었다. 여진족의 합종연횡은 몽골족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고, 이 시기 여진족 부족 지도자들의 언행은 온통 음모와 배반으로 점철되는 경향이 있었다.

“칸이시여! 뭐가 걱정이십니까? 칸의 빛나는 막사 아래 그늘로 스스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칸께서는 강한 분이시니 약한 이들을 받아들여 지켜주십시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칸께서 만약 발해나 금나라를 이어받겠다고 선언하시면 모든 여진족들의 마음이 크게 진동할 것입니다.”

첨사 아오지와 친족인 만호 홍이와 만호 소타이가 이민호에게 건의했다. 이민호는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웃으며 누르하치에게서 후금이라는 이름을 가로챌까 아주 잠시 고민했다.

“나는 여진족이 아니라 원래 조선 출신인데 상관없소?”

“금나라 시조 아골타의 선조는 고려 사람이었습니다.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과 여진 두 나라를 아우를 수 있으니 더욱 좋습니다. 조선을 병합하지 못하더라도 조선과 관계를 든든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라에 도움이 됩니다.”

홍이의 말에 이민호는 조금 얼떨떨했다. 여진족 땅 전체가 극도로 민감한 시기에 괜히 왔다가 일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가 오기 전부터 여진족 수만 명이 동해국에 몰려와 있었다면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동해국이 건주, 해서와 함께 세 발 달린 솥처럼 정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잘못하면 건주여진이나 해서여진, 또는 양쪽 모두와 싸우게 생겼다. 그래도 이곳 위치가 워낙 절묘해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조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동해국의 확장을 당분간은 내버려둘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지금은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바람에 동해여진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임진왜란을 신경 쓰느라 건주여진의 성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동해국 영역에 들어온 여진족들 사이에서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예허부를 비롯한 9부 연합군 사이에 늦어도 몇 달 안으로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1593년 6월에 전쟁이 일어났고, 3만을 동원한 9부 연합군이 완패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말을 타고 달려온 감동과 감불이 이민호에게 인사했다. 그 뒤로 4천에 달하는 기마병과 승마보병들이 토성 쪽으로 몰려왔다. 이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기동훈련을 한 모양이었다.

“수고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작은 여진 부락 하나 토벌했다고 칭찬까지 들을 일은 아닙니다.”

“뭐? 자세히 말해 봐.”

“어? 모르셨습니까? 도련님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교역하러 오는 여진족들의 길을 막고 동해국에 귀부하러 오는 여진 부족을 방해했습니다. 저희들이 경고하니까 무시하고 선제 공격해오기에 어쩔 수 없이 쓸어버렸습니다. 자기들이 우디거의 일파라고 하던데 지금은 해서여진 울라부의 일을 대신 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우디거, 즉 실록에 기록된 우지개는 조선 초까지는 동해여진의 일파로 파악됐다. 그러나 현재는 해서여진 울라부에게 복속됐다고 보기에는 미흡하고 적극 협력하는 관계였다.

동해국이 동해여진 여러 부족들의 구심점이 되면서 강하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다가 그 일부가 이번에 도전했다가 호되게 당한 셈이다. 이민호가 어이가 없어서 뒷목을 잡았다.

“아이구 두야! 하필 이때 해서여진을 건드리면 어떡하니?”

“죽은 자들이 얼마 안 되니 교섭을 잘 하면 큰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는 건주여진을 공격할까요?”

이민호는 지금 이 단계에서 여진족 사이의 주도권 다툼에 참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함경도에서 며칠 머무는 사이에 감동과 감불에게 지휘권을 맡겼더니 이런 사단을 일으키고 말았다. 매사에 신중한 계복이 북경에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공격받기 전에는 공격하지 마! 됐다. 이제 내가 왔으니 군사작전은 나한테 물어보고 행동해라. 그런데 얼마나 죽였어?”

“천 명쯤 되나? 대충 그 정도입니다.”

“으윽! 해서여진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어떡하나? 그런데 저 사람들은 뭐냐?”

여진족 수천 명이 수레에 세간과 천막을 싣고 양떼까지 몰고 왔다. 넓다고 할 수도 있는 아사달 북동부가 두 부족이 끌고 온 가축으로 가득 메워졌다.

“한쪽은 동해국에 귀부하겠다는 부족이고, 그 뒤에는 성인 남자 대부분이 싸움에서 죽어서 생계를 책임져달라고 요구하는 우디거 소속 부락입니다. 해서여진 울라부나 우디거 다른 부락에 흡수되는 것보다는 동해국으로 오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으으! 알았다. 일단 숙영지를 건설하고 구호해줘라.”

귀부한 부락은 원래 흑룡강 상류에 살던 동해여진 부락이었다. 그 동안 해서여진 울라부에 흡수돼 용병 노릇을 하다가 계속된 전쟁으로 남자들 숫자가 줄어들자 더 늦기 전에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몽골인과 여진족의 혼혈이 많아 일반적인 동해여진과는 차이가 좀 있었다.

이민호는 군사들을 동원해 후춘 강변에 임시 거주지를 만드는 것을 도왔다. 두만강 동쪽 지류가 후춘이고, 아사달로 이름 붙인 이 지역 이름도 후춘이라는 것은 경원부사 오응태 덕택에 알게 됐다. 이민호가 기억하기로 훈춘 지역이었다.

누수가 되지 않는 공동변소를 가장 먼저 만들고 천막을 칠 자리를 다져주었다. 그리고 강변에 남녀별 공동 목욕탕을 만들고 물을 데워 목욕할 수 있도록 했다. 아직 추울 때이고 물을 신성시 하는 몽골족 관습을 이어받았는지 목욕하겠다는 이는 거의 없었다.

다음 날 백산부에서 사신들이 찾아왔다. 이민호는 토성 안에 미리 쳐놓은 커다란 천막에 초대해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은 물론 커다랗고 기상천외하게 생긴 열대 과일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사신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솔방울 사과라고도 하는데 속살이 달콤새콤하니 드셔 보세요.”

“저희들이 겨우 음식 대접을 받자고 조선 함경도 땅을 가로지르며 달려온 것은 아닙니다.”

사신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잘도 먹었다. 백산 3부의 사신들은 압록강부와, 이번에 반 건주여진 9부 연합에 가담한 주셔리부와 너연부 소속이었다.

백산부의 근거지가 백두산 주변이라 건주여진 가까이 자리 잡고 있어서 흡수될까 두렵다는 것이 그들의 고민이었다. 이들이 채취한 산삼을 거의 헐값에 빼앗다시피 건주여진과 교역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그래서 백산부 중에서 2부는 가까운 건주여진을 편들기보다는 오히려 9부 여진 연합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들은 나중에 건주여진으로부터 당할 후환을 두려워했다.

반대로 건주여진과 가장 가까이 접하며 살고 있던 압록강부는 오래도록 건주여진에 짓눌려 계속 백성을 빼앗기고 있는 입장이었다. 힘이 부족한 그들은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가혹한 현실을 저주하며 건주여진에 병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사실상 노예병사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압록강부는 건주여진에, 주셔리부와 너연부는 반 건주 9부 연합에 가담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부족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어느 쪽이든 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대립하고 있는 양쪽 군사연맹에서 하시라도 빠져 나오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전쟁에 종군해야 하니 젊은이들이 씨가 마를 지경이고 언젠가 크게 패하는 날이 오면 종족의 핏줄이 끊길 위험이 있어 두렵습니다.”

“압록강부는 주로 강에서 어로를 통해 살아가는 분들이시죠? 압록강은 두만강과 다릅니까? 옮길 수도 있지 않소?”

“두 강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만,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그 놈의 고향, 또 다시 고향 문제가 걸렸다. 그러나 종족의 생존 문제가 걸린 만큼 근거지를 옮기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생존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전하께서는 저희들에게 군사를 보내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내가 가진 병력으로 동해국 하나만을 지키기도 벅차오. 사실 내가 지켜야 할 곳이 많아 지금 이 병력을 동해국에 주둔시키지도 못한다오.”

이민호는 기마병과 승마보병들을 모두 데려왔으나 여진족 땅에서 전쟁이 있을 거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혹시나 일본이 아이누 섬을 점령하고 있을 경우 물리치기 위한 병력 동원이었다. 만약 병력을 총동원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큰일 날 뻔했다.

“그럼 저희들이 동해국으로 이주하면 받아주시겠습니까?”

“강은 이미 꽉 차 있고, 바다로 나가보는 것이 어떻겠소?”

“바다라. 여기 오면서도 바다를 조금 봤습니다만 사실 두렵습니다.”

“안전하게 커다란 배를 제공하겠소. 안내를 붙여줄 테니 잠시 후에 포구에 가서 얼마나 큰 배를 몰고 다니는지 구경해보시오.”

주셔리부와 너연부는 산악지대에서 살아온 여진족들이었다. 산삼 채취가 가장 큰 산업이긴 하나 건주여진에게 약탈당하다시피 하는 상황에서는 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민호는 이들에게 아사달 동쪽으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의 연해주 땅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백산 3부를 당장 이주시키지는 않았다. 사신들도 건주여진과 9부 연합의 싸움 경과를 지켜보면서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양쪽 세력 모두에 양다리를 걸친 백산부의 미래가 밝지 못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들은 결국 이주를 선택할 것으로 이민호는 예상했다. 언덕 너머 포구를 보고 돌아온 백산부 사신들은 많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특히 압록강부 사신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동해국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내부적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이틀 후에 동가 공주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득달 같이 아사달로 달려왔다. 동가 공주의 추종자이면서 주로 해서여진 출신인 각 부족 유력자들이 이민호를 눈빛만으로도 죽일 기세로 쏘아보았다.

“전하! 죽은 여진족은 좋은 여진족이었는데 어찌 하여 전멸시키셨습니까? 저를 보세요. 제 눈을 피하지 마세요.”

“그게, 그쪽이 먼저 공격해서 어쩔 수 없었다오.”

이민호가 동가 공주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가 공주는 이민호 얼굴 앞으로 자꾸 몸을 옮겼다.

“적당히 싸우다 서로 물러설 수 있었는데 단번에 전멸시켜 버렸다면서요? 제 얼굴을 보고 말씀하시라니까요!”

“4천 명이 총을 딱 한 발씩만 쐈는데 다 죽어버렸다고 들었소. 알았소. 제발 면사를 내려주시오.”

최강의 앵벌이 동가공주는 면사로 얼굴 대부분을 가려도 그저 눈빛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꾹 참고 버텼다. 그런데 이민호는 동가공주의 고모를 깜빡했다.

“동가공주께서는 전하를 사모하고 계신데 어이하여 전하께서는 건주여진에게 좋을 일을 하셨는지 모르겠사와요.”

“으윽! 오셨소?”

이민호가 고모에게 더욱 쩔쩔 맸다. 그런 이민호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누르하치였다. 누루하치는 담이 큰지 큰 전쟁을 앞두고 적대세력이 될 수도 있는 남의 진영에 아주 편하게 들락거렸다.

동가공주의 추종자들은 이 자리에서 누르하치와 이민호를 척살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민희를 비롯한 호위대가 권총을 빼들자 칼집으로 가던 손이 동작을 멈췄다.

“하하! 국왕전하께서 얄미운 우디거를 혼쭐 내줬다면서요? 어? 잠시만 처제하고 인사 좀 나누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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