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8 30. 섬에서 섬으로 =========================================================================
“어쨌든 좋다. 그러나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그 땅과 바다에서 나는 것을 잡아가면 안 된다는 것은 애들도 알고 있을 터, 너희들에게 벌을 내리겠다.”
“나리! 죄송하지만 땅에서 나는 것이야 그렇다지만 이 물개들은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 아닙니까? 이 바다 저 바다 돌아다니니 주인이 없습니다. 어디서든 잡아도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너희 마을 앞바다에 그물을 치고 물고기든 조개든 다 잡으면 좋겠냐? 물고기는 네 말처럼 돌아다니니 주인이 없겠네?”
“그건 아니지요. 그건 당연히 우리 겁니다. 우리 마을에 가까이 있는 물고기를 어찌 남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까?”
일본인이 또 네 건 내 것, 내 건 내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항상 같은 패턴이라 더 이상 대화해봤자 짜증만 날 것 같았다. 이민호가 해병들에게 손짓을 했다.
“알지?”
“물론입니다, 전하.”
왜인 어부들을 납득시킬 필요 없었다. 이민호는 해병들을 시켜서 그냥 곤장을 쳤다. 왜인 어부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쳤다.
국경을 지키려면 적당히 공포가 필요했다. 경계선을 넘었을 때 손해를 확실히 봐야 다시는 넘어오지 않는다. 백령도나 연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명나라 어선들도 언제 한 번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물론 이곳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였다.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백성을 지키려는 공도정책이 영토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민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울릉도를 조선으로부터 빼앗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물개과에서 강치는 바다사자아과에 속했다.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 강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탈할 때 일 년에 만 마리씩 잡아 거의 멸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할 때 도구로 삼았다.
즉 1904년 9월 오키 섬의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가 막부에 독도를 영토로 편입해달라고 청원했으며, 막부는 이를 기화로 1905년 1월 각료회의 결정을 거쳐 독도를 오키 섬에 부속시켰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는 신문에 보도하여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도록 했다지만 지방신문에 보도한 수준이라는 설명은 하지 않는다. 대한제국에 알려질까 두려워 쉬쉬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인 어부들에게 곤장을 치면서 취조한 결과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강치의 가죽이 품질이 좋아서 일본에서 비싼 가죽제품의 재료가 된다고 했다.
가격을 물어보니 강치 가죽은 소 한 마리 가격의 14배에서 20배 정도나 비싸다고 했다. 20세기 초반 독도에서 일 년에 강치 1만 마리를 잡은 인간은 소 수십 만 마리를 매년 팔아먹은 셈이었다.
그리고 강치의 기름도 호롱불을 키는 연료로 사용됐다. 나중에는 강치의 기름이 화장품이나 비누 원료로 사용됐다. 그러나 강치의 살은 밭에 비료로 쓴다고 했다.
어떻게 강치를 잡느냐고 물어보니 먼저 새끼를 그물로 잡아 울게 해서 암컷들을 유인해서 잡고, 마지막에 수컷이 구하러 오면 창칼로 찔러 죽인다고 했다. 강치 일가족을 이런 식으로 몰살시키면서 잡으니 실제 역사에서 금방 멸종해버렸다.
“나리! 노인과 아이들은 용서해주십시오. 곤장 맞다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범법자에게 예외는 없다.”
열 받은 이민호가 애고 노인이고 가리지 않고 남김없이 곤장을 쳤다. 배 세 척에 타고 온 왜인 20여 명이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엉덩이를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다음 날 아침 해병들을 사방으로 보내 울릉도를 수색시켰다. 옛날에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은 있었으나 왜인들이 거주하지는 않았다. 바다 한가운데에 있어서 의외로 기온이 높은 편이었다.
“울릉도에 연료가 될 작물을 재배하고 쇠여물을 구했으면 좋겠어요. 중간 기지로 좋지 않아요?”
“그럼 좋지. 서해안에 한 것처럼 100리마다 참을 만들어 보급을 추진하도록 할까?”
민희 말대로 울릉도가 동해 중앙에 있으니 동해국이나 아이누 섬과 무역하는 배가 지나가면서 연료를 보충하는 중간 기착지로 적당했다. 조선과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 대안으로도 훌륭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도대체 누가 이런 절해고도에서 근무하고 싶어 할까 의문이 갔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하기 위해 100리마다 보급 거점을 만드는 문제도 고민해봤다. 아이누 섬에서 캄차카 반도, 그리고 알류산 열도에 중간 보급기지 몇 곳을 만들면 소가 돌리는 외륜선으로도 충분히 북미 대륙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이론상 가능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온 세상에 외륜선이 갈 수 있겠어요!”
“한 방향으로 300개쯤 필요하겠다. 최소한의 자체방어를 위해 백 명씩 근무해도 3만 명이 필요해. 그런데 북쪽은 겨울이 길어서 연료든 쇠여물이든 남쪽에서 추진해줘야 해.”
“보급참에 보급을 해주기 위한 보급선이 몇 십 척이나 필요하다는 말씀이죠?”
“그래. 몇 백 척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아쉽지만 그 안건은 기각이야.”
고산국 전 국민을 보급참이나 그곳에 보급을 해주는 배에 배치하지 않는 이상 축력을 이용하는 외륜선으로 태평양을 건널 수는 없었다. 이민호는 얼른 기관을 더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브루나이가 요즘은 자꾸만 꿈에 나타났다. 얼른 석유를 얻어야 제대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만간 호주나 아프리카, 북미 대륙으로 진출할 예정이었다. 이제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단계를 넘어서야 했다. 그러나 생각만 하고 수단이 따라주지 않아 이민호는 몹시 답답했다.
이 시기 유럽에서 대항해시대 운운하며 대양항해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해안선을 눈으로 관찰하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시기였다. 순수하게 바람과 해류의 도움을 받아 항해하는 진정한 대양항해는 일부 구간에서만 이뤄지고 있었다.
나머지 배들을 울릉도에 남겨두고 이민호는 전선 몇 척만 데리고 독도로 향했다. 울릉도에서 강치를 잡다가 붙잡힌 왜인들은 왜선에 태워 전선 꽁무니에 매달고 끌고 왔다.
왜인들은 다들 뱃전에 엎드려 있었다. 곤장 맞은 붓기가 가라앉는 데에 며칠 걸릴 테니 그 동안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었다.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독도에 도착했다. 독도 해변을 가득 메운 강치 5~6만 마리가 처음 보는 거대한 배들을 발견하고 시끄럽게 울어댔다. 이민호는 정오가 되기 전에 배를 사방으로 보내 경도를 측정시키고 해도를 작성하도록 했다.
이민호는 왜선 세 척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엉덩이를 잡고 끙끙 앓는 왜인들에게 이민호가 타일렀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예. 거대한 배들을 이끌고 다니며 일본 해안 마을을 모조리 초토화시킨다는 바다괴물 전하이십니다.”
“푸핫!”
일본어 통역관을 겸하는 2등항해사가 통역하는 순간 민희와 민영이 내뿜었다. 일본 에도시대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상징하는 조선의 바다괴물을 가토 기요마사가 때려잡는 내용의 가부키가 만들어져 인기리에 공연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가 신화로 변했다.
“그래, 그래. 내가 시간이 좀 남으면 시마네와 오키를 초토화시키겠는데 말이야.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어?”
“예! 전하!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다시는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않겠습니다.”
서거나 앉아서 노를 저을 수 있는 왜인이 몇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배 세 척에 탄 사람들을 한 척으로 몰아넣고 식량과 물을 주어 풀어주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북풍을 타고 일본 땅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표류하다가 굶어죽거나 물에 빠져 죽으면 그것도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고산국 함대는 밤새도록 항해해서 다음 날 아침 함경도 단천에 도착했다. 이민호는 영덕 어부 김 절충을 만나 함경도의 현황을 들었다. 김 절충이 전라도 창고에 보관했던 쌀을 꾸준히 함경도로 옮겨오고 있어 함경도에 식량 여유가 많이 생겼고, 동해국과의 무역에 대비해서도 재고가 충분하다고 보고했다.
이민호는 상선들을 두만강 하구 동쪽의 동해국으로 먼저 올려 보내고 오전에 단천군 관아에 가서 군수 강찬을 만났다. 이민호가 병마평사 정문부 등과 함께 북관대첩을 이룰 때 왜군 점령지역인 함경남도에서 따로 열심히 싸워서 많은 전공을 올린 수령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이민호가 임금의 어지를 전하자 군수가 서쪽으로 절을 하고 공손하게 받들어 읽었다. 어지는 조선 조정이 고산국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내수사 소유의 은광을 이민호에게 넘겼으니 개발하는데 협조하라는 내용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국사를 위해서라지만 주상전하께서 왕실 재산을 내놓으시다니! 이럴 수가! 소신은 정말 감격했습니다.”
“저도 엄청나게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사실 선조 임금이 의외로 흔쾌하게 은광을 넘겨주었다. 욕설 정도로 자식의 목숨이 달린 문제라고 볼 수는 없으니 아마 권력을 지키기 위한 임금의 행동일 것이라고 이민호는 이해하고 있었다.
“요즘 천조의 장수들이 국왕전하께 은을 캐도록 강요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천조에서 조공품으로 빼앗아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혹시 제가 다른 곳에 은이 나는지 미리 찾아봐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대인께서 하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소. 조정에 자금이 남아있지 않으니 조만간 다른 지역에서도 광산에 대한 금령이 어느 정도 풀릴 것 같소. 군수도 은광을 찾아 조정에 은을 바치면서 남는 은으로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쓴다면 훌륭한 목민관이 될 수 있을 거요.”
1593년 8월 3일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단천(端川)에서 생산되는 은은 평소부터 품질이 좋다고 소문이 났었으니 이제 금령(禁令)을 풀고 채취를 허가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또 관채(採彩)하여 상납하는 수를 늘리게 하여 국용에 충당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실제 역사에서도 1593년부터 본격적으로 금광과 은광이 개발되었다. 이것은 이민호의 부친이 이미 알려주었고, 그래서 이민호가 몇 년 전부터 부평이나 가평 등 금과 은이 나는 지역의 산을 꾸준히 사들인 이유였다.
이민호는 조선의 골드러시에 참가할 계획이었다. 조만간 가평에서 잣만 수확하는 게 아니라 금도 채굴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물론 단천은광 만한 생산량을 올린 곳은 몇 군데 없었다.
“제독총병관 대인께서 조선을 어루만져 주시는 손길이 참으로 따스합니다. 군대만 동원하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조선에 음양으로 꾸준히 지원을 해주셨군요. 전쟁 기간 동안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은 것은 모두 대인의 덕택입니다.”
“사례는 이만 하시고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합시다. 단천은광은 오래 전부터 은이 나오는 곳으로 이미 소문이 났으니 군수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리 은이 많이 나온다 해도 설마 150만 냥, 아니 두 곳에서 30만 냥을 뺀다 해도 설마 은광 한 곳에서 135만 냥이나 나오겠습니까? 은광을 경영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어서 은이 난다 해도 반드시 이득을 보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호구로 보는 익숙한 눈빛을 느낀 이민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단천은광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알고 있었다.
“지금 조정이나 왕실에 돈이 없으니 제가 도와드린 금액을 돌려받을 길이 없습니다. 은이라도 캐서 손해를 벌충해야지 어쩌겠습니까?”
“대인께 은혜를 갚는 일이니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양심상 미안해서 호구에게 적선하는 셈 치는지 군수 강찬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덕택에 이민호는 먼저 은광까지 수레 두 대가 교차 통행할 수 있도록 폭이 넓은 도로를 내달라고 쉽게 부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력 동원에 대해 군수와 의견을 나눴다.
“함경도에 왜적이 진주한 이래 모든 것이 무너져 얼마 안 되는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부역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광산까지 연결될 산길 도로를 넓게 닦으라 하시니 백성들이 흩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미 어명이 내려왔고 함경도 백성들이 대인께 은혜를 입기도 했으니 열심히 대인을 도와드려야지 어쩌겠습니까?”
물론 은광 개발을 위해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키면 다른 잡역을 줄여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함경도 산악지역에서 도로를 닦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조만간 광부 일을 부역으로 하게 된다면 백성들의 불만이 커질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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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