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3 29. 행주대첩과 한성탈환 =========================================================================
“이 제독! 이제야 이번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을 돈 것 같소.”
“그렇습니다. 이제 슬슬 쫓아가면서 수급이나 주워 담으면 될 것 같습니다. 듣기로 통제사가 지휘하는 수군이 바다를 잘 틀어막고 있다고 하더군요. 조선에 발을 디딘 왜놈들은 모두 목이 잘릴 것입니다.”
실제 역사와 달리 왜군 부대에 사상자가 다수 발생해도 바닷길이 막히는 바람에 인원 보충을 못해주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동원된 모든 부대는 전멸하거나, 아직 편제를 유지하더라도 개전 초기와 비교해 병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행주대첩에 참가한 유명 다이묘가 여러 명인데도 병력은 겨우 3만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이여송은 왜군을 급히 쫓아가다가 벽제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매복에 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여송은 조선에서 군량 조달을 늦게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천천히 남하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소. 그런데 이제 조선 국왕전하께 이번 전공을 보고해야 하지 않겠소? 본작은 이 제독이 도성을 탈환한 것이 수공(首功)이라 생각하오.”
“제가 수공이라니 감사합니다만, 글쎄요. 제가 조선국왕께 전공을 보고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하명하신다면 시간을 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조선군의 작전권을 이여송이 간섭하는 수준이라 이여송이 조선 국왕에게서 보고를 받는다면 몰라도 보고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여송은 애써 행재소가 위치한 정주까지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여송은 요동에 있는 경략 송응창에게 보고하면 그것으로 전과 보고는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재 전선이 열린 지역이 조선이니 국왕전하 체면 좀 세워주시오. 이제 보니 본작이 곧 황제폐하께 승첩을 보고하는 주본을 올려야 하는데 말이오.”
“전하! 당연히 소장이 행재소에 가서 조선국 국왕전하께 도성 탈환의 전공을 보고하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조선국에서 도성 탈환을 감사하며 황도로 사은사를 보내거나 표를 올릴 수도 있겠군요. 제가 조선 국왕전하께 잘 설명하겠습니다.”
“그것 참 고맙소. 주본에 이 제독 이야기를 잘 써주겠소. 평양성에 이어 조선국의 도성을 탈환한 이 제독의 전공을 어느 누가 감히 무시하겠소? 이 제독께서 드디어 도독에 오르시겠구려.”
“그렇게 된다면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겠습니다. 모두 전하의 위명 덕분입니다.”
제독총병관 이여송은 아직 도독이 아닌 종1품 도독동지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수 무관이 도독에 오르기 쉽지 않았다. 이민호가 꺼낸 황제라는 한 마디에 이여송은 껌뻑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민호는 한성을 조선군에 맡기고 명군은 용산에 진을 치게 하고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포로와 전리품을 가득 실은 고산국 연합함대가 한강을 떠났다. 연합함대는 양화진에서 이여송 등을 배에 태우고 파주에서 권율의 장계를 휴대한 군관을 태운 다음 정주로 향했다.
전선과 대형 외륜선, 수송선들이 밤새 항해해 정주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민호는 미리 행재소에 전령을 보낸 다음 말을 타고 수급과 전리품이 가득 실린 수레 수백 대와 3천 명에 달하는 왜군 포로를 이끌고 천천히 정주로 향했다.
“오! 조선국왕 전하께서 이번에도 동구 밖까지 나와 계십니다. 참 예의바른 국왕이십니다.”
“그러게 말이오. 어서 갑시다, 이 제독.”
감탄하는 이여송과 달리 이민호는 속이 쓰렸다. 선조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행재소 밖에 나와서 기다리는 대상은 이민호가 아니라 이여송이었다. 이렇게 은근히 이민호와 이여송을 차별대우했지만 이여송은 조선의 손님이고 선조 임금이 설정한 조선의 은인이니 이민호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민호와 이여송, 그리고 선조 임금이 정주부 행재소에 들어갔다. 조선 국왕과 비슷한 직위가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이 되니 의전 절차가 더욱 복잡해졌다. 또 한참 주례를 어떻게 할 것인지 실랑이가 벌어지고, 결국은 선조 임금과 이민호, 이여송이 원탁을 중심으로 한 자리에 앉았다.
원탁이 상징하듯 앉은 세 사람 모두 동등한 위치였지만 이민호가 일부러 선조 임금을 북쪽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임금은 이여송의 눈치를 살피며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결국 북쪽에 앉았다.
그 사이 조정 대신들이 이민호에게 몹시 고마워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이 다시 일어나더니 이여송에게 말했다.
“도성을 탈환하신 이 제독 대인께 제가 큰절을 올려서 감사를 표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조선국 국왕전하! 국왕전하께서는 제가 당연히 거절할 것을 아시면서 왜 그런 것을 자꾸 강요하십니까? 더 이상 가짜 예의로 분위기 깨지 마시기 바랍니다.”
“송구합니다.”
무장으로서 복잡한 예의를 싫어하는 이여송이 벌컥 짜증을 냈다. 이여송은 그 동안 선조 임금 앞에서 꾹꾹 참아왔다가 이번에 한꺼번에 폭발한 것 같았다.
이여송은 명나라에 있을 때도 고위 문관들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핵도 받고 월봉이 박탈된 적도 있었다. 조선에 와서는 패문으로 꾸짖을 때 외에 실제로 선조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과 직접 만나 대화할 때는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이여송 제딴에는 조상의 나라라고 해서 많이 참은 셈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이여송에게 눈짓을 해서 사과하도록 했다. 이여송은 처음에 못 본 척하다가 이민호가 인상을 찌푸리자 마지못해 선조 임금에게 무례를 사과했다. 그 후에 이민호가 나서서 포로를 들이도록 했다.
“주상전하! 이번에는 포로가 된 왜추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조선 강토를 짓밟고 주상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자들입니다. 주상전하께서 꾸짖어도 괜찮으나 황제폐하께 바쳐야 할 포로들이니 죽이지만 말아주십시오. 여봐라! 차례로 들이도록 하라!”
소서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외교승 겐소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왜장이 비록 칼을 차지는 않았더라도 갑주와 투구를 갖추고 들어오니 심기가 약한 조정대신들은 뒤로 발랑 넘어지기도 했다.
“오! 저 자는 현소! 그렇다면 옆에 장수가 소서행장이오?”
“그렇습니다, 주상전하. 절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의지는 부상이 심해 병상에 누워 있어서 못 데려왔습니다.”
“오오! 세상에! 불곡이 죽기 전에 행장이 내게 절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고니시 유키나가님과 겐소 스님은 조선국 국왕전하께 인사를 올리시오.”
이민호가 일본어로 말하자 소서행장이 무릎을 꿇고 선조 임금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겐소는 스님이라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이어서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들어와 선조 임금을 향해 차례로 절을 했다. 이민호는 왜장들이 선조 임금에게 절하는 동안 일부러 이여송과 함께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그러나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 차례가 되자, 절을 마친 그가 소리를 질렀다.
“조선국 국왕전하! 할복하게 해주시면 황공하겠나이다!”
“주애공 대인! 저 왜장이 뭐라고 하는 것이오?”
“격식을 갖춰 스스로 배를 칼로 가르겠다고 합니다. 하오나 황제폐하께 바칠 포로이니 상처라도 나면 곤란하옵니다.”
“할복하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아깝소.”
이 시대 일본의 신분제도가 엄격해서 그런지 전쟁 중에도 적 영주나 높은 신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키려 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왜인이나 왜추 풍신수길이나 다 같은 나쁜 놈이지만, 왜장들은 조선의 임금이나 고관대작에 대해서는 깍듯하게 존칭을 썼다.
그러니 왜장들 입장에서는 고산국왕이 아닌 명나라 제독총병관 신분으로 참전한 이민호에게 절을 하는 것은 패자인 포로 입장에서 자존심 상할 일이지만, 교전당사국 즉 적국의 왕인 선조 임금에게 절을 하는 것은 하등의 불명예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영광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문화 차이를 모르는 선조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그 악독하던 왜장들이 맞소? 왜 이리 고분고분한 거요? 심지어 절을 정중하고 절도 있게 하는 것 같소. 일본 장수들은 자존심이 없는 것이오?”
선조 임금의 의심병이 도진 것 같아 이민호가 설명했다.
“소서행장이나, 심지어 그 난폭한 가등청정마저도 주상전하께 표를 바칠 때는 공손한 문체를 사용했지 않습니까? 왜추들은 비록 야만인들이지만 국왕을 땅이 아닌 하늘이 낸다는 사실을 유교 경전을 통해 익히 들어서 이렇게 주상전하께 공손한 것입니다.”
“허허! 중화 문명을 왜인들이 숭모한다더니 사실이었구려.”
모든 시대 전 세계를 통틀어 국왕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론이 왕권신수설일 것이다. 선조 임금도 그 설명을 듣고 매우 흡족했다.
이어서 임금과 함께 행재소 밖으로 나와 3천 명이 넘는 왜병 포로들을 사열했고, 소금에 절인 수급과 화려한 갑옷들을 잠시 구경했다. 고산국 병사들이 쓰지도 않을 전리품을 잔뜩 가져와 들판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아! 고산국왕이시며 주애공이신 이 대인! 임해군과 순화군이 왜적의 손에서 풀려난 것은 주애공 대인의 덕택이라 들었소. 왕자들이 주애공 대인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해서 데려 왔소이다.”
“주상전하! 함경도 장졸들이 잘 싸운 덕택이지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번거롭게 따로 인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이 반강제로 떠밀어서 이민호는 억지로 임해군과 순화군을 만나게 되었다. 임해군은 올해 나이가 서른둘로, 선조 임금의 장자이며 광해군의 형이었다. 순화군은 열네 살인데 인상을 찌푸리며 하품을 해댔다.
이민호는 사전에 의전 담당자인 예조 참판과 약속한 대로 왕자들과 서로 읍을 한 다음 탁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왕자들이 감사의 말을 하는 시간인데 임해군이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이름이 이민호라고 했지? 쓰레기 같은 무인의 자식 주제에 운 좋게 출세했군 그래. 좆만 한 고산국의 왕은 별 것 아닌데 천조의 주애공에 제독총병관이라니, 부럽다. 출세하려고 황제한테 똥구멍이라도 바쳤냐?”
“왕자님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하하!”
이민호는 이럴 줄 예상했다. 오죽했으면 함경도 백성들이 반란에 대거 가담했을까. 그래서 이민호는 왕자들이 감사 인사를 하는 자리를 만들지 말라고 선조 임금에게 부탁했었다. 그러나 예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조선 왕실에서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아무리 사악하고 정신 나간 자라 해도 보통 이 정도로 미친 소리를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착한 척 행동하고 말로는 아부를 하며 사람들을 속인 다음 뒤통수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사건들을 살펴보면 임해군은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너 왜 늦게 구해줬어? 나 엿 먹으라고 일부러 천천히 왔지? 그리고 안변부에서 내가 풀려날 때까지 머리 조아리고 기다릴 것이지 어째서 하찮은 병마평사 따위한테 석방 교섭을 미뤘나? 앙? 정 평사, 오 부사, 정 부사 이 새끼들 모두 내게 따귀 열 대씩 맞았지. 주변에 대신들이 없으면 너한테도 따귀를 날려주고 싶군. 앞으로 조선에 오거든 밤에 조심해. 자객들을 사서 저승으로 보내주마.”
“허허! 농담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나 임해군이 언급한 자객 이야기가 농담이나 과장은 아니었다. 선조수정실록 1603년 1월자 기사 사관론에 임해군이 자객을 사서 전 개성유수 유성군 유희서를 죽인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선조실록에서 유희서로 검색해보면 정승이나 대간들이 비판해도 선조 임금이 끝까지 임해군을 감싸주었고, 수시로 비망기를 내려 의금부에서 진행되는 옥사를 철저히 통제했다. 이로 인해 선조 말년에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심희수 등 숱한 사람들이 사직을 청하거나 파직됐다.
임해군은 유희서의 첩 애생과 간통하면서 노비 김덕윤을 시켜 30명을 동원해 말 탄 화적으로 위장하고 유희서를 칼로 찔러 죽였다. 유희서의 아들 유일이 사건에 가담한 설수와 김덕윤 등을 체포했으나 포도청에서 제대로 심문하지도 않았는데 살인범들이 옥 안에서 줄줄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나중에는 거꾸로 유일이 임해군 암살 미수 혐의로 형신을 당하고 죽기 직전에 정경부인인 할머니의 청으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다.
결국 비명에 간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던 유일은 장 100대를 맞고 동래로 유배되었다. 살인범들을 취조했던 포도대장 변양걸은 임해군을 음해했다는 혐의로 장 90대를 맞았다. 그 이후 임해군은 기고만장해서 더욱 날뛰게 되었다. 그 전에 임해군의 종들이 유희서의 집에 몰려가 옥에서 죽은 김덕윤의 시체를 내던지면서 욕설을 퍼붓고, 정경부인인 유희서 모친의 머리채를 잡고 집단 구타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 작품 후기 ============================
쓸데없이 임해군 이야기에 필이 꽂히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자료 찾아 쓰면서도 이렇게 불쾌하니 읽은 분들은 얼마나 불쾌할까요?
다음 회에 광해군 만나고 다음 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