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2 29. 행주대첩과 한성탈환 =========================================================================
“나베시마님이시오? 우리 구면이구려. 도대체 뭐가 심하다는 말씀이오?”
이민호는 알면서도 딱 잡아떼고 물었다. 웬만한 교전 당사자 사이에서 이런 일은 생기기도 힘들고, 양쪽 지휘관들이 억지로 시켜도 병사들끼리 싸우다가 전투로 확대되는 사고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힘의 우열이 명백하므로 왜병들은 감히 대들지 못했다. 행주산성을 공격하러 갔던 3만 대군이 몽땅 죽거나 잡힌 사실을 한성에 남은 왜군들도 다들 알고 있었다. 특히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험악하게 생긴 흑인 보병이 인상을 쓰며 내려다보면 왜병들은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고산국 국왕전하! 저희 일본군은 이여송 제독과의 협정에 의해 휴전 상태에서 평화롭게 퇴각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군사들을 풀어 저희들을 마치 포로나 범죄자 취급하고 계십니다. 시정해 주십시오.”
“시정 같은 소리 하지 마시오. 내 군사들은 정상적인 전리품이 아닌 약탈품을 왜병들에게서 되찾아 주인에게 돌려주려는 것이오. 왜군이 도둑질을 하는 군대라면 왜구 범죄자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소? 불만이시라면 휴전 협정을 파기하고 지금 당장 싸우든지 합시다.”
이민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베시마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함경도 영동 책성 전투에서 분명히 봤다. 이민호가 손가락을 뻗는 곳마다 폭발이 일어났고, 가토 기요마사는 그 폭발에 휘말려 죽었다. 그것이 대포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마치 조건반사처럼 이민호의 눈길과 손짓을 두려워했다.
여진족 호위들과 나베시마가 데려온 근습무사들도 서로 노려보며 눈싸움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항상 승리만 해오고 권총까지 휴대한 여진족 호위들이 압도적으로 이겼다. 일본 무사들은 호위들이 가진 자신감이 권총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하고 뭔가 믿을 만한 다른 것이 숨어있는 줄로 오해했다.
결국 이민호와 호위들이 나베시마와 근습무사들을 말없이 꾸짖는 모양새가 되었다. 류성룡과 젊은 관료들이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이 모습을 보고나서는 몹시 감동했다.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시면 좋겠습니다.”
“침략자 주제에 우리가 예의로써 대해주길 원하는 거요?”
“저희가 침략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본군이 태합 합하의 명으로 명나라를 도모하려는 차에 조선에 협조를 구해 길을 빌리려다가, 그만 작은 오해가 생겨서 조선을 조금 압박한 것뿐입니다.”
“음. 그것 참 이상한 논리로군요. 그럼 내가 만약 아이누인들의 땅인 에조치를 도모하고 싶어서 바다를 건너 혼슈를 지나려는데, 일본이 협조를 안 해줄 것 같으면 압박을 조금 가해도 괜찮겠소? 길을 빌리는 통행 중에 누군가 길을 막으면 전투를 할 수도 있고 말이오.”
“말도 안 됩니다, 전하. 그건 통행을 빙자한 침략입니다!”
“바로 지금 조선이 일본에게 당하고 있는 상태 그대로요. 나베시마님은 논리에 일관성이 없잖소?”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일본에서 지장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주군 가문인 류조지 가문을 승계할 때는 일부러 23년이나 기다려 오히려 류조지 가의 가신들이 얼른 계승해달라고 안달 나게 만들어 명분을 얻는 장기적인 책략을 쓰기도 했다. 결국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아닌 아들 가츠시게가 류조지 가문의 가독을 상속했다.
“일관성 있습니다. 우리한테 이로워야 합니다. 그게 기준입니다.”
“미운 일곱 살도 아니고 도대체 말이 통하지를 않아! 당장 꺼져! 꼬우면 싸우자!”
그러나 함경도 영동 책성에서 고산국의 화력을 충분히 구경한 나베시마는 감히 싸우자는 소리를 못했다. 주변에는 나베시마를 노린 보병총과 권총이 백여 정이 넘었고, 천막 너머에는 대포도 2문이나 있었다.
“저는 일단 협정을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전하를 상대로 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하의 생각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이상하시군요. 조선 사람들도 생각하는 게 이상합니다. 그러나 안남이나 여송 같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저와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도록 노력하셔야지요.”
“네놈이 이상한 거다! 비슷한 사안에 대한 평가를 할 때는 잣대가 동일해야지!”
“사람마다 저만의 판단 기준, 잣대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실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 연치가 어리시니 더 배우실 기회가 많을 겁니다.”
“네놈은 늙어서 궤변만 늘었구나.”
나베시마는 얼른 퇴각 행렬로 돌아갔고, 이민호는 열만 받고 말았다. 벌떡 일어나서 권총을 꺼내드는 이민호를 민희와 민영이 말렸다.
“주인님! 진정하세요.”
“그래. 어휴! 거 참 사람 열 받게 하는 인간이야.”
현대에서 2채널 극우 일본인들처럼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었다. 이민호는 다음에 나베시마를 만날 때는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총칼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나베시마가 속한 류조지 가문은 큐슈 북서쪽에 있으니 일본에 원정할 때 당연히 첫 타자였다. 그때 제대로 손을 봐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사이에도 왜병들에 대한 검색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왜병들은 이민호가 화가 난 것을 알고 훨씬 더 조심스레 소지품 검사에 임했다. 목숨이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을 절감한 왜병들이 알아서 기느라 일본에서 가져온 은 조각과 에스파냐 은화까지 바쳤다.
결국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수레가 줄을 지어 천막으로 향했다. 여기서 분류가 이루어져 주인을 찾아줄 수 있는 극히 소수의 물품만 따로 목록을 작성해 보관하고, 나머지는 2등분했다. 이민호는 절반은 고산국 수송선으로 옮기고 절반은 정주 행재소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류성룡이 이민호만 따로 불러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저 보화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아마도 내탕고로 들어가 왕실 재산이 될 것입니다.”
“음. 듣고 보니 맞는 말씀입니다. 주인 없는 보화를 두고 주상전하께서 가만히 안 계시겠지요.”
이민호는 황금상 때처럼 선조 임금이 신하나 백성들에게 욕을 먹게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행재소에 보내려 했다. 그러나 류성룡이 눈치를 챘는지, 아니면 순수하게 국가재정을 고민했는지 다른 의견을 냈다.
“조선 조정에서 제독총병관 대인께 진 빚이 많습니다. 잘못하면 빚 때문에 전후 복구 사업이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 보화를 대인께서 다 가지시고 빚 일부를 차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선 조정에 되도록 빚을 많이 지우게 하려는 이민호의 의도가 여기서 막혔다. 조선 조정은 전쟁을 이유로 그 동안 무분별하게 쌀과 화약, 유황, 구리, 물소 뿔 등을 고산국에서 수입해 빚이 은으로 3백만 냥에 달했다.
이민호는 채권을 무기로 해서 조선 조정을 압박해 이권을 뜯어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채무를 걱정하는 대신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이민호는 몹시 당황했다.
벼슬아치에게 채무란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적게 걷고도 일을 많이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벼슬아치는 국가나 관아의 이름으로 쌓인 채무를 임기가 끝나면서 후임자에게 넘겨버리면 되니까 책임 질 필요가 없었다. 그 빚을 결국은 백성들이 세금으로 갚아야 하는데도 일단은 물자가 풍족해지니까 백성들도 좋아했다.
현대 선진국들도 국가채무를 늘리면서 흥청망청 돈을 써대는 재미에 빠지기 쉬운데 이 시기 조선에 이런 재상이 있다는 사실에 이민호는 많이 놀랐다. 류성룡은 채무를 끌어오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채무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그럼 주상전하나 조정 대신들로부터 말이 많이 나올 텐데요?”
“저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주상전하로부터 충분히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대신들도 저를 탄핵할 거리를 많이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날 것 같으면 체직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삭탈관직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류성룡은 실록 1593년 3월 27일자 기사에서 보듯 이 당시 이미 선조 임금의 눈 밖에 나 있었다. 그러나 능력이 워낙 뛰어나 전쟁 중에 파직하지 못하고 1598년 노량해전 직전에 파직한다. 실록에서 선조 임금이 대신들 앞에서 공공연히 밝힌 류성룡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유성룡의 사람됨은 내가 자세히 아는데 적을 헤아려 승리로 이끌어 가는 것은 그의 장기가 아니다. 처음에 군량을 담당하는 대신으로서 곤외(閫外)의 직임을 전보받았는데, 요사이 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한 나라의 곤수(閫帥)가 되어 강화한다는 말을 듣고 한 번도 적을 치고 원수를 갚자는데 언급하거나 명장 앞에서 머리를 부수며 쟁변하는 일은 전혀 없고 강화의 말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으며, 임무를 받은 뒤로 한 번도 기이한 계책을 세워 적을 격파한 적이 없으니 아마도 끝내는 일을 실패시킬 듯하다.’
“정치가 뭔지, 권력이 뭔지. 쯧쯧! 짜증나면 언제든 고산국으로 오세요. 고산국이 새로 건국해서 할 일이 많습니다. 영상께서 실컷 일할 수 있는 곳입니다.”
“불사이군이라 했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난다면 다시는 봉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안타깝군요.”
그 날 왜병들에게서 압수한 물품의 절반을 조선 조정의 몫으로 하고, 대금으로 은 30만 냥을 책정했다. 그리고 빚을 까주면서 이민호는 금광 하나가 날아간 것 같아 아까워 죽으려 했다.
오후 늦게 왜병들이 남대문에서 거의 다 빠져 나갔다. 왜군은 여러 다이묘 단위로 소지품 검사가 끝나면 집결해서 청파로 향했다.
왜병들은 여기서 작은 배를 나눠 타고 동작진으로 건너갔다. 3만여 명이 한강을 건너는데 하루 이상 걸릴 것 같았다.
“귀찮은데 외륜선 몇 척 빌려줄까?”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가 약속을 깨고 공격할까 봐 얼마나 무섭겠어요? 불안해서 밥을 먹어도 체할 거여요.”
이민호가 기마병들을 이끌고 청파 언덕에서 한강을 내려다봤다. 고산국 기마병이 추격전을 펼치는 줄 알고 왜병들이 벌벌 떨었다. 민희 말이 맞는 것 같아 배를 빌려주지 않았다.
충청수영 소속 판옥선 네 척이 한강에 배치돼 왜군의 도하과정을 지켜보았다. 충청수사 정걸은 왜병들을 공격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만 이미 제독부와 체찰부로부터 엄명을 받아 공격하지 못했다.
이민호는 일부러 기마병들을 시켜 교대로 강변을 달리게 했다. 그리고 기병포를 청파 언덕에 세워 강변에 왜병들이 집결한 곳을 조준시켰다. 딱히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여차하면 발포하도록 했다.
왜군 지휘부는 밤새도록 작은 배들을 왕복시켜 왜병들을 실어 날랐다. 그리고 새벽 무렵에 겨우 한강을 다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강을 건넌 왜병들이 혹시나 고산국 원정군이 대포를 쏠까봐 후다닥 달려 도망갔다.
“전하! 드디어 왜병들이 다 도망갔군요.”
“오! 이 제독 어서 오시오.”
“제가 독단적으로 왜군과 짧게나마 강화를 맺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오. 잘했소.”
이민호가 이른 아침에 남대문 앞 천막에서 나왔다. 예전에 영하에서 방문한 것처럼 이여송이 부하 장수들을 데리고 진채 앞에 와 있었다.
류성룡은 지난 달에 이여송에게 욕을 먹은 것 때문에 굽실거리고 있었다. 선조실록 1593년 1월 13일자 기사를 보면 이여송이 조선국을 수신자 명의로 패를 보내 류성룡과 윤두수를 비난한 적이 있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추운 들판에 천막을 치고 고생하는데 조선 대신들은 따뜻한 집에서 편히 지내며 술을 마셨다는 내용이었다. 이여송은 요동으로 돌아가겠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왜장들이 넘긴 수급 2500과 중에서 전하께 1500과를 바칩니다.”
“됐소. 내가 언제 수급을 탐하는 것을 보셨소? 이 제독의 수하 장수들에게 전공을 돌리시오.”
“이번에도 신세를 지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행주산성부터 마포까지 추격하면서 왜병들을 학살하다시피 한 다음 얻은 수급이 1만 5천 과에 달했다. 포로도 다이묘급부터 병사까지 3천이 넘었다. 이민호가 겨우 1500과를 탐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휴전을 조건으로 왜장들이 이여송에게 넘긴 수급에 문제가 있었다. 말로는 왜군 전사자나 회복할 수 없는 중상자의 목을 벤 것이라 하지만 조선인의 수급이 상당수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괜히 수급을 받았다가 조선인의 목을 베었다고 이민호까지 덤터기를 쓸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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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처리 한 회를 더 써야겠습니다.
최소한 광해군은 만나고 가야죠.
감사합니다!