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4 29. 행주대첩과 한성탈환 =========================================================================
“내가 아바마마의 장남이니 당연히 다음 왕은 내가 되어야 하는데 그 병신 같은 광해 새끼가 세자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어! 언젠가 이민호 네놈도 내게 절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결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너를 반드시 죽이고 말 테다. 너는 왜적보다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임해군이 증오가 가득 담긴 저주를 이민호에게 쏟아 부었다. 이민호는 아마도 임해군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민호는 정신병자에게는 화를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차분해졌다.
임해군의 말소리가 커지자 주변에서 조정 대신들이 주시했다. 조금 떨어진 다른 탁자에서는 선조 임금과 이여송이 역관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실록에는 임해군의 사주를 받아 화적으로 위장한 30명이 포천에서 말을 타고 몰려와 유희서의 가슴을 칼로 찔러 죽였다고 했다. 조선에서 화적들이 말을 타고 다니기도 하나, 기마전투를 하지 않고 말에서 내려 노략질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말 타고 달리면서 칼로 상대의 가슴을 찌를 정도면 무과급제자, 또는 최소한 정규군 기병 수준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 임해군이 역모 혐의로 교동으로 유배를 갔다가 다음 해에 죽은 것이 단순한 모함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임해군이 사병을 키워 실제로 반란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광해군일기 즉위년 기사 여러 곳에 임해군이 거의 공개적으로 가병을 모으고 무기를 저택에 들인 증거가 여럿 나타난다. 군사들이 임해군의 저택을 에워싸고 있는 동안 임해군이 여자 옷을 입고 탈출하다가 잡히기도 했다.
“허허! 왕자께서 말씀이 과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래. 나 미쳤다, 왜? 이게 다 왜적들에게 포로로 잡혔기 때문이야. 나를 왜적들에게 넘긴 함경도 놈들을 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갈겠다. 너도 역적모의를 덮어씌워 죽여 버리겠어.”
“형님! 이 새끼 능지처참하는 것 보고 싶어요. 그리고 고산국은 나 주세요.”
임해군이 정상적인 인간의 논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옆에서 순화군이 한 마디 하고선 이민호와 눈을 마주치자 귀엽게 생긴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순화군도 결코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임해군의 말소리가 점점 커지자 대신들이 귀를 기울였다. 눈치가 빠른 왕자 형제는 표정을 확 바꿔 헤실헤실 웃으며 이민호를 칭찬했다. 더 이상 두고 볼 것이 없자 이민호가 일어났다.
“주상전하! 주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허허! 대인께서는 언제든 불곡에게 하명하시오!”
이여송이 더욱 정중하게 대하자 선조 임금은 이 변화가 이민호 덕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류성룡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민호가 이여송을 거의 통제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민호가 그저 이름뿐인 관작만 높은 줄 알았는데 실권도 행사한다는 사실에 선조 임금은 많이 놀랐고, 군사력도 뛰어나 이제는 이여송보다 이민호에게 매달리려고 작정했다.
그래서 이민호가 원하는 것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려 했는데 이민호가 왕자들과 함께 앉았던 탁자 밑에 숨어있는 자를 불렀다. 고산국의 상왕이며 외우는 머리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여송 사람 고봉명이었다. 등대지기하기 너무 지겹다고 해서 인간녹음기로 활용하기 위해 이번 원정에 데려왔다.
“왕자들하고 나눈 대화 다 들었지? 읊어봐.”
“처음 듣는 어려운 말이 많아 들은 대로 읊겠습니다.”
고봉명이 선조 앞에서 임해군이 이민호에게 퍼부은 욕설을 그대로 읊었다. 고봉명은 기억력 못지않게 성대모사도 잘했다. 글이 아닌 말을 하는데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는다고 평가할 만큼 고스란히 임해군의 말을 복제해냈다. 선조 임금의 얼굴이 허옇게 변하는 사이 입시한 사관들이 열심히 사초에 기록했다.
“아닙니다! 아바마마 이 새끼가, 아니 주애공 대인이 저 시커먼 인간에게 거짓말 시킨 겁니다! 저는 절대 그런 말을 안 했습니다. 어흑흑! 저를 믿어주십시오! 이건 모략입니다!”
임해군이 선조 임금 앞에 무릎 꿇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 사이 이민호는 묵묵히 서 있었다. 유희서의 사례가 있듯이 선조 임금이 당연히 자식 편을 들 줄 알았다.
이민호와 임해군을 번갈아서 보던 선조 임금이 어느덧 결심한 듯했다. 임금이 차분한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임해군을 나무랐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실로 임해 너에게 책임이 있는데 어찌 남을 탓하는가. 하늘을 원망할 것도 없고 남을 허물할 것도 없다. 그저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위에 구만리 창천이 가까이 있으니, 필시 옥사(獄事)가 이루어질 것이고 크나큰 외교적 결례를 저지른 너를 참형으로 죄를 다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설령 네가 불행하게 되더라도 사람이란 한번은 죽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니, 자신을 반성해 볼 때 곧다면 어느 경우인들 호연(浩然)하지 않겠는가. 대저 사람의 화복과 영욕은 모두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은 천명이다.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의 용맹으로도 어찌할 수 없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언변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죽게 되어도 원망하지 못하고 구해도 얻을 수 없는 법이다. 네가 어찌 지극히 묘하고 지극히 신기한 이런 이치를 알 수 있겠는가?”
“어흑흑!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요?”
“이 무식한 것아! 공부는 접어두고 엽색행각이나 하니까 왕자가 이런 말도 못 알아듣지! 일단 옥에 들어가서 곤장부터 몇 대 맞고 시작하자. 대화는 그 다음이다. 일단 이 대인께 사과부터 하여라.”
“제가 왜 사과해요?”
“도저히 안 되겠구나.”
선조 임금이 명해서 금군들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박해 끌고 갔다. 임해군은 끝까지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끌려갔다. 순화군은 벌써 자식까지 낳은 주제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선조 임금의 부성을 자극했다.
“이 대인! 일단 불곡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무례를 용서받기 힘들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임해의 목을 베리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죄를 주기도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임해군이 주상전하를 믿고 계속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것 같으니 앞으로는 밖에 나다니지 않게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함경도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지만 이 대인께 끼친 무례를 용서받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몹시 불쾌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이민호가 괜히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삐친 표정이었다. 선조 임금이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이민호가 계속 말이 없자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승첩으로 인해 이민호가 주본을 황제에게 바칠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선조 임금을 강하게 압박한 탓이었다. 선조 임금 입장에서 이민호의 기분 따위야 중요하지 않지만 황제에게 잘못 보이면 끝장이었다.
“대인! 저번에 내수사 전수에게 들으니 대인께서 금광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금이 발견되긴 했으나 채굴하지 못하게 한 산이 몇 곳 있습니다. 평안도 운산과 태천, 함경도의 안변과 단천 중에서 두 곳을 고르십시오. 이것으로 제 못난 아들놈의 목숨 값을 치르겠습니다.”
운산 금광은 20세기 전반에 대박을 터뜨린 곳이었고 단천 은광은 금과 은이 함께 나는 곳이었다. 두 곳 모두 이민호가 눈여겨보던 광산이었다. 나머지 두 곳도 괜찮은 금광이었다.
조선에는 사금이 나거나 지표면에서 채굴하는 곳이 훨씬 많았다. 1935년 한 해 동안 조선총독부에 접수된 금광 출원 건수가 1만 500건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통은 몇 년 캐면 끝날 정도로 산출량이 적었다. 대량 채굴을 하려면 역시 갱도를 파고 들어가는 광산이 나았다.
“주상전하! 지금 조선국이 고산국에 진 채무가 많습니다. 이번에 전리품을 조선에 나눠주는 셈 쳐서 일부 깎아드리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그건 조선국의 채무이지 왕실의 채무가 아닙니다.”
“예?”
이민호가 이렇게 얼빠진 소리를 낸 것도 오랜만이었다.
“전쟁 때문에 고산국에서 쌀이나 화약 등을 급히 샀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나 왕실에서 개인적으로 쓴 돈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오나 주상전하께서 이번 전쟁을 이기기 위해 왕실 자금이라도 쓰셔야 합니다. 내탕고의 보물 때문에 강화부에서 반란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내탕고의 문을 여시고 몇 년 만 지나면 제가 그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채워드리겠습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선조 임금은 이해를 못했지만, 이민호가 그렇다고 하니까 일단 수긍했다. 이민호는 홍삼무역 한 가지만으로 매년 황금 20만 냥 이상을 왕실 몫으로 배분하는 훌륭한 상인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금광 네 곳을 모두 대인께 넘기겠습니다. 이것으로 국가채무도 모두 갚은 것으로 갈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금광이라 하나 금이 얼마나 나올지 모릅니다. 과연 금광 하나가 백은 150만 냥 가치가 되겠습니까? 도로 닦고 광부 고용하고, 거기에 세금이라도 내게 되면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네 곳 모두 내수사 소속이니 세금을 안 받기로 하겠습니다. 금광을 운영하려면 인근 고을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켜야 하는데 다들 피난을 떠나서 부역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광산까지 도로를 닦을 때만 부역을 동원하고 광부는 제가 고용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민호는 부역하러 나온 백성들에게 밥을 주고 임금도 줄 생각이었다. 함경도나 평안도는 인구가 적어 부역을 핑계로 사람을 끌어 모을 필요가 있었다.
“채무 문제는 잘 해결됐습니다만, 부디 대인께서 오늘 일을 오래 기억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날벼락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궤변에 말리고 바로 다음 날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임해군에게 실컷 욕을 먹은 이민호는 사실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전쟁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우고 조선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후 이민호는 선조 임금, 그리고 이여송과 대화를 나눴다. 주로 군량 보급에 관한 일이라 자질구레하면서도 무척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때 작은 방에서 익선관을 쓴 청년이 문을 살짝 열고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슬그머니 나왔다. 올해 들어 19세 청년이 된 광해군이었다.
잠시 후 그 방에서 궁녀가 하나 나왔다. 둘이서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감이 잡혔다. 그런데 세자가 상대한 여인치고는 너무 못 생겼다는 점이 몹시도 마음에 걸렸다. 조용하다 했더니 뜻밖에 선조 임금도 그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불곡이 저래서 광해를 싫어하는 겁니다.”
“소신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 궁녀 이름이 김개똥이입니다. 분명 불곡이 승은을 내린 것을 알면서도 광해 저놈이 김개똥이를 끼고 돕니다.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겠지요. 왕위가 탐나 인륜을 저버린 놈이 광해입니다.”
김개시, 또는 김가희라는 이름의 궁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수라간 쪽으로 향했다. 김개시는 상궁으로서 선조의 독살설부터 인조반정 때 광해군이 대응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설까지 연루된, 남자로 치자면 대단한 풍운아였다. 광해군 재위 중에 가까이서 도운 전략통으로 알려져 있었다.
“자식 농사를 잘못 지어 아들놈들이 다 저 모양입니다. 불곡에게 적장자가 없어서 서러울 때가 많습니다.”
“유감입니다. 왕실이 번창하는 것은 좋은데 왕자들이 많아지면서 바람 잘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인께서도 어서 정식 혼사를 맺으십시오. 불곡도 첩의 자식이지만 첩 자식은 정말 믿을 게 못 됩니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이것들이 살살 제 눈치만 살피면서 서로 음해하기 바쁩니다. 누가 왕이 되더라도 왕실에 피바람이 몰아칠 것 같습니다.”
“다행히 광해군은 인품과 학식이 훌륭하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다 헛소문이지요. 하지만 대안이 없으니 저놈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후계자를 나쁘게 말하면 안 되는 법이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아들을 후계자가 아닌 정적으로 생각하고 미워하는 듯했다. 이민호는 선조 임금의 배 둘레 길이를 살핀 다음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만수를 누리시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광해군도 주상전하처럼 훌륭한 왕이 되실 재목입니다. 잘 해낼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대인께서 왕실을 위해 많은 일을 해오셨는데 불곡이 보답을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불곡 슬하에 시집 안 간 옹주는 없고, 종실에서 괜찮은 처녀를 골라드리면 어떻겠습니까?”
“황공합니다. 하지만 왕실의 외척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긴, 나라를 세우자마자 과거의 본국에 휘둘리기 쉬우니 조심해야겠습니다. 고산국 궁궐에 계시는 명나라 공주는 정식 혼사가 아니었지요?”
“예. 하오나 훌륭한 내자입니다.”
임금이 되면 생각할 게 많은 것 같았다. 이민호는 머리가 비상하기로 소문 난 선조 임금 옆에서 왕실 가족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반면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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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읽다가 열받더라도 써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다음 회부터 다른 곳으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