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30화 (179/1,000)

00230  30. 섬에서 섬으로  =========================================================================

17세기 초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모직물을 팔러 왔으나 인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동인도회사는 거꾸로 품질 좋고 가격이 싼 캘리코 면직물을 대량 수입해서 영국에서 팔아 이익을 올렸다. 싸고 질 좋은 인도산 면직물 때문에 영국의 모직물 공업이 한때 망할 위기에 처할 정도였고 영국 의회가 나서서 면직물 수입을 법으로 막기도 했다. 상식과 달리 동인도회사는 수출업체가 아니라 수입업체였다.

이민호는 모직물을 미리 만들어서 영국제 모직물 수입을 줄이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유럽에 공세적으로 모직물을 수출해서 영국에 대한 확실한 무기를 확보하려는 의도로 모직물 공업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사실 이 시대 동양에서 모직 의류는 인기가 없었고, 양탄자를 인도나 아랍 지역에 파는 것 말고는 판로가 제한되는 품목이었다.

19세기에 영국은 방직기 등 기계를 활용해 훨씬 값 싸게 제조한 면직물로 동아시아의 수공업 면직물 산업을 말살시켰다. 이와 반대로 이민호는 17세기 초반에 모직물 수출로 영국의 산업체계 전반을 무너뜨릴 전략을 갖고 있었다.

“유럽에 털실 옷을 팔기 위해 백두산 밑에 양 목장을 세운다고 하셨죠? 하지만 아직 유럽으로 가는 항로 개척도 못했어요. 주인님은 항상 너무 멀리 보세요.”

“그러게 말이다. 항로 개척이 늦어지면 그 동안 에스파냐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지 뭐.”

이민호가 우려하는 동인도회사는 영국에서 아직 생기지도 않았다. 영국보다는 당장 네덜란드를 막는 게 급했고, 그 전에 일본을 정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니, 임진왜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사건이 참 많은 시대였지만 이민호는 급한 것부터 일단 차근차근 해결하기로 했다.

다시 배를 타고 북상해서 다음 날 아침 동해국에 도착했다. 부빙이 녹아 없어져서 야간 항해가 충분히 가능했다.

한두 달 더 지나서 얼음이 녹으면 북태평양 연안 지역으로 탐험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희생을 각오해야 해서 이민호는 고민이 많았다. 이민호가 직접 탐험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상전벽해네.”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돌아왔는데 벌써 포구에 선착장과 대형 창고가 갖춰져 있었다. 먼저 보낸 전선과 수송선들이 선착장을 가득 메웠고, 상품이 언덕길로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칸! 저희를 위해 돌아오셨군요! 기체 후 일향, 하여튼 칸께 인사 올립니다.”

“칸은 또 뭐요? 아 첨사도 잘 지내셨소?”

“저야 늘그막에 호강하고 있습니다.”

추장 아오지가 포구에 천막을 쳐놓고 이민호를 이틀 동안 기다렸다고 한다. 아오지는 고산국 병력은 현재 언덕을 넘어 시장 옆 토성에 주둔하고 있고, 감동과 감불이 기마병 수천을 지휘해 북쪽으로 떠났다고 보고했다. 이민호는 감동과 감불이 아마 훈련을 실시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추장과 함께 언덕길을 넘으니 그 사이 시가지로 변한 들판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추장 아오지는 시장이 열린 지역에 아사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이민호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거 옛날에 고조선의 도읍 이름 아니오?”

“아사달이 옛날에 있던 이름이었습니까? 저는 그냥 옛말로 첫째 땅,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는 뜻으로 생각 없이 붙인 이름입니다. 칸께서 언제든 수도 이름을 바꾸십시오.”

“그런 뜻이오? 이름이 좋소. 아사달로 합시다.”

지난번에 지어둔 토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고, 오히려 두 배 이상 확장됐다. 첨사 아오지와 그의 친족 추장 홍이와 소타이의 일족이 들어와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토성 앞에 시장이 열려 있는 것도 여전했다. 제대로 가게 건물이 세워져 있어 두 달 전보다 훨씬 그럴 듯했다.

그러나 강 건너 들판 곳곳에 수많은 천막이 쳐져 있고 여진족과 몽골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동해국의 시장에서 교역하기 전에 자기들끼리 먼저 물물교환 형식으로 교역을 하는 시장 세 군데가 따로 생겨서 활발히 거래 중이었다.

“두 달 만에 이렇게 많이 모인 거요? 어느덧 도시가 됐군요.”

“여진 땅에서는 유목민이든 농민이든 대부분 말을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칸께서 오신다 해서 특히 많이 몰려왔습니다. 지금도 달려오고 있습니다.”

몰려든 여진족들을 보고 이민호는 많이 놀랐다. 성인 남자들만 모아도 2만 명은 넘어갈 것 같았다. 명나라에서 요동에 개설한 호시나 마시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 물론 모두가 교역하러 온 상인들은 아니었고, 다른 목적을 가진 자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교역을 하러 왔기 때문에 각자 소속이 달라 같은 편이 될 리는 없지만, 만약 이들이 같은 목적으로 전쟁에 나선다면 이 시대 그 어느 나라라도 몹시 버거워할 것이 틀림없었다. 여진 일만이 모이면 천하가 감당할 수 없다는 중국 속담이 있는데 자그마치 2만 이상이 모여서 이민호는 사실 속으로 겁이 많이 났다.

“주인님은 뭘 그리 걱정하세요? 주인님 밑에 총과 대포를 가진 기마병이 5500에 해병이 2천이에요.”

민희가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러나 기마병이라고 한 5500명 중에서 5000명은 사실 승마보병이었고 그 중에서 2천 명은 아직 말 타기가 서투른 흑인 보병들이었다.

“아 첨사! 건주좌위 지휘사와 협의한 내용은 잊지 않고 계시지요? 누르하치하고 맺은 협정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내가 계속 여기에 있으면서 동해국을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예, 칸. 말은 5만 필이니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모피는 겨울 모피의 품질이 훨씬 좋으므로 3월 하순까지 올해 교역 한도를 소진시키려 합니다.”

“모피 교역은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산더미처럼 쌓인 모피가 수레에 실려 끊임없이 언덕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표범 가죽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수달피가 눈에 띄었다. 이 정도 물량이 유럽 시장에 매년 꾸준히 풀린다면 러시아는 우랄 산맥을 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이누 섬에서도 이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모피를 구할 수도 있었다.

협정은 이민호와 누르하치가 체결했지만 수출입 물량 한계 위주인 협정 내용을 준수해야 하는 쪽은 오직 동해국뿐이었다. 그리고 신뢰의 문제가 있었는데 아오지 첨사가 매일 시장 입구에 현재까지 무역한 누적 수량을 공지했다. 건주여진에서 파견한 사신이 자꾸 귀찮게 하기에 아예 시장 입구에 매일 발표해버렸다고 했다. 아주 잘했다.

이민호는 말을 타고 지나면서 토성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면적만 넓어진 게 아니라 성벽이 더 높아지고 성문 등 중요한 곳 일부는 커다란 돌을 가져와서 쌓았다.

총병 위주인 고산국 병사들을 위해 성벽 위쪽에 총안구를 내는 노력도 했다. 아오지 첨사의 마음 씀씀이가 세세해서 이민호가 많이 놀랐다.

“쌀과 소금, 농기구는 무제한으로 풀고 있습니다. 칸의 물력이 무궁무진하여 여진 땅에 퍼진 명나라의 은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현물이나 상품 말고 은은 얼마나 모였소?”

“지난 두 달 동안 겨우 4만 5천 냥밖에 안 모였습니다. 칸께서 지시하신 대로 은보다는 상품 위주로 받아들여서 은의 양이 적습니다.”

“컥!”

여진족 전체가 명나라와 조공 무역을 통해 얻고 마시에서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해 얻는 은을 합해 1년에 겨우 1만 5천 냥이었다. 명나라와의 조공무역 사절단은 해서여진이 천 명이었고, 건주여진은 처음에 500명이었다가 나중에는 1500명으로 늘렸는데도 은 유입량이 겨우 그 정도였다. 단번에 일 년 치의 세 배를 빨아들이면 누르하치가 가만히 있지 못할 것 같아 이민호는 걱정이었다.

시장 앞 공터에 도착하니 조선의 수은갑과 비슷하게 번쩍번쩍한 갑옷을 입은 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모두 이민호를 기다리는 여진족 추장들이었다.

“동해국을 건국하신 고산국왕 전하께 멀리 북쪽 실카 강변에 사는 마을에서 하례 드리러 왔습니다. 정식 사절이 아니라 교역을 하다가 인사드리게 되다니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소. 교역을 통해 이익과 우호를 나눕시다.”

실카 강은 아무르 강, 즉 흑룡강 상류의 몽골 쪽 지류였다. 참으로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왔다. 나중에 들어 보니 시베리아 지역까지 이 시장에 대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이민호는 여진 여러 부락에서 찾아온 추장들, 또는 상인들과 인사하면서 준비해온 비단과 산호, 공작 깃과 차와 설탕 몇 봉지씩을 선물로 나눠주었다. 열대 바다에서 난 산호가 추운 지방에서는 보물 취급받는다더니 정말이었다. 유리 상자 안에 든 시뻘건 산호가 뭐가 좋은지 선물 받은 추장들이 몹시 기뻐했다.

“과연 국왕전하께서는 배포가 크십니다. 그 비싸다는 투명한 유리 상자를 주시다니요. 안에 든 시뻘건 것이 다 보이는 게 신기합니다.”

“쿨럭! 그 시뻘건 것이 산호라고 합니다.”

“아! 보물을 보물에 담아서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혹시 남쪽 먼 나라에 산다는 물소의 뿔을 구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본직은 조선국의 대신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궁각(弓角)을 팔면 경을 치게 된다오.”

“아하! 정말 아쉽습니다.”

유리 상자 다음으로 인기가 좋은 것이 공작 깃털이었다. 기다랗고 화려한 공작 깃을 털모자에 달면서 다들 아주 좋아했다. 선물을 받은 여진족 추장들이 이민호에게 칭송을 그치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궁벽한 산간지대에서 웅크리며 병사들을 모으고 있다지만 여진과 몽골의 땅에서 대칸이 되실 분은 전하밖에 없다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허! 과찬이시오.”

“이런 비싼 물건을 저희 같은 작은 추장들에게도 내려주시니 은혜가 넘칩니다. 저희들을 수하로 받아주시면 만세를 이어 충성하겠습니다.”

“예?”

이민호가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인지 아오지 첨사를 불렀다. 역시나 선물은 핑계였고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예허부를 중심으로 한 해서여진이 건주위를 치려고 여진과 몽골 여러 부족과 동맹을 강화하고 야인여진 부족들에게 복속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커다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 중소 부족들이 다들 피하려고 합니다. 마침 칸께서 오셨으니 칸 밑에서 보호를 받으려는 모양입니다.”

예허부의 지도자 부자이(布齊)는 동가공주를 내세워 하다의 멍거불루, 울라의 만타이, 호이파의 바인다리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형성했다. 몽골의 코르친과 시버, 괄차, 그리고 건주여진 백산3부 중에서 주셔리부와 너연부도 가담했다.

이 와중에 강한 여진 부족들이 동해여진이나 소속이 불분명한 여진 중소 부족들을 압박하며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건주여진 또한 강하기 때문에 후환이 두려운 약소 부족들은 아예 거주지를 동쪽으로 옮기거나 이렇게 동해국에 귀부한 경우도 있었다.

이민호가 누르하치를 만나 동등하게, 혹은 아래로 굽어보면서 협정을 맺은 것도 여진족의 작은 부족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약소 여진 부족들은 기존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양대 각축장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이민호가 세운 동해국을 중심으로 뭉쳤고, 기존의 동해여진 부족들도 동해국을 핵으로 삼아 강하게 결집하고 있었다.

“국왕전하! 저희들은 백산에서 온 상인들입니다.”

“오! 조선의 이웃이구려.”

백산은 백두산을 뜻했다. 백산 3부에는 압록강부, 주셔리부, 너연부가 있었다. 건주여진 소속이라 하지만 건주 5부와는 애초에 다른 독립 세력이었다.

“전하께서는 두만강 주변에 사는 동해여진들을 따스하게 보살피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건주위의 누르하치와 해서여진 후룬의 패륵들이 저희들에게 복속하라는 압력을 강하게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추장들이 동해국과 동맹을 맺고 싶어 합니다. 혹시 만나주시려는지요?”

“사신을 만나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본직이 항상 동해국 아사달에 있는 것도 아니요.”

“전하께서 여러 나라를 갖고 계시니 바쁘시겠지만 올해가 여진 땅의 향방이 결정될 중요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조만간 사신을 파견하도록 저희 추장에게 건의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여진족들이 갑자기 동해국으로 몰려오니 이민호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여진족을 고산국이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더운 곳에 기병을 데리고 가봤자 말이 돌림병에 걸려 전력이 급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방의 땅에서라도 인구가 늘어나니 이민호는 진심으로 기뻤다.

============================ 작품 후기 ============================

에휴... 또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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