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6 30. 섬에서 섬으로 =========================================================================
여수에 도착해 그 동안 소모한 총탄과 포탄, 연료 등 보급품을 적재하고 아이누 섬과 동해국에 보낼 상품을 배에 실었다. 고산국에서 계속 보급품과 화물을 실어 날라서 이를 보관하기 위해 해동상단 여수지점이 관리하는 대형 창고가 꾸준히 늘어났다.
보급품과 상품을 적재하면서 남는 시간에 이민호는 겐타로가 보낸 보고서를 읽었다. 풍신수길이 연초부터 큐슈 북쪽의 나고야 성에 갔다가 조선으로 직접 건너가겠다고 떠들어대고 있단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아직 오사카에 있으며 조선으로 도해는 물론 나고야로 갈 마음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겁이 많은 자가 큰소리만 치고 있었다. 관동 어느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풍문이 돌고 있다고 했다.
보고에 따르면 이와미 은광을 경비하는 병사가 1천 명으로 증원됐다. 그러나 무너진 갱도를 복구하는 공사 중이라 은광석 채굴은 아직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점령해봤자 빼앗아 올 은이 없을 테니 흥미가 떨어져서 이번에는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고산국과 해중국, 해남도와 필리핀 바기오에서 일이 잘 되어가고 있었다. 혜영이 요약해서 보내준 보고서를 읽고 나서 이민호가 간단히 답장을 달았다. 운남성에 사는 묘족 등 여러 소수민족에게 더 접근할 것, 그리고 바기오 주변 필리핀 마을들과 친해진 것은 좋은데 가능하면 조차지 살짝 안쪽으로 마을을 이주시킬 것 등이었다.
두 번째는 고산국 조차지 안에 마을을 세움으로써 인명을 보호하고 생업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필리핀 북부는 에스파냐의 개척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고, 강압적인 지배와 포교로 인해 가끔 라자나 술탄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수에서 하룻밤 머물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한산도로 출발했다. 마침 장기간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삼도수군통제영 함대와 통제사 이순신이 탑승한 상선(上船)을 포구 앞에서 만났다.
조선 수군이 수시로 가덕도와 대마도를 틀어막고 있으니 왜선들은 함부로 조선에 접근할 수 없었다. 왜선들은 조선 수군 앞에서는 군선이 아니라 마치 밀입국하거나 밀수하는 배들처럼 되어 밤에 몰래 접근하거나 쫓겨 다녔다.
화력이 강화된 조선 수군이나 고산국 함대를 일본 수군이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했다. 시간이 갈수록 왜선들은 소형 경량화하고 속도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원래 역사에서 세키부네가 판옥선에 대응하기 위해 대형화한 것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국에서 그 동안 보충병을 보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내는 족족 통제사 형님께서 죄다 수장시켰군요.”
“다는 아니겠지. 경상우병영과 의병들도 꾸준히 왜적들을 잡고 있으니까. 암초나 모래톱에 좌초될 각오하고 밤에 해협을 건너 아무 데나 몰래 상륙시키는 모양이야.”
한산도 통제영에 도착한 이민호가 이순신을 만나 그 동안 삼도연합수군이 올린 전과를 살폈다. 2월 들어서 출동할 때마다 하루에 수십 척의 왜선이 잡혔다. 2월 말이 되어 가면서 하루에 잡히는 왜선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이것은 왜군 지휘부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이민호에게 강하게 심어 주었다.
부산과 김해 죽도 등 상륙교두보를 잃은 왜군은 조선 해안 이곳저곳에 분산 상륙하는 도중 조선 수군에게 공격을 당해 수많은 선박과 인명 손실을 입고 있었다. 상륙한 뒤에도 재수 없이 경상우병영의 기마병에게 걸리면 몸 숨길 곳 없는 바닷가에서 꼼짝없이 몰살당했다.
울산왜성은 완전 초토화됐는데도 왜군은 어떻게든 마지막 남은 교두보에서 버티려고 했다. 이응화가 지휘하는 통제영 유군 함대의 포격을 받으면서도 왜병들은 악착같이 도산의 왜성을 지켰다.
처절함이 적에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민호는 느꼈다. 만약 아군이 적에게 포위당해 고립된 채 장기간 처절하고 비장하게 싸운다면 멋진 게 아니라 상부에서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라니까요. 형님한테는 공짜로 도와드릴 게요. 제발 도와드리고 싶어요!”
“돈을 주고 사면 되니까 수군에 신경 쓸 것 없네. 자네 덕택에 아직 수군 재정에 여유가 넘치네.”
“아~ 참! 너무 능력이 있어도 탈이라니까요.”
“고산국에서 발행한 금화와 은화에 새긴 사람 얼굴이 통지 자네 맞지? 자네 얼굴가죽 참 두껍네 그려.”
“으윽!”
이민호는 난중일기에 자주 등장하고 싶어도 이런 식이면 출연 기회가 줄어들 것 같아 아쉬웠다. 전쟁 전에 전라좌수영에 천일염전과 둔전, 철장 등 경제적 기반을 조금 갖춰줬더니 이순신이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재정자립도 100퍼센트를 이뤘고, 심지어 남는 쌀로 피난민들을 구호해주기도 했다. 다른 병영이나 수영에도 이민호가 똑같이 지원했는데 유독 전라좌수영만 잘 운영하고 있었다.
조선에는 이민호보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꽤 흔했다. 이런 인재들을 거두어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고산국의 발전에 탄력이 붙을 것 같아 이민호는 눈에 불을 켰다. 그래서 고산국에서 일할 젊은 인재를 소개해달라고 이순신에게 졸랐다.
“통지 자네가 인재를 구하는 뜻은 알겠는데 말이야. 인재란 편안한 고향에 있어도 출세하거나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네. 그런 사람들이 어째서 만리타향에 나가 고생하려 하겠나?”
“그러니까 진취적인 젊은 인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고산국에 신분제가 없으니 양반 자제들이 안 가려고 하는 게 당연하네. 그러니 돈 말고 좀 더 그럴 듯한 것으로 유인해 보게. 명분이라든가, 명예라든가, 아니면 보람차고 뿌듯한 다른 것도 있겠지.”
“그렇군요. 그래서 양반이 고산국으로 이민 오지 않았군요. 오늘 느끼는 게 많습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교육받을 기회를 충분히 가진 소수 기득권층에서 그 나라에 필요한 인재 대부분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그 인재들이 출세해 기득권층을 유지, 확대했다. 바로 이것이 이민호가 고산국으로 인재를 끌어들이기 어려운 이유였다. 양반들의 신분적 특권을 인정해주고 싶지 않으면서도 조선 양반층이 배출한 인재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 모순이었다.
한국만 해도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평등을 강조하는 현대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 삶의 출발점이 될 교육의 기회균등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정부에 돈이 남아돌아서 대학원 학비까지 무료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실현하려는 입장에서 교육기회의 균등을 위한 지원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교육은 투자에 대한 효과가 확실히 드러나는 분야였다. 교육비를 많이 투입할수록 더 훌륭한 인재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식이니 고산국의 관리층 다수를 차지한 조선의 서얼 출신도 자질과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교육에 대한 투자액에 따라 같은 양반층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식년 무과 동기인 이순신과 이경록 등을 보면 별시 무과 출신자들과 확실히 능력 차이가 드러났다. 두 사람은 고을 수령 경력이 길지 않은 무관인데도 전투 지휘뿐만 아니라 행정 분야 등 다른 능력도 출중했다. 두 사람 수준의 무관도 아닌 문관이 고산국 관리로 지원한다면 이민호가 감지덕지하며 모셔가야 할 상황이었다.
양반들이 이민 가기 싫어하는 고산국은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장기적으로 인재를 길러 자체 수급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은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양반들에게 특권을 인정할 수 없는 체제로 굳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 세력이 시시각각 동진하고 있는 이때, 이민호는 10년 이상을 기다려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원정함대는 다음 날 낮에 대마도에 들렀다. 이즈하라 항에는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나고야에도 허물어진 성터만 쓸쓸하게 고산국 함대를 맞이했다. 진채는 모두 불태워져 있고 수만 명이 몰려 우글거리던 왜병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헛걸음하면 안 좋은데.”
이민호가 함교창 너머 바다와 육지를 살폈다. 왜국의 경계 안에 들어왔는데도 왜선은커녕 어선 한 척 만나지 못했다. 멀리서 고산국 함대가 오는 것을 먼저 발견한 왜인들이 모조리 도망갔다고 이민호는 판단했다.
“탐망선이 돌아옵니다!”
단정보다 약간 크고 노를 저을 수도 있으며 보통은 기관 하나를 달고 움직이는 탐망선 두 척이 이번에 여수에서 함대에 합류했다. 배가 작아서 수병들이 좀 고생하는 것 같지만 속도가 빨라 정찰과 수색용으로 쓰기 아주 좋았다. 탐망선이 기함에 접현하더니 선장이 기함 함교로 올라와서 보고했다.
“전하! 일기도 남서쪽 포구에 왜선들이 몰려 있습니다. 대중소 합해서 200척이 넘어갑니다.”
“앗싸!”
이민호는 물론이고 함교에서 근무하는 모든 이들이 환성을 질렀다. 왜선을 발견하는 게 문제지 발견한 다음 박살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탐망선장이 일기도 포구의 모습과 왜성, 그리고 왜선들의 배치현황을 상세히 그린 종이를 이민호에게 내밀었다. 왜선들이 몰려있는 일기도 남서쪽 고노우라 항 앞에 북쪽부터 오시마, 나가시마, 하라시마가 있었다.
“포구 앞 세 섬에서 적은 못 봤나?”
“수를 알 수 없는 왜병들이 배치돼 있었습니다. 대포는 못 봤지만 아마도 감춰놓았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해도와 대조한 이민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움푹 들어간 포구 앞에 섬 세 개가 있었다. 전선을 들이밀고 함포 사격 지원 아래 해병을 상륙시킨다면 점령하지 못할 곳은 아니었으나, 섬 세 곳을 점령하는 사이에 왜선들이 포구에서 빠져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왜군 지도부가 만약 어느 섬에 조선에서 탈취한 지자총통이라도 배치했다면 예전에 부산포를 공격하다가 절영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골치 아플 것 같았다.
“포구 남쪽이 가장 넓군. 남쪽 끝에 하라시마 한 곳만 점령해야겠다.”
이민호가 작전명령서를 작성하자 항해사들이 베껴서 단정으로 보냈다. 명령서가 전달된 다음 고산국 함대가 이키 섬을 향해 전진했다. 섬과 육지에서 공격할 것에 대비해 좌우에는 전선이, 가운데는 대형 외륜선들이 배치됐다.
말을 실은 범선들은 뒤에 남았다. 승마보병들이 충분히 타고 있기에 왜선에게 공격받아도 문제가 없었다.
“적선들이 몰려나옵니다!”
“잘 됐네. 해병 상륙 취소.”
고산국 함대가 고노우라 항의 남쪽에서 접근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왜선들은 일본 땅으로 도주하려다가 고산국 함대에 의해 남쪽이 막히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 잡아!”
- 쿠쿵!
기함을 필두로 전선에서 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20척이 격침되고 다른 20척이 불타올랐다. 갑판에 오른 해병과 승마보병들도 적선을 향해 열심히 총을 쏘았다. 그러나 보통 때의 해전과 많이 달랐다.
“적선에서 저항이 없습니다. 왜선 갑판에 조총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제기랄! 함장! 당장 포구로 진입해!”
깃대 망루에 오른 무상이 보고한 것과 동시에 이민호가 기함 함장에게 명령했다. 깃대에 초요기를 달게 하고 기함이 속도를 올리자 나머지 함선들이 기함을 따라 만 안으로 진입했다.
- 탕! 타탕!
하라시마에서 왜군 조총병들이 기함을 향해 조총을 발사했다. 거리가 멀어서 보병총 총탄이 닿지 않을 거리이니 무시해도 괜찮았다.
뒤따라오던 대형 외륜선에서 섬 언덕을 향해 함포를 쏘자 조총 사격이 멈췄다. 이민호가 망원경을 들어서 보니 왜병들이 지자총통을 옮기다가 포격에 당한 것 같았다. 화포를 다른 곳에 배치한 왜병들이 고산국 함대가 서쪽이 아닌 남쪽에서 진입하자 서둘러 옮기는 중에 발견돼 함포 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전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이곳은 수심 측정이 되지 않은 곳이라 좌초할 위험이 있습니다.”
“함장! 저길 봐! 예상대로 배를 미끼로 병력이 도망가고 있어. 어서 쏴!”
왜선 50척쯤 세워진 고노우라 포구 바로 뒤쪽에 토굴이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토굴은 왜군의 거주지이니 이곳 포구는 왜군 주둔지가 확실했다. 대마도와 나고야가 여러 번 공격당하자 섬들을 이용해 방어하기 좋은 이키 섬 고노우라로 출발점을 옮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왜선 200척으로 30척에 달하는 고산국 전선과 대형 외륜선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 판단을 한 왜군 지휘부는 수부들만 탄 왜선 100여 척을 미끼로 시간을 끌고 병력은 산으로 도주하게 했다.
토굴에서 기어나온 왜병들이 정신없이 동쪽 언덕길로 도망가고 있었다. 말을 탄 사무라이들도 무조건 달려갔다. 왜병들의 숫자는 약 5천에 달했다. 이와 비슷한 숫자가 이미 언덕 너머로 도주했을 것으로 이민호는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